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INFP 기관사의 개인사정

철 지난 지하철 기관사의 강제 에세이 3

by 십일월

글쓴이/ 56년생. 역무원과 지하철 기관사로 35년 근속 후 정년퇴직했다. 딸(11월)이 시켜서 쓰게 된 강제 에세이. 근무 시에 적었던 일기와 기억을 바탕으로 지하철 기관사로 생계를 꾸려나갈 때 느꼈던 희로애락을 적게 되었다. 현재는 탁구 치는 재미로 사는 중.





남도의 명문이라고 하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집안 형편상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고, 육군 3사관학교에 14기로 들어갔으나 그도 오래 못 있고 자퇴를 했다.


순 개인적 얘기지만, 발이 280mm인데 270mm의 신발을 주니 발톱이 4개가 빠져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소대장에게 얘기했더니 발을 신발에 맞추라는 것이다. 비인간적 처사에 관둬버렸다. 지옥훈련을 거의 다 마치고 난 뒤라 너무나 아까웠다.


이후 국가 9급 행정직 시험에 50대 1의 관문을 뚫고 합격하여 6달을 다니다 징집 소환으로 한 많은 군문에 다시, 장교도 아닌 쫄따구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도 심하게 다그치고, 벌을 주고 구타를 하는지 너무도 더러운 군생활이었다. 그 군생활 시기는 박정희의 독재와 부마 민주 항쟁,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였다. 죽을 고비와 탈영의 유혹을 어찌어찌 견디고 제대하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우체국에 들어갔다. 2년 정도 다니다가 손목터널증후군과 허리가 아파 사표를 내었다. 당시엔 손목터널증후군이라는 명칭조차 없었다. 또한 공무원 병가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만두고 나서 냉혹한 사회의 현실을 깨달았다.

그다음은 경찰이었다. 부평에 있는 경찰학교 8주 수료 후에 말단 순경 생활을 군생활을 했던 파주경찰서 광탄지서에서 6달을 근무했다. 그때는 경찰이 쉬는 날이 없었다. 따라서 밤에 잠도 군생활보다 적게 잔다. 또 한 달에 한 번 꼴로 자살한 사람을 봐야 했다. 사고의 연속이요, 단속의 연속이다. 온갖 싸움과 난투, 취객과 도박꾼들을 말려야 했다. 얼른 그만두는 것이 생명을 보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월급은 13만 원. 밥값이 한 끼당 600원. 한 달에 93 끼니. 한 달 식비 55,000원. 방값 2만 원. 남는 게 없어 어머니에게 보내드릴 돈이 없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학교생활비를 벌기 전에, 우선 나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노가다에 들어가 하루 일하고 일당을 받는 건축 잡부 생활을 했다.

그것도 일이 꾸준히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 종일 해뜨기 전부터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까지 제일 힘든 일만 골라서 하는 노예의 생활이다.

일전에 어떻게 합격해 놓은 지하철 역무원 발령 날짜를 기다린 게 유일한 낙이었다. 역무원이란 지하철역에서 승객들에게 표도 팔고, 표를 검사하고, 승객들이 안전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역에서 역무원을 보는 일을 거의 없지만...)


근 1년을 기다리다가 발령이 나지 않으면 다니던 노가대나 열심히 다니려고 마음먹고 있던 중, 연락이 왔다. 드디어 지하철에 역무원으로 입사했지만, 맘 붙이고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먼저 몰려왔다. 전처럼 그만두게 되진 않을까? 괜한 걱정이었다.


일정한 수입이 생기고, 결혼할 나이가 되니 중매가 들어왔다. 하나, 나는 모아놓은 것이 하나 없었다. 지금의 아내가 방값을 가져와 결혼이라는 것을 떡 하게 돼버렸다. 결혼을 하니 예전처럼 직장을 그만 둘 수가 없다.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참고로 근무환경은 열악했다. 자갈과 흙이 범벅이 된 선로변의 먼지가 60킬로씩 달리는 차바퀴에 의해, 빈 공간에 꽉 찬다. 먼지가 뭉쳐 뉘엿뉘엿 구름이 되어 플랫폼을 떠 다닌다. 이 공해는 나갈 구멍이 없다. 지하이니까. 환기구로 어떻게 이것을 감당하겠는가! 코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군에서부터 있었던 축농증이 점점 심해졌다. 언제까지 지하의 먼지 구렁텅이에서 밤낮 생활을 해야만 할까?


결혼한 마당에 아무 계획 없이 그만둘 수도 없고, 처갓집 동네에다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아내가 그러라 한다. 3년을 근무했으나 퇴직금이 너무 적었다. 5년이면 더 나온다고 하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중에 극악한 지하환경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지하철을 몰고 다니는 승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열차에는 딱 승무원 두 사람이 탄다. 앞에는 기관사. 뒤에는 차장. 그래, 이거다! 나는 차장으로 여섯 해를 보내다가, 보수와 진급, 명예로운 면에서 기관사가 더 나을 것 같아 탈바꿈했다.


또 하나 특별한 이유는, 나의 아버지가 일정 말부터 20여 년 간을 기관사를 하셨길래, 왠지, 아버지께서 어떤 조건에서 생활하셨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어 직접 해보고 싶었다.





편집 / 11월 (아빠 딸). 집에 오면 운동과 독서만 하던 아빠를 보고 자란 딸. 읽은 만큼 쓰는 것도 곧잘 할 것 같아 아빠를 들들 볶았다. 누군가 아빠 글을 좋아한다면 아빠도 자연스레 글을 많이 쓰게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노조와 파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