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그리고 불완전한 믿음
- 최진영의 소설 「일요일」을 읽고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을 다룰 때, 사람들은 원인에 주목하는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고요.
"먹고 사는 일이 원래 그렇다."
"사람이 일하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길 수 있다."
최진영의 소설 「일요일」에서도 이러한 말을 듣고 버티며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동시에 온전한 시간을 소유하지 못한- 인물이 작품 주체로서 등장합니다. 온전한 시간의 박탈, 그것이 비단 작중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성실히 일하는 모두가 노동력과 시간을 대가로 돈을 받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결국 절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시간을 돈이라는 보통 재화와 치환하여 생활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결코 잘못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죠. 다만,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가치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원래 그렇다, 라는 말에는 대략적인 이유조차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습처럼 누적되고 이어진 본디 그래야 하는 것, 즉 '당연함'이라고 일컬어지는 오해일 뿐입니다. 「일요일」의 소설 주체는 이러한 관습에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고는 곧 "먹고 사는 일이 원래 그럴 수는 없어."라며 반발하는데, 이 순간 우리 사회의 "우리"는 '그들'과 주체인 '나'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주체인 '나'는 문제를 인지하고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고, 그 이유는 "우리 사회"라는 하나의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서사가 있기 때문이죠.
자본주의와 그에 얽힌 지배서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것을 다루려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이론을-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연구를 위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상부구조를 정의하면서, 결과적으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왜곡시킨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부구조에는 각종 자원이나 인간의 노동력 등이 해당한다고 몰 수 있죠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생산과 소비가 요구되었으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자원은 소모되었고 당대 인간의 노동력은 착취되어 왔죠. 그렇기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 즉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인식은 기초 자원과 인간의 기본적 노동을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으로는 상부구조가 단순한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인간의 기초 노동력에 낮은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자원과 기초 노동력 없이 사회가 풍족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핵심요소 중 하나는, 생산된 대상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력과 자원의 가치 총합보다 커야 한다는 점-곧 생산시장에서 투입되는 노동, 자원, 지대의 가치는 생산물보다 낮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모두 절대 기표인 '화폐'를 통해 평가됩니다.
화폐는 분명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일반적 합의 아래 공통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신용 증명수단인 것이죠. 그러나 그것에 부여된 가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국, 화폐라는 것은 실제 그것이 지닌 가치보다 높은 가치를 액면으로써 나타내게 됩니다. 화폐 또는 그것이 통용되는 집단의 신용이 붕괴한다면, 그 가치는 턱없이 하락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바이마르 공화국 등의 사례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가까이에서는 환율변동을 볼 수 있죠. 이처럼 때로는 경제 정책의 실패를 통해 화폐 중심의 사회는 국지적 혹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붕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본주의나 물신주의에 관한 신뢰 없는 맹목이나 당연하다는 인식을 재고해볼 것입니다. 물론 이 게시글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자고 쓰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맹목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해보자는 취지로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재 유지중인 체제나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면 사회를 견뎌내는 일 자체가 버거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저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재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대상을 향한 믿음은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맹목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법을 새롭게 고안해야 하고, 본 게시물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찾아 그 방법을 제시하려 합니다.
먼저, 어휘가 가지는 의미는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고, 그 차이를 바탕으로 '믿음'과 '의심'은 서로 대립하는 모양을 취할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일대일 의미 대응되는 것이 아닌 어휘, 그러니까 양가 불가능한 어휘가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의심이 없다면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은 의심에 의한 판별 결과 중 하나인 셈이죠. 다시 떠올려보면 믿음은 의심의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믿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한다고, 그러니 제가 제시하려는 '믿음'의 방향은 '믿어 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제 본 텍스트는 사회구조를 나타내기 위해 태엽장치라는 메타포를 사용할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의 구성원은 태엽을 돌리기 위한 톱니이고 어느 의미로는 여분에 불과합니다. 개인의 고유성은 분명히 있지만, 사회가 그것을 각 개체단위로 세세히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러한 개인은 좀체 인정받기 어렵죠. 사회를 이루는 각 톱니는 분류에 따라 같은 부품으로 분류됩니다. 모든 부품에는 저마다 공차가 있지만, 그것이 있을 자리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면 조금 다듬어 작동시키면 그만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 사회의 태엽장치는 어떤 구조로 형성될까요.
먼저, 현대 자본주의 집단은 합리성이라는 목표 아래, 인적자원이라는 개념을 용인하는 사회에 기반합니다. 그렇기에 그 구조는 단언컨대 치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부품이 유격 없이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몇 개의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가공이나 분해 따위의 절차는 복잡해지겠죠.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넓은 구조적 범위를 허용하고, 개인의 고유성은 우선순위에 의해 배제됩니다. 또 부분적으로 쉽게 붕괴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무너진 집단이 있어도 헐거운 연결 탓에 사회가 지나친 타격을 입지 않고 기능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 불안정한 구조를 취하더라도, 총체적 사회의 시선에서는 그야말로 쉬운 정비와 유동적 대처가 가능한, 다시 말해 인적자원을 소모하기에 최적의 구조인 셈이죠.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분해와 조립이 온전히 대응되지 않으며, 그 장치는 인적자원의 소모를 통해 거듭 태엽을 감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 유지를 위한 사회체제인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