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宗婦)와 종손(宗孫)

by 문예반장

첫째와 둘째가 홀로 계신 엄마를 만나러 간다. 지난 며칠간 엄마는 밤낮없이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성화를 부리셨다. 보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시는 줄 안다. 한 번 찾아가서 달래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내려간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미리 알리지 않는다. 깜짝 방문으로 엄마를 즐겁게 해드리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출발 전부터 엄마가 전화를 줄기차게 걸어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반복하시기 때문이다.

대문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하나도 반갑지 않은 척 시큰둥한 말로 엄마는 머리에 담아둔 환영사의 포문을 연다. 기름 값 비싼데 뭐 하러 왔어? 아픈 데 없고? 그래, 몸만 건강하면 된다. 밥 먹어야지? 바로 쌀 안칠게. 딸들 앞에서는 입에 올리지도 않을 말을, 사내애들만 왔다고 부산을 떠신다. 엄마의 아들 딸 차별은 그 역사가 길다. 당신은 아니라지만 아들인 내가 봐도 심하다. 그럴지언정 수십 년 간 아들과 딸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도 변함없으니 지조 하나는 대단한 우리 엄마라고 자식들은 끌끌거린다.

고기 먹지 못해 서러운 세상도 아니련만, 자존심이 일상이던 그 시절의 엄마는, 우리가 밥 한 끼를 대접해도 고기, 그것도 소고기라야 식사 했다 하시고, 비린내 풍기는 생선, 몸에 좋다는 청국장이나 야채 등은 괭이 개 보듯 하신다. 밥을 짓겠다는 엄마 말은 시골 오일장 서듯 그저 반복되는 치레일 뿐, 소고기를 드셔야 우리나 엄마나 편하다. 집에서 찌개 끓여 저녁 먹고 돈 아끼자는 엄마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외출복을 입혀드린 후 대문을 나선다.

임영대군은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8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번째 왕 문종, 그의 아래 동생 수양대군 세조, 그리고 세조에 의해 거세당한 안평대군까지 세 분을 형님으로 모신 탓에 왕의 자리와는 조금 먼 위치에 계셨다. 600년 넘는 왕가의 혈통이 어느 시점부터 방계로 흘러가면서 자연히 우리 집 가계도는 정통적 종손 위치에서 궤를 벗어났다. 족보상 임영대군의 18대 손(孫)이신 아버지는 20여 년 전 세상을 떠나셨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노인성 치매를 앓고 계신 평범한 할머니다.

켜켜이 흘러간 세월 따라, 이젠 훌륭할 것, 자랑할 것이 더는 없는데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존중받지 못한다는 분노의 감정을 눌러 담은 채 살아오셨다. 엄마에게 남은 한 가닥 자존심이라고는 왕가의 종부(宗婦)라는 해묵은 사실이었으나, 권위란 본인의 주장이 아닌 타인의 보편적 인정(認定)에 의해 만들어져야 제대로인 법, 엄마의 아픔은 그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본래부터 괄괄하신 엄마의 성정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우리는 엄마의 불같은 한 마디에 가슴이 타고, 투정 보따리에 혈압이 오른다. 받아주지 않는 자식들이 불만인 엄마의 반격은 후비듯 날카롭다. 당신이 낳은 자식들보다, 꼬박꼬박 찾아와 설거지와 청소는 물론 다리도 주물러 주고 집안의 허드렛일까지 처리해주는 도미(도우미, 어머니는 도미라 발음한다)가 백번 낫다는 한 마디로 우리 마음을 쓰리게 한다. 아래 마을 사는 친구의 딸은 집에 올 때마다 용돈을 100만 원씩 주고 간다며 며느리며 사위까지 달달 볶는다. 웃어넘길 일을 가지고 또 속을 끓이는 우리, 생각해보면 섭섭함과 외로움으로 도배된 허전함을 엄마는 그렇게라도 추스르고 싶을 게다. 얼굴 잠깐 내밀고는 지들 자리로 훌훌 돌아갈 철새 같은 새끼들 앞에서...

시골 읍내 한우 타운, 가끔 들르는 정육점 식당에 엄마와 장손이 나란히 옆으로, 둘째는 건너편에 마주앉아 있다. 종업원에게 가위를 요청한 큰 애가 갈빗살을 도려내기 시작한다. 엄마는 갈비탕 속 통 갈비를 큰 아들의 접시 위로 던지다시피 올려놓는다. 큰 애가 알아챌 때까지 엄마는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 입맛이 없다. 너나 많이 먹어! 힐끔 엄마를 쳐다보며 장손은 잘게 발라낸 고기를 엄마의 그릇으로 넘겨준다. 질겨, 오물오물 꼭꼭 씹어 드세요. 갈비는 장손 밥그릇으로, 발라낸 갈빗살은 엄마 앞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가볍게 실랑이가 벌어진다. 둘째인 내 입장에서는 조곤조곤 갈비를 발라주고 엄마 비위도 잘 맞추는 맏형이 있어 참 다행이다.

맏며느리 위상이 말도 아닌 시대를 살아온 엄마와 그녀의 설움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는 장남이 서로를 살살 달랜다. 자식들 짓거리가 미덥지 않은 엄마, 어쨌든 면목 없는 종손이 각자의 방식대로 서운함과 안타까움을 삭이는 방식이다. 아흔 줄 종부는 아이들한테 해줄 것이 더 이상 없어서, 칠십 가까운 종손은 이것저것 모든 것이 그냥 미안해서, 모르는 척 계면쩍은 속내를 티격태격 주고받는다. 가쁜 시간이 갈비탕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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