철학 카페에서 읽는 소설 #2 :
“최악의 소식이 왔다. 아침나절 총기를 분해해 점검하던 사병이 잘못해서 총알이 나간 게 오빠의 다리를 관통했다는 것이었다. (…) 다량의 출혈로 창백해진 오빠는 되레 평온해 보였다. 오빠는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희망을 잃은 평온함이 처절해 보였다. (…) 엄마가 우리의 동요를 대변했다. “떠나자, 죽는 한이 있어도 가는 데까지 가다가 죽자.” ”
한국전쟁으로 피난이 한창인 서울 한복판. 그녀(주인공)는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 먼저 피신해라. 너는 좋은 세상 살아야지.”
그녀는 생각했다. 좋은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일까? 공부 잘하는 오빠 덕에 서울로 상경해 가봤던 크고 으리으리한 도서관에서 본 세상? 복순이와 고등학교 합격 기념으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날 본 세상? 아니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모든 것을 마음껏 먹던 시골에서 어린 시절 겪은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
생각에 잠긴 그녀의 두 눈이 감겼다. 기억의 습작이었을까.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여고에 입학했을 때, 일본은 패색이 짙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규 수업을 며칠 받아보지도 못하고 다들 군수품 산업에 동원되었다. 일본의 전쟁을 위해 식민지인 한국의 학생들이 군수 지원 작업에 동원된 것. 오전에 두 시간 수업을 받고 나면 교실이 곧장 공장으로 변했다. 군복에 단추를 다는 일과 운모를 다듬는 작업을 했다. 어느 소녀가 소리 소문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 정신대 때문이었다. 우물에 물을 긷던 소녀를 일본 순사가 외곽으로 끌고 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말세의 징후였다. 돼지라는 동물이 오로지 사람의 식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끌려가는 것처럼, 한국의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욕을 위해 완전히 도구화되고 있었다.
지옥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개학하기 전에 일본이 망하고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천지개벽.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이윽고 조용하고 비통해졌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었고 언제나처럼 그는 일본어를 섞어 쓰며 학생을 가르쳤다.
달라진 건 그녀의 가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부러움의 대상이 한순간에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오빠가 한때 총독부에서 근무했다는 것과 숙부가 마을 ‘유지’로 일본의 호의를 누리며 살아왔다는 게 이유였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문짝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째서 친일파냐? 우리는 창씨개명도 안 했지 않느냐.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 들이 뭐가 잘났다고 감히 반남 박씨 집을 때려 부수느냐”고 그녀가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에서 한국전쟁 발발까지의 5년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수십 년째 유지되어온 체제가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만으로도 버거울 판에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좌우 갈등이 극에 달했다. 단일 정부를 세우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과 어떻게든 통일국가를 주장하던 좌익이 세를 다투고 있었다. 그녀와 그의 오빠는 좌익을 지지했다. 신념보다는 시대적 분위기 탓이 더 컸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1년을 바라볼 무렵이었다. 좌익을 탄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절을 신생 독립국가의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는 38선을 넘어 월북을 하거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오빠처럼 이상주의적인 얼치기 빨갱이에겐 보도연맹이라는 퇴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시 어느 날, 새로운 세계가 열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한 것. 처음엔 38선에서의 충돌은 자주 있는 일이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온 천지가 불바다가 됐다. 포탄이 서울 하늘을 가르고 포격이 잠시의 숨 돌릴 새도 주지 않고 도시를 짓이겼다. 국도가 초토화됐고 이미 무너진 한강 다리도 있었다. 그녀는 전쟁 중 생리가 멎어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포격 소리를 듣지 않으려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리는 귓가에 생생했다.
그 와중에 그녀의 가족을 빨갱이로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했다. 동네 사람의 고발에 의해 그녀의 집은 가택수색을 당했다. 숙부는 처형을 당했다. 그녀는 오빠가 의용군 나갔다고 호소하며 울고 빌었다. 그 후 그녀는 끊임없이 끌려다녀야 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 년이라고 불렀다.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해도 너무 하는구나. 서로 고사떡 나누고 비단 치마 무명 치마 안 가리고 서로 손주 새끼 오줌 똥 받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작전상 후퇴가 서울보다 훨씬 남쪽까지 이를 게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첫 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서울 인구가 반 이상 줄자 엄마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딸의 운명을 분리시키기로.
“너 먼저 가거라.”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듯 단호한 엄마의 눈빛에 그녀의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이었다. 그때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인민군이 안 돼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 부럽지 않았다.
“피난도 팔자가 있어야 가지, 아무나 가는 게 아닌가 보다. 그러니 피난 가는 척이라도 해보자꾸나. 저 동네에 아는 집이 있으니 거기 머물렀다가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어 사람들이 돌아올 무렵 우리도 피난 갔다 오는 것처럼 우리 동네로 돌아가자꾸나. 그 수밖에 없다.”
엄마는 용단을 내렸다. 그렇게 용감하게 그녀의 가족은 현저동 집으로 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평안한 밤을 보냈다. 오랜만에 자보는 단잠이었다.
“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 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됐을 때 생각만 하고, 당장 당면한 또 바뀐 세상엔 어떻게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대책 없는 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이 다양한 것만큼 그들의 기억도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의 맥락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에 소속해 있었느냐, 아니면 북조선에 속해 있었느냐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때의 기억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억이 일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개인의 기억의 총합이 반드시 집단적 또는 사회적 기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기억은 사회적인 기억 ‘안’에서 형성되면서 동시에 ‘바깥’에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기억입니다.정확하게 말해 개인적인 기억‘들’은 역사서술과 같이 일정한 관습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과 층위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집단 기억이라고 해서 반드시 획일적이거나 유일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한 개개인의 기억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집단 기억‘들’도 서로 경쟁합니다. 제주 4·3사건(1947년)이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광복 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희생자 1만 4032명)을 군정 경찰과 우익 서북청년단이 무참히 학살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구체적인 발단과 전개에 대한 자세한 기억들이 ‘제거된’ 채 국가적·사회적 기억은 단순히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자유에 대한 열망을 ‘빨갱이들의 반란 사건’으로, ‘양민 학살’을 ‘빨갱이 진압’으로 기록하기를 강요했습니다. 제주도민의 사회적 외상(트라우마), 즉 그들의 ‘몸의 기억’은 1999년에 들어와서야 새롭게 재평가됩니다. 그들의 몸의 기억들은 집단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적인 기억이며 ‘한민족’의 공적인 기억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데올로기의 기억은 그 사건을 망각하도록 강요했지만 몸의 기억들은 새로운 기억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몸의 기억은 조작된 의식적 기억 외부에 존재하는 흔적과 같은 것이었지만 훨씬 더 보편적인 기억이었던 셈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기억이란 과거 기억들의 경쟁에서 비롯됩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작가의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설이라는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 취사선택이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기억의 불확실성이었다.” 과거 일들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기억할 수도 없지만, 기억을 기록할 때는 기억들의 선별 과정이 불가피합니다. 기억이 불확실할 경우 상상력을 동원하여 개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기억의 성질입니다. 작가의 기억은 이념적인 대립 구도보다 사람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의 ‘인간적인 것’에 집중합니다.보통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소설들은 기억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주목하는 편이지만, 박완서는 그런 사회적인 기억의 공허함을 폭로합니다. 개성 근처의 고향 박적골과 제2의 고향인 서울 사이에서 오고 가는 과정의 이야기나, 시골 고향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1·4후퇴 때조차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남겨졌던 사연 등이 모두 이데올로기적 기억을 넘어서려는 현실적인 삶에 대한 기억의 생산적 재구성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처럼 명명백백하고도 오직 두 개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말고 따로 신봉할 게 있는 엄마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작가 박완서는 이분법적 대항 기억들과 결이 다른 종류의 기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기억법이 민중적 본연의 기억법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입니다. 땅에 붙어살던 민중의 벌레 같던 삶의 기억 그리고 그것을 또다시 넘어서려는 기록의 기억.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가 그의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말하듯이 아무리 증언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자가 없으면 그 기억은 집단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지 못합니다. 하지만 집단적인 기억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기억의 진실성이 무력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탈리아 정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이런 기억의 독특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로 죽은 자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만 떠올리지만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는 ‘무젤만’이라는 특이한 잉여적 존재도 등장합니다. 무젤만이라는 이슬람교도들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의 대다수를 차지한 유대교도들과 비교해 우리 기억에서 소수자들이자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아감벤은 맨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들의 증언이 온전한 증언이므로 생존자들은 그들의 대리인으로서 ‘유사-증인’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레비의 증언 기록들은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의 집단 기억의 대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 증언은 아우슈비츠 내에 수감되어 있었던 소수자 무젤만들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집단적 기억들의 경쟁이 기억의 새로운 분할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레비처럼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죽은 자들에 대한 정당한 증언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그들만이 무젤만과 같은 소수적 기억의 지위를 제대로 찾게 할 수 있는 기억을 가진 증인이라는 점에서 기억의 역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증언은 진지하게 경청해줄 타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집단적인 기억이란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재구성된 기억입니다. 타자의 목소리가 공적인 기억으로 재구성되어 현재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타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될 때 재구성된 기억은 사회적 의의를 갖습니다. 개인의 기억의 재구성은 어떤 면에서는 일정한 사회가 만든 지식의 체계와 인식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순수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개인의 기억은 때로 폭압적인 사회적 기억의 강요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의 철옹성에 균열을 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폭력적 사건들로 인해 개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외상(트라우마)의 기억은 사회적인 기억의 ‘외부’에 위치합니다. 달리 말해, 사회적인 기억이 강압적으로 개인의 기억을 내재화하고 획일성을 강요할 때, 몸의 외상은 사회가 준 것이기는 하지만 획일화되지 않고 의식화되지 않은 기억들로 남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외상을 지닌 몸의 기억은 억압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수적이지 않고 소수적인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수적 기억들은 획일화된 사회적인 기억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경쟁하는 형태로 사회 가운데서 지속됩니다. 박완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흔한 삶의 자리가 제거되었다는 현재에 대한 홀연한 각성이야말로 소수자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는 출발점입니다.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은, ‘문제 삼는’새로운 기억법이야말로 강렬한 개인‘들’과 사회‘들’의 재구성의 끊임없는 지속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글 김승권(문학), 김성민(철학)
그림 이경화
트라우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리키는 말로, 사고나 폭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충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이나 재난 등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충격을 모두 포함하는데 이것이 집단적일 때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한다.
무젤만
무젤만은 무슬림을 뜻하는 옛 독일어인데 유대인들이 다수였던 아우슈비츠에서 소수 종교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죽은 자 같은 살아 있는 자’,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은 자’, 즉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진 자들인 수용자 모두를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감벤은 이런 분할되지 않는 존재자들이 사회의 현실을 보다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참고 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1992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호모 메모리스: 기억과 망각에 관한 17가지 해석>, 이진우 외 지음, 책세상,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