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지하철 기관사의 강제 에세이 2
내가 경험한 사회생활은 학창시절과 군대생활이다. 더불어 연년생인 형제간의 생활과 삼촌들이 있는 대가족생활을 겪은 바 있다. 사회생활은 장유유서가 그 골간이다. 연봉이 곧 서열인 공무원 생활도 한몫을 한다.
입사한 지 4년이 되었을 때, 노태우 정권이 노조 설립을 허용했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25시간 근무에 23시간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것도 형편이 좋을 때의 이야기이다. 근무는 아침 9시에 시작하는데, 아침 7시까지 나오라한다. 나가서 쌓인 눈을 청소해야한다. 또, 어떤 때는 지하철을 이용하라고 팜플렛을 돌려야한다. 밤샘근무를 마치고 오전 10시에 퇴근해야하는데도 역장이 새마을 실습을 갔다왔다는 소감을 듣기위해 낮 1시까지 강의하는 걸 들어야했다.
곧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 노동 3법의 자유를 주었다. 지하철공사 만 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임금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 불필요한 잡다한 근무 배제 등을 투쟁의 목표로 삼고 서울시장과 지하철 공사장, 그리고 똘마니들을 상대로 한 투쟁에 들어갔다. 성스러운 노동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앞장서 싸우는 동료들의 뒤를 따라 가게되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 이것을 무기로 똘마니들과의 투쟁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똘마니라 하면 사측에 빌붙어 목숨을 유지하는 자들인데, 간살꾼이라고도 하고, 친일파, 어용, 을사오적, 간첩, 스파이, 밀정, 구사대라고 자칭 한 놈, '총대 내가 맬 게!' 한 녀석, 여러가지로 부른다. 자신의 동료인, 노동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주위의 동료를 노동조합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게 협박과 회유로 포섭하는 자들이다. 노동자를 똘마니화 시키는 자들이다. 나중에는 전노조의 똘마니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 한 나머지, 전노조원의 반 이상이 똘마니가 돼버렸다.
노동조합의 동료를 믿고, 앞장서 싸우는 동료들이 싸울 때마다 똘마니들의 배신으로부터, 사측으로부터 주의와 경고, 감봉, 직위해제, 의원면직, 사표, 파면, 법정구속 등의 길로 들어서고 그 뒤를 따르는 우리도 강도는 낮지만, 마찬가지의 길로 들어섰다.
마침 나는 이 즈음에 역에서 근무(역무원)하다가 열차 타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기관사가 되었다. 그곳 역시 투쟁의 바람이 거세었다. 역에서보다 더 거친 바람이었다. 왜냐면 2-300명의 대규모 집합의 합동근무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바람은 퇴직 때까지 계속되었다. 직장을 잃느냐, 마느냐? 똘마니들에게 잘 보여서 승진을 하느냐, 마느냐? 돈을 취하냐, 돈을 손해 보느냐? 의리냐, 사측에 비비느냐? 의 싸움이다. 친일이냐, 독립군이냐? 의 싸움이다. 의리냐, 배신이냐? 의 선택의 기로이다. 부언하면 동료를 배신하느냐, 동료와 함께 가느냐? 의 기로이다. 양심이냐, 비양심이냐? 진실이냐, 거짓이냐? 직위해제냐, 근무를 계속하느냐? 의 분별이다.
다른 동료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이 분별 망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동료들과의 '술 한잔' 문화에 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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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56년생. 역무원과 지하철 기관사로 35년 근속 후 정년 퇴직했다. 딸(11월)이 시켜서 쓰게 된 강제 에세이. 근무 시에 적었던 일기와 기억을 바탕으로 지하철 기관사로 생계를 꾸려나갈 때 느꼈던 희노애락을 적게 되었다. 현재는 탁구 치는 재미로 사는 중.
편집 / 11월 (아빠 딸). 집에 오면 운동과 독서만 하던 아빠를 보고 자란 딸. 읽은 만큼 쓰는 것도 곧잘할 것 같아 아빠를 들들 볶았다. 누군가 아빠글을 좋아한다면 아빠도 자연스레 글을 많이 쓰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