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 Sep 27. 2019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 – 김연수

매일 글을 쓴다. 어느날 작가가 된다.

글쓰기에 관한 한, 나는 좀 비뚤어진 사람이랄 수 있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라는 장편소설이 작가세계 문학상에 당선되면서, 흔히 쓰는 말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혜성과도 같이, 그러니까 눈 깜빡할 사이에 나타났다가는 그만큼 빠른 속도로 기억에서 지워질 운명이라는 것도 모르고 소설가가 됐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네 살. 

그 한 해 전부터 나는 시인이었다. 한 해에 한 장르씩 등단했으니 말하자면 초고속 승진하는 재벌 3세쯤이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같은 시상식 자리에서 시 신인상과 소설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처지가 됐다. 



차례로 상을 받은 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쯤에 해당할 만한 표정으로 단상에 서서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보니까 내가 책에서만 읽던 문인들이 시상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문인이라는 사실은 '저 놈이 무슨 말을 하는가?'하고 노려보던 그 냉소적인 표정으로 잘 알겠는데, 내가 도대체 왜 거기에 서 있어야만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 상은 제가 받는 게 아니라 여기 앞에 계신 선배들이 받아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뒤에 그 흉악한 선배들이 두고 두고, 그렇다면 상금을 내놓으라고 말한 걸 여기에 꼭 밝혀야겠다. 


(......)




설사 우리의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십대 내내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만을 반복적으로 끼쳤다고 해도 우리는 그 영향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부정적인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우리가 결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됨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맞서면서 점점 성장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려 살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제대로 사랑한다면 그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건 자신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칭찬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경험이다. 사랑은 우리를 원래의 아이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람선 같은 것이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원래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다. 제대로 사랑했다면 유년시절의 부정적인 영향은 거의 대부분 치유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유년을 보낸 사람들도 사랑에 빠진 뒤에는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있다. 체벌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적은 영향을 끼친다. 가까운 어른들의 부정적인 말들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어쨌거나 나중에는 극복이 가능하다. 문제는 완전한 나의 무의식 속에 있다. 




다시 198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자면, 백일장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뒤로 나는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재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상을 못 받았다는 부정적 정보고 한 번 내게 들어왔다면, 자잘한 성취(예컨대 다섯 번 정도 글을 써서 칭찬을 받는다던가)를 통해 나는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백일장에서 상을 못 받았다는 게 재능이 없다는 걸 뜻하는 건 전혀 아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제출한 원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심사에 지친 심사위원이 반 정도 분량만 읽고는 수상자를 뽑은 것일 수도 있다. 그건 다섯 번의 긍정적인 반응을 받으면 벗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소질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나는 십대 시절 내내 글을 쓸 기회가 생기면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백일장에 나가서 상 한 번 타본 적이 없었고, 내게 글 쓰는 소질이 없고 ,써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하고..." 그건 이렇게 상상하면 된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체벌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게 남의 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십대 시절 내내 글쓰기에 관한한 스스로 학대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섯 배의 법칙에 따라 그 시절 내가 자신에게 한 그런 부정적인 말들의 영향을 없애려면 얼마나 많은 칭찬을 들어야만 할까?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최고의 작품만을 써서 모든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다고 해도 나는 계속 목이 마를 것만 같다. (독자들은 오직 칭찬만 하라!) 이 모든 게 단 한번 백일장에 나가서 빈손으로 돌아온 것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면 백일장 심사 같은 걸 보는 건 애당초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몇 번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난 뒤에 나는 자신에게 생긴 부정적인 일들을 '재능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십대 시절의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소설창작 시간에 관례대로 합평이란 걸 한 적이 있었다. 칭찬을 오천 번 정도는 받아도 원래의 밝고 창의적인 아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이십대 초반의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서는 서로 다른 학생이 쓴 소설이 얼마나 후진지에 대해서 앞다퉈 얘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말들을 듣는 학생들마저도 자신이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학생들은 아마도 글 쓰는 게 너무나 좋아서 문예창작과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년 동안 그들이 듣는 이야기는 글을 얼마나 못 쓰는지에 대한 비판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고 원래 입학할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다섯 배의 긍정적인 영향이 필요하다. 친구나 교수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이 쓰는 글이 너무나 좋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 결과, 졸업할 무렵이 되면 그들이 쓰는 글을 정말 형편없어진다. 이런 흐름에 대한 그들 나름의 변명이 바로 내겐 재능이 없다는 말이다. 




일단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면 더 이상 글을 쓰는 일이 지속되기 어렵다. 더구나 그게 소설이나 시라면 더욱 어렵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작가나 시인도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듯이 글을 쓰지 않는다. 소설 쓰는 일을 그만 둘까 하고 혼자 고민하던 이십대 후반에 내게 크게 위안이 됐던 건 "소설 쓴 지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힘들다"던 박완서 선생의 말씀이었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힘들다 하더라도 결국 쓰는 사람이 있고 못 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쓰지 못한다. 

쓰느냐, 쓰지 못하느냐. 그 비밀은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에서 만난 학생 중에는 화면의 커서를 볼 때마다 재능이 고갈되어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건 이런 상황이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누군가가 이제 막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넌 재능이 완전히 고갈됐기 때문에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을 거야"


그런 말을 듣고 단 한 글자라도 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이 정말 나와 가까운 사람이고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할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를 저주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면 그 학생에게는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아무리 넘쳐나는 재능이라도 그런 말 앞에서는 고갈될 수밖에 없다. 글을 쓸 대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몇 번 정도는 괴롭더라도 글을 쓰긴느 하겠지만 결국에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 그러니까 자긱 자신에게서 듣는 저주의 말들은 실제로 실현된다. 그리하여 이제 글을 쓰지 않게 되면 거기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신에 그의 삶은 좀 비참해진다.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누가 대신해서 사랑해줄까? 그러니까 "넌 정말 괜찮은 애야!"라고 위로해도 "그렇지 않아!" 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이십대 후반, 나는 원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이젠 소설 같은 건 그만 쓰겠다고 떠들고 다니던 내 모습이기도 하겠다. 


 (.....)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면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칭찬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들게 된다. 


여전히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책상에 앉으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어떤 글을 쓸것인지 기대된다. 잘 쓸 수도 있고 못 쓸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글을 쓸 수는 있다. 잘 썼다면 다들 잘 썼다고 말할 것이고, 못 썼다면 편집장이 ㅃ라간 펜으로 여기저기 지적해서 돌려 줄 것이다. 그때는 다시 쓰면 된다. 다시 쓰면 좀 더 좋아진다.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잘하는 세계로 들어오면 도능 일들이 이처럼 명료해진다. 


하지만 명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을 쓰려고 할 때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뭔가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스스로 내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그 말들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삶은 구원에 가까울 정도로 달라진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믿어버리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은연중에 퍼붓는다면. 




나는 소설로도 그런 일들이 가능한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해서 2002년 '월드컵 전 경기를 관람하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대고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됐다. 경제적 어려움? 많았다. 나는 이것저것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산문을 쓰고 번역을 했다. 아무리 일해도 회사에 다닐 때에 비하면 수입은 너무나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매일 소설을 쓰고 싶었다. 매일 소설을 써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의 소설가가 될 수 있는지 따져보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소설이야 대단할지 안 대단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인생만은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때부터 매일 소설만을 썼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매일 뭔가 쓰기는 썼다. 물론 어떻게 쓰면 좋을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끝나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날에도 나는 고민에 대해서 썼다.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 어떤 기자와 기나긴 인터뷰를 끝내고 난 뒤에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가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블록(고갈상태)을 느낀 적 없나요?"

생각해보니 글을 형편없이 쓴 적은 있었지만 그런 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날마다 글을 쓰기로 결심한 뒤로는 형편없는 글이라도 나는 썼다. 하지만 그 형편없는 글을 발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출판이 임박하면 죽자고 그 글을 고쳐야만 했지만, 형편없는 글을 쓰는 건 특정한 시기 나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지 그 기자가 말하는 블록은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블록인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재능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듯이. 




그렇게 해서 지난 팔 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썼다. 그 결과, 몇 권의 책이 출판됐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그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지난 팔 년 사이에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돼갔다는 점이다.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아주 서서, 하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도 분명하게. 소설가로서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됐다. 그건 전적으로 매일의 글쓰기 덕분이라 생각한다. 

날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자신을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장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을 매일 연습한 셈이니까. 그 연습의 결과, 나에 대해, 나의 꿈에 대해, 나의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던 습관이 사라졌다. 그러자 모든 게 달라졌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말하고, 그건 생각으로 들리고, 눈으로 읽힌다. 날마다 우리가 쓰는 글은 곧 우리가 듣는 말이며 우리가 읽는 책이며 우리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쓰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잔인한 고통의 말들을 쓰고 듣고  읽고 생각하겠다고 결정하지 말기를. 

그런 건 지금까지 우리가 들었던 부주의한 비판들과 스스로 가능성을 봉쇄한 근거 없는 두려움만으루 충분하니까. 뭔가 선택해야만 한다면, 미래를 선택하기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본 뒤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말들을 쓰고, 듣고, 읽고, 생각할 수 있기를. 그러므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넌 소질이 없어"라는 말을 듣기 전에 우리는 모두 아이들이었다. 늘 밝게 웃으며 호기심에 가득 차 재미있는 일만을 찾아다니며 다른 이들의 평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두려움 없이 원하는 바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이다. 소질이 없다는 말을 듣기 전에 우리는 소질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매일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재능이란 지치지 않고 날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게 아닐까? 평생 그런 재능을 발휘하고 산다면, 우리는 그를 천재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우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매거진의 이전글 꽃 같은 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