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23.06 잊지 않으려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검역대를 지나고 자동문이 열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찾아보는 순간이 좋았다. 그때 엄마의 모습이 저번보다 더 늙지 않아서 좋았고 큰 조카가 환영 메시지처럼 내 얼굴을 그린 그림을 들고 환영해 주는 모습이 좋았고 그걸 비디오에 담는 동생네 부부가 있어 좋았다.
비행 때 잠을 못 잤는데 영종도에서 저녁 식사하고 서울로 들어가는 동생 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스르륵 잠들 수 있던 순간이 좋았다.
집에 도착하니 지난번처럼 내 화장품을 담는 그릇, 속옷과 겉옷을 담는 옷장, 랩탑 안착시킬 책상, 밤이면 창 밖으로 보이는 고요한 아파트 단지와 도로와 듬성듬성 차들의 불빛을 마주할 패턴을 찾은 것이 좋았다. 아침이면 집 앞 사랑하는 세겐 커피에서 커피를 마시고 햇살 좋지만 그늘진 홍제천 강변을 걸을 생각을 하니 좋았다. 세겐 커피를 운영하는 (나보다는) 젊은 사장이 마음속으로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익숙함이 좋았고 동네 여유로운 아줌마들을 주로 상대하는 커피 사장으로 내 얼굴을 기억할까 쓸데없는 고민 하며 오랜만에 문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두 번째 날에는 부모님과 나 모두 일상의 복작거림 없이 아직은 프레시한 느낌으로 상암동 뷔페에 셋이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운전을 잘 못하는 아빠 덕분에 항상 그 차로 이동할 때마다 예견되는 불안함을 안고 이동한 순간이 좋았고 뷔페 건물이 주차장 건물인 듯한데 온통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차들로 꽉 차 아슬아슬하게 돌아 돌아 8층 주차장까지 올라가야 했던 순간이 좋았다. 저녁을 마치고 다시 8층 주차장에 돌아오니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의 또 다른 방송국 건물들이 노을에 물든 풍경이 좋았다.
세 번째 날에는 서대문구의 자랑 (이라고 서대문 곳곳에서 문구 발견)인 안산에 아침부터 갑작스레 엄마와 올라가 엄마의 안내를 받으며 산책하는 순간이 좋았다. 멀리 있어도 심심한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 잘 묻지 않는 편인데 몇 안 되는 엄마의 스폿과 루틴을 거쳐가는 순간이 시리도록 좋았다.
서울에 도착하면 항상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한 느낌이라 지인들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수요일에 절친과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며 느낌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전혀 모르는 구로디지털 단지 거리거리를 지나 헤매며 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좋았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의 여행객이자 이방인인 헤매는 나의 어리숙한 존재가 좋았다. 건물 들어가는 자동문을 잘못 찾아 다른데로 빠져서 순간 길을 잃어 아침부터 등산으로 이즈음 거의 2만보를 걸어가고 있던 순간이 좋았다. 텅 빈 테라핀 카페테리아에 앉아 친구가 퇴근 준비하고 내려오는 동안 창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구로구 디지털로의 풍경이 좋았다.
무인 가게들이 많이 생긴 것을 지난번 서울행에서 알게 됐는데 이번에는 조카들 선물 포장을 위해 집 앞 무인문방구에 밤에 혼자 들려서 진열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기특하고 이상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아 어렸을 때 문방구에 가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사고 싶은 것 다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일상에 없는 물건들이다 보니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 사야지!라고 생각되는 그 여유에 웃음이 나오던 순간이 좋았다. 몇 가지를 사들고 집에 들어오니 이 하루는 3만보를 걸었다고 하여 그 뿌듯함에 이만큼 좋을 수가 없었다.
좋았고, 좋았다. 기억하고 간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