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읽는 소설 #1
사람은 질문하며 살아간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라는 시시콜콜한 질문부터 “인간은 왜 사는가”와 같이 무거운 질문까지. 질문은 많지만 답을 찾기는 만만찮다. 아니, 사실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함께 고민할 친구가 없거나, 고민 끝에 질문을 던져도 “갑자기 왜 이리 진지하냐”며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는 게 우리네 현실.
다시 던져보자. ‘의미 없다’며 꾹 눌렀던 질문, ‘답 없다’며 묻어둔 물음을 다시 꺼내보자. 의미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삶에서 제대로 된 질문을 찾고 그것에 대한 일말의 의미라도 발견하는 것, 그게 문학과 철학의 중대 목표 아니겠는가.
작품 소개 : <화장> 김훈
“여자인 당신, 당신의 깊은 몸속의 나라. 그 나라의 새벽 무렵에 당신의 체액에 젖는 노을빛 살들, 그 살들이 빚어내는 풋것의 시간들을 저는 생각했고, 그 나라의 경계 안으로 제 생각의 끄트머리를 들이밀 수 없었습니다.”
김훈의 글은 단단하다. 동시에 무겁다. 서사와 서정을 넘나드는 독특한 문체. 따뜻함과 냉혹함이 조화된 문장. 체급으로 치면 ‘헤비급’이고, 투수라면 140km의 ‘돌직구’와 묘하게 휘는 ‘커브’를 동시에 구사한다. <화장>(2004)은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훈의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김훈은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의 의미를 절묘하게 오버랩시킨다. 동시에 욕망의 소멸과 소생, 사랑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한 작품인 <화장>은 누구도 쉽게 꺼낼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말한다. 이를테면 고통, 배설물, 방광염, 욕망, 사랑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생의 단면을 설명해주는 장치인 것이다. 병들어 누운 아내, 아내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과 추은주라는 여성에게서 흘러나오는 팔팔한 생. 이 둘은 ‘화장’이라는 동음이의어로 묶인다. 하지만 <화장>이 주목한 것이 비단 생명과 소멸의 강렬한 긴장 관계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 앞에서 허둥대는 인간, 욕망에 약동하고 욕망에 무력해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화장>을 통해 슬며시 엿볼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란 끝까지 당황하고, 방황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화장> 김훈 : 소설 이야기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눈빛이 흔들리고 마음이 요동치는 남자. 집에선 든든한 가장이고 회사에선 능력 있는 홍보팀 상무지만 같은 팀 여직원인 추은주 씨 앞에선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고 마는 50대 중년 남성. 오 상무에게 어떤 욕망이 일었던 것일까.
뇌종양에 걸린 아내가 있는 그는 착실하다. 아내의 병수발을 도맡아 하고 집과 회사만 주로 오간다. 화장품 회사 임원인 그는 항상 여성의 ‘미’와 ‘젊음’에 주목해야만 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때로는 과장함으로써 최대 이윤을 얻는 화장품 회사 홍보팀의 상무니 말이다. 이 중년의 남자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신입 사원인 추은주와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결재 서류를 기다리며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훔쳐본다.
“당신의 가슴의 융기가 시작되려는 그곳에서 당신의 빗장뼈는 당신의 가슴뼈에서 당신의 어깨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빗장뼈 위로 드러난 당신의 푸른 정맥은 희미했고, 그리고 선명했습니다. 내 자리 칸막이 너머로 당신의 빗장뼈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의 손으로 저의 빗장뼈를 더듬었지요. 그때,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의 깊은 오지까지도 저의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사무실에선 생각과 상상을 주로 활용했다. 여러 변수를 고려해 판단을 내리고 서류에 사인하고 추은주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퇴근 후엔 집에서 아내를 위해 몸을 써야 했다. 쇠약해진 아내의 몸을 씻기고 배변을 도왔다. 오랜 암 투병에 아내는 지쳐 있었다. 어느 날은 “미안해. 내가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렸고, 또 어떤 날은 “말해.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며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와인을 들이켜기도 했다. 그는 아내를 여전히 사랑했다. 추은주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 상무는 당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욕망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당히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욕실에서 아내의 배변을 돕고 손에 밴 악취를 비누로 씻어낸다. 그러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운다. 새벽 2시께, 그는 불현 듯 추은주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재산과 명예 등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이 일시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조바심’에 발을 구른다. 그리고 이 마음을 안다면 추은주가 자신을 안아줄 거라고 생각한다.
“운명하셨습니다.” 당직 수련의가 하늘색 시트를 끌어올려 아내의 얼굴을 덮는다. 예상했기에 마음의 동요가 크지는 않다. 딸은 슬퍼하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며 운다. 그런 딸의 마음을 뒤로한 채 그는 추은주를 생각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그녀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닥에 엎드릴 때 본 그녀의 몸을 생각한다.
“추은주는 블루진 바지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추은주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 머리 타래가 흘러내렸고 맨발의 뒤꿈치가 도드라졌다. 뒤꿈치의 각질과 엄지발가락 밑의 둥근 살도 보였다. 엎드린 추은주의 등과 엉덩이는 완연한 몸이었다. 세상 속으로 밀치고 나오는 듯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스스로 자족해 보였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다. 부인은 떠나고 추은주도 떠난다. 그는 추은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도, 딸아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며 통곡하지도 않는다. 그는 끝까지 홀로 욕망한다. 욕망에 몸을 던지고 그 원심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단지 정신적으로만 욕망을 표현한다. 욕망을 통제하고 그걸 정신과 생각에만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앞으로도 욕망을 표출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욕망은 우리의 예상보다 힘이 세다. 끊임없이 피어오를 테고 끝없이 자랄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 마음과 별개로 다른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욕망.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원천적으로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일까?
<철학에게 묻다> : 사랑과 욕망의 변증법
“나는 욕망한다, 나에게 금지된 그것을.” 많이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프로이트나 라캉처럼 주체를 논할 때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금지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금지된 것을 추구하는 게 욕망이라기보다는 금지된 것이 있기 때문에 욕망하게 된다는 말도 됩니다. 사회 규범이나 통제에 의해 우리의 감정과 정서가 제어당하는 측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욕망은 사회적 잔여물이고, 욕망을 제어하는 장치를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 밖의 사랑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 금기입니다. 결혼 제도라는 울타리 밖의 사랑은 모권 사회가 부권 사회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대표적 금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은 우리의 보편 정서와 암묵적 합의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이런 금기는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측면이 큽니다. 사유 재산 중심의 남성 권력적 사회로 재편되면서 일부일처제의 ‘경제적 고상함’은 사랑에 도덕성을 고양시켰습니다. 한 사람의 아내로, 한 사람의 남편으로 서로에 대한 충실한 사랑에 의해 ‘행복한’ 가정이 유지된다는 남성 중심적 사회 이념을 내재화한 것입니다. 한 아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버지의 고귀함에 감사하는 딸의 미래는 그런 좋은 남편감을 얻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에 결박됩니다.
사랑은 한 사람하고만 이루어져야 하고 동시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할까요? 연애하고 결혼할 때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 상대에게 집중하고 교감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걸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항상 욕망과 대결하고 공존합니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든 욕망은 그 사랑 주변을 맴도는 ‘얼룩’과 같이 사랑의 정체성을 교란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철학과 결합해 발전시킨 자크 라캉은 이런 얼룩과 같은 욕망을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끼는데, 이는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얻으면 더 이상 욕망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그걸 얻은 후에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끝없는 욕망은 결핍처럼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지연되고 지속됩니다. 죽음이 욕망하지 않는 단계인데, 이렇게 보면 욕망은 사랑보다도 욕구 충족에 대한 강도가 더 높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그 어떤 대상도 가리지 않고 결핍을 채워나가려고만 하지는 않습니다. 라캉은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회의 보편적 욕망이 개인에게 투영된다는 뜻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쿨하게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이 사랑의 전시 효과를 추동하도록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부러워할 만한 사랑을 하고 싶은 거죠.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욕망과 검열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서 우리는 오 상무의 검열된 욕망을 만납니다. 결혼 생활의 행복은 아내의 긴 암 투병 속에서 신기루가 된 지 오래고, 사랑의 당위는 그를 지치게만 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욕망의 대상인 추은주의 육체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욕망이 이전의 대상을 떠나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 상무는 그것을 언어화하거나 공식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적·내적 갈등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이 욕망이라는 것은 단순한 내적 갈등 정도가 아닙니다. 정신 차려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라캉은 대상이 실재라 믿고 다가서는 과정을 상상계라 했고,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을 상징계라 했습니다. 그리고 욕망이 여전히 남아 있어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재계입니다. 실재라고 믿은 대상을 대타자라 하고, 그것이 허구적 대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대타자를 상실하고 소타자를 만납니다. 이처럼 주체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고 끊임없이 허구적 대상을 불러옵니다. 물론 그 대상이 허구라 해서 그 욕망이 ‘진실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충족하지 못한 간극 때문에 틈새 또는 구멍이 존재하는데, 이는 실재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실재에서 욕망을 충족하거나 충족하지 못한 상태가 연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이런 간극은 욕망하는 대상을 보편화해서 대체하는 방식으로 좁혀집니다. 한 여자와 한 남자 이외에 사랑의 욕구를 갖는 것을 ‘외도’로 상스럽게 규정하고, ‘고귀한 사랑’의 명예를 자신에게 수여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합니다. 실재는 사적 욕망의 상상계와 사회적 요구의 상징계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아내의 바싹 마른 육체와 비릿한 똥 냄새는 추은주의 ‘완연한 몸’과 생생한 체취에 대한 대체 욕망으로 전이되지만, 결국 아내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고 추은주의 육체는 자신의 욕망과 관계없이 오 상무의 시선을 떠납니다. 사랑도 욕망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지고한 사랑은 한 대상에 대한 강도 높은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사회적 시선을 배려해 욕망을 요구로 곧바로 대체하지 않을 뿐입니다. 욕망의 다양한 강도를 도덕적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고정화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어떻게 가능할지 언어를 넘어 언어화하는 것. 이는 욕망을 현실 위에서 현실로 끌어오는 문학의 몫이기도 하고, 현실의 다양한 층위를 변주하는 철학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철학용어 설명)
상상계; 상징계; 실재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상상계는 의미를 만드는 순간을 뜻하는데 상징계 내부의 어긋남을 통해 완벽함에 대한 허상을 추구한다(히스테리와 강박증). 반면 상징계는 어긋남이 일어나는 세상을 말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상징계는 중심이 비어 있는 안정 없는 구조이며 이 중심을 실재라고 한다. 실재는 배제된 규칙으로 일련의 규칙을 만들어낸다. 욕망은 상징계와 실재의 긴장이다.
글 김승권(문학), 김성민(철학)
그림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