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밭에 주홍 꽃이
전날 밤늦게 내 전화를 받은 하동 할머니는 내가 일 년 만의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전할 틈도 주지 않고 당신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우째 지냈능교? 은제 올라꼬? 오널?... 단디 하시오. 야들, 참말로 실하데이.”
내가 누군지 정말 알고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집에서 하동까지는 250여 킬로미터 거리 세 시간 반 남짓, 아담한 장터 앞에 차를 세운다. 뒷골부터 장딴지까지 온몸이 노곤하다. 차에서 내려 두 팔을 어깨 위로 쭉 펴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어찔하게 황홀하다. 올망졸망 늘어선 노점상 곳곳에서 쏟아지는 주황의 물결... 그 뒤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할머니의 얼굴이 붉게 익었다.
10여 년 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이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벚나무 단풍이 화려한 늦가을, 놀며 쉬며 달리며 가다가다 닿은 곳이 지리산 남쪽 섬진강 하구였다. 내려오는 동안 수시로 보이던 도로변 농가의 자잘한 감과 얼기설기 걸렸던 곶감은 그곳에서 눈에 띄게 줄었다. 내 주먹보다 큰 대봉감이 도회지의 도매가보다 쌌다. 눈치 빠른 할머니가 생각을 바꿔 값을 올려 부를까 조바심이 나서 후딱 세 상자를 차에 실었다.
할머니가 알려준 감 익히는 법만 대충 듣고는 부리나케 장터를 떴다. 하루나 이틀 기계로 숙성시켜라. 냉장고에서 익히는 것이 편리하지만 장독에 지푸라기를 넣어 익히느니만 못하다. 그것도 아니면 바람 잘 통하는 장소에 띄엄띄엄 늘어놓고 천천히 익혀라 등등. 기계도 장독도 나와는 거리가 먼 현재 상황이라서 택했던 마지막 방법이 행운이었다. 인공적 요소가 가미된 숙성으로 얻기 힘들 할아버지 시절의 느긋함과 50여 년 전 냉장고나 건조기 따위 없던 때의 진득한 맛을 고스란히 다시 맛보게 되었으니.
그날 이후 십 년 넘도록 무서리 내리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동트기 전 새벽부터 바빠졌다. 잠깐의 번거로움을 견뎌 맛보게 되는 혀와 뇌의 즐거움은 공장의 정제 가공식품과 자연 숙성된 식자재와의 차이를 알면서 생겨난 일종의 중독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천년만년 오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광적으로 자연식을 선호하는 깔끔이와도 거리가 멀다. 옛날식으로 연시 만드는 법을 알려준 그 할머니 탓인지 혹은 덕이라 할지.
매년 내려오는 내 속을 빤히 꿰차고 있는 그녀와의 가격 협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 오래다. 그러나 오늘은! 숨 한 번 길게 내쉬고 흥정을 시작한다. 어쨌든 팔아야 하는 할머니와 많이 살 테니 값을 깎아야겠다는 과똑똑이 간의 줄다리기는 역시나 싱겁게 끝난다. 수십 년 사람 대하는 일에 이력이 붙은 할머니를 이길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꼭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은 내지 않겠다고 맘먹은 금액보다 대충 20% 정도 높은 가격으로 값이 결정된다. 그래도 시장 가격의 반이 안 된다. 게다가 할머니는 먼 곳까지 내려온 손님 관리용 보너스를 그쯤에서 풀어놓는다.
밤, 석류, 모과 등 과일류, 나물을 포함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하나하나 서비스라고 강조하면서. 때깔 좋게 잘 익은 연시까지 열댓 개를 꺼내놓고는 그중 하나를 집어주며 먹어보라고 눈짓한다. 부드럽다. 달다. 가격 협상의 대상으로 할머니를 대하던 나의 결기는 그쯤에서 대책 없이 무너진다. 무덤덤한 표정과 툭툭 던지는 할머니의 말 몇 마디에 그간의 오기는 까마득히 잊고서 히죽거린다.
선선한 끝방에 큼직한 대봉감을 띄엄띄엄 늘어놓는다. 어떤 감은 하루 만에 말랑거리고 느려터진 놈은 2월이 되어도 마냥 떫다. 검은 반점이 늘어나면서 주황에서 주홍으로 색깔도 진해간다. 살짝 누르면 젖살 오른 아기 볼처럼 말랑말랑하다. 수시로 위치를 옮겨주고 방향도 바꿔준다. 탱탱했던 껍질이 오래전 외할머니 얼굴처럼 자글거리면서 딱딱한 속살은 어느 틈에 수수깡처럼 단맛을 재워간다.
아침 식탁엔 샌드위치, 견과류, 달걀, 채소와 과일 등 네댓 가지를 올린다. 계절 따라 기본 메뉴가 바뀌어도 사철 변함없이 챙겨 먹는 음식이 영양가 많지만 시큼해서 별로인 요구르트, 그보다는 가끔 추가되는 부재료들이 오히려 입맛을 돋운다. 대봉감이 등장하면서 주방의 새벽 공기가 달라진다. 네댓 평 남짓 공간이 부쩍 분주해진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좀 더 진지해진다고나 할까.
알맞게 익은 연시를 골라 껍질을 벗겨낸다. 반투명 얇은 막과 알맹이를 분리하는 작업은 보기보다 까다롭다. 껍데기를 발라낼 때 분리된 과육이 손가락과 식탁에 엉겨 붙는다. 색깔이 곱다. 맛보기 전에 눈이 먼저 호사한다. 별 것 아닐지 모르나 세상에 하나뿐인, 꼭두새벽부터 호들갑 떨며 준비한 나만의 미식을 즐길 일만 남았다. 뽀얀 요구르트는 평소 아끼는 유리잔에 미리 담아뒀다. 발라낸 감 속살을 그 위에 올린다. 흰 눈밭에 주홍 꽃이 내려앉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