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히다

by 문예반장

부엌 창문을 연다. 뒤뜰로 연결된 사각 틀이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다. 지금은 녹색의 나라다. 때론 흰색이며 칙칙한 갈색으로 물들기도 한다. 울긋불긋 불타는 오후가 춤을 추며, 비바람 속에 저녁나절이 휘청대는가 하면 긴 밤 내 핏대를 바짝 세운 서릿발 위로 새벽녘 차가운 어스름이 서성거릴 때도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여러 그림 중에서 차츰 여름으로 접어드는 이 무렵의 녹음(綠陰)을 나는 단연 으뜸으로 친다.


중학교 때와는 달랐다. 확실히 바뀌었다는 점을 실감케 해주는 과목 중 하나가 윤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리고 니체, 루소, 마르크스 등을 망라한, 철학과 이념, 예술, 역사 등 고상한(?) 용어와 위인들이 책 속에서 튀어나왔다. 고등학생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몇 개월 전의 나였던 중학생들을 애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한 마디로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의 합리론이 시험 단골 출제라는 선생님 말씀에 줄을 긋고 별표도 몇 개 붙였다. 생각할수록 깊이 있어 보이고 의미 있는 말 같았다. 철학이 그런 거려니 생각했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지엄한 명제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고 무조건 옳았다. 중세 암흑기 이후 서양 철학의 출발점으로 떠오른 대가의 얘기를 누가 감히.

그 후로 4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내 인생도, 생각과 존재 중 뭐가 중하다거나 먼저인지 따질 만큼 철학적이거나 특별하지 않았으나 데카르트는 여전히 위대했다. ‘합리론’이라는 용어의 이미지 효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낮 기온이 38도를 웃돌던 지난해 봄, 고등학교 후배께서 보낸 문자 한 통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루하게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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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시대 대중들에게 인지도 대단한 스님의 글 한 편, 그 분량은 짧았으나 속에 담긴 파괴력이 컸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던 철학자의 명구를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고 바꾸어 설명한다. 존재의 가치를 논하면서 ‘왜’가 아닌 ‘어떻게’가 더 중요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왜 사는 거지’가 아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라는 내용이 스님 말씀의 핵심이었다.

맞는 얘긴데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이 몰려왔다. 교과서에 나와 있어, 시험에 출제된다니까, 전 세계가 인정하는 철학자의 말씀 등등의 이유로 40년 세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데카르트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학설이 틀렸다는 주장은 아니다. 합리론의 요체는 사유의 방법에 관한 얘기다. 어구를 두고 따질 일도 아니다. 그게 뭐든 타당성과 문제점을 짚어보는 과정 없이 지내온 나의 적당주의가 답답했다는 것이다.


뒤돌아본다. 어리숙하고 세심하지 못했던 사건은 그뿐만이 아니다. 딕과 제인(Dick and Jane)은 초등학교 교과서의 철수와 영희쯤 되는 흔한 이름이자 오랜 팝송 제목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진학 전 겨울방학,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의 달콤한 영어 발음을 익혀보겠다며 기타 연습 삼아 왼 손가락 마디에 피멍이 맺히도록 불렀다. Dick이라는 어리바리 남자애가 동네 예쁜 여학생 Jane을 좋아했다는 뜻 정도로 가사도 대충 이해했다.

얼마 전 선배 한 분이 이 곡을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볼륨을 높여 듣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주인공은 중학 시절부터 제인을 사랑했으나 그녀는 딕이라는 남자와 결혼했고 세월이 흘러 그녀의 부고를 접한 주인공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녀를 회상한다는, 어떻게 보면 지질한 남자의 흔해 빠진 순애보였다. 문제는 내가 40년 훨씬 지난 지금까지 노랫말의 주인공이 예쁜 소녀 Jane을 사랑한 얼간이 Dick이라고 착각했다는 점이다.

단어를 모른다거나 문장을 해석하지 못해 잘못 안 것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특별한 동기가 없이는 바꾸기 주저하는 평소의 습관이 범인이었다. 핸드폰을 뒤져 후배가 보내준 스님 얘기를 다시 읽어본다. 사람이 있어 생각하는 거지, 나 없는 곳에서 내 생각이 존재할 수 없다는 내용 자체야 옳은 말 같다. 생각이 착각을 불러오니까 생각을 멈춰야만 실상을 볼 수 있다는 동양철학과 서양 사고방식의 근본 취지나 다시 숙고해봐야겠다.


식탁 위 등을 끈다. 봄날 예쁜 꽃을 피웠고 가을엔 빛바랜 이파리를 하염없이 떨군 적도 있었다. 한때는 눈 내리는 겨울이었던 바깥 뒤뜰이 지금은 푸르른 여름이다. 어린 사마귀 한 마리가 창문 밖 방충망에 달라붙어 방향을 돌려가며 집안을 기웃거린다. 저것이 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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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불안하다. 창틀을 통해 보는 뒤뜰의 모습이 내가 아는 세상 전부는 분명히 아닌 줄 알면서 난 내 눈에 잡히는 것만 보면서 지내온 건 아닌가 싶어서. 하나하나 짚어볼 요량도 없이 데카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노랫말의 Dick과 Jane이 결혼 커플이라고 확신했다. 창에 나타나는 바깥 풍경만으로 계절을 넘겨짚듯 그 너머 넓디넓은 세상을 멋대로 해석하며 살아온 것이다. 내 눈에 비친 세상 모습이 실제와는 얼마나 다를지를 이제부터는 조심조심 따져봐야 하나. 때아닌 고민을 쓸데없이 사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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