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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 Aug 14. 2018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었다

3년 만에 교회로 돌아가며

3년 만에 다시 교회로 돌아간다.      


3년 간 탕자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고 담배도 펴봤다. 무신론자가 쓴 책을 읽었고 성서를 오류와 모순이 가득한 책이라고 폄하했다. 성서의 기준으로 금기되던 것들을 웬만큼 경험하고 난 뒤, 나는 이런 삶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성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30년 이상 몸에 들인 습 때문에 어색한 것일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서서히 마음에서 크게 느껴지는 ‘허무’였다. 신이 있다는 확신이 희미해져 떠났지만 없다는 측 논리도 확실하지 않았다. 결국 불가지론자로 얼마간 생활했고 모르겠다면 나에겐 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성서에서 도덕적으로 금한 행동만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신 존재를 더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카톨릭, 성공회, 불교 등 다른 여러 종교 서적과 실제 종교 의식에 참여하며 신과 종교를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신이 없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도킨스나 러셀의 책을 읽었고 신의 존재 당위를 확보하기 위해 굴드나 파스칼을 찾아봤다.     

<이기적 유전자>같은 진화생물학의 서적에서는 무신론을 신랄하게 논했지만 결정적 생명 촉발사건이 설명되지 않았다. 창조론자의 논리는 빈틈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생각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믿고 반박해봐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신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신이라는 것 자체가 영적인, 초월적인 영역이니 말이다. 설명되거나 증명된다면 신은 도식화되고 무한하다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못할 존재가 될 것이다.      

 

이성 사회의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는 과학도 신 존재를 끝내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신이 없다는 것을 또한 증명할 수 없기에 신 존재가 변증될 가능성이 남는다.     

결국 믿음은 선택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의 종교 선택은, 자기 삶의 궁극적 목적을 어떤 관점으로 설명할 것인가, 에 따라 정해진다. 자신의 삶을 개신교의 하나님을 상정하고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른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나라의 회복, 그의 궁극적 통치에 따라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해석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구체성이 빈약하다는 특성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그렇게 두려움과 현생에 대한 기복신앙으로 자신의 세계관이 정립되고 정경(성서 등)에 의해 견고해지면 종교는 절대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을 가랑비 옷 젖듯 미묘한 단계로 진행된다.     


자, 조금 더 단순하게 보자. 개인에게 신을 믿고 안 믿고는 선택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나이나 지동설인지 천동설인지와 관계없이 생명은 자신의 고유한 생명 조건에 따라 한계성 안에서 제한적 선택을 내린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우주적 진리가 아니라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그렇다. 과학이 증명하든 안하든, 진리가 존재하든 안하든, 내세가 존재하든 안하든 이것은 같다. 100년 남짓한 인간의 생에서의 종교는 인간 고유가 처한 상황에 맞게 스스로 선택한다, 아니 선택된다.     




그런 것처럼 내가 개신교를 택한 이유도 단순하다. '나'라는 생명이 겪은 경험, 문화, 방향에 있어서 개신교가 맞고 이런 해석이 내 삶을 더욱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봐도 하나님(신)이라는 존재를 빼놓고는 우주도 진화도 결정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한 우주적 해석과 내 삶의 구체적 해석을 혼합적으로 해봐도 개신교가 가장 잘 설명된다.     


나의 경우는 경제적 효율성 측면도 있다. 보수기독교인이신 어머니와의 관계 유지적 측면, 30년간 나에게 축적된 개신교 문화권에서의 도덕적 기준과 습관, 그리고 3년간 신을 떠난 후 겪은 어색하고 어색한 경험들. 이런 것들로 나는 개신교를 믿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고 변할 수 있지만 현재는) 영적인, 그러니까 심리적 부분에서도 심약한 나에게는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     




신을 믿는다는 것은 늘 희망할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삶의 어떤 시련이나 실패가 있어도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내세의 삶이 아니더라도 이 시련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어떻게 내 삶이 갈 것이다, 라는 희망적 믿음이 있으면 심리적으로 도움이 된다.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상정이 없다면 악조건 속에 희망을 상정하기 쉽지 않다.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 당장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자책과 무력함이 자신을 지배할 것이다. 반면 '고난 중에서도 나의 길을 희망적으로 이끄시는 절대적 하나님' 을 상정하면 경제적이고 효율적 측면에서도 많은 플러스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는 나약한 존재다. 강인한 부분보다 약한 지점이 훨씬 많다. 나는 어렵게 다짐하고 기준을 세우지만 쉽게 그것들을 무너뜨린다. 세상이 정한 어떤 흐름과 원심력, 그리고 상황에 쉽게 지배당한다. 기쁨은 짧고 슬픔과 고독은 길다. 아픔은 잦고 생기를 지속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 존재다 나는.    

 

단단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발버둥 쳤지만 다시 돌아갈 곳은 하나님의 품이었다. 효율적이고 계산적으로 회심을 택한 것 같지만 이런 과정에 나는 많은 영적인 힘의 작용들이 있다고 믿는다. 귀신이 있듯이 영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 막연함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이런 과정이 더 단단해지고 굳건한 신앙을 가지는 과정일 수 있다. 3년 간의 수많은 탈주, 새로운 시도, 그리고 허무와 회심. 이런 모든 과정은 내가 선택했지만 궁극에는 하나님(신)의 인도가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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