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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Dec 04. 2022

04/ 원고를 쓰려다

1월호 원고 의뢰가 도착했다. 일요일에 에디터에게 메일이 온 것도 의아했지만, 1월호부터는 매거진들의 두께가 얇아지기 때문에 이달에는 일이 없진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던 모양이다. <럭셔리>나 <노블레스> 같은 멤버십 매거진 패션 에디터에서 시계와 주얼리 전문지의 에디터로 전향했던 나는 10년 넘는 에디터로서의 회사 생활을 정리한 다음에도 프리랜서로 청탁받은 원고를 써주고 돈을 받는다. 일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원고’나 ‘청탁’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근사하게 들린다. 내가 의뢰받는 원고는 광고에 목적을 둔 전문 기사다. 주로 패션이나 시계, 주얼리 브랜드가 그 달에 노출시키고 싶은 이슈의 보도자료를 전달하면, 정해진 페이지 분량에 맞춰 약간의 기획을 덧입힌 원고로 재탄생시킨다. 해서 여행을 다녀온 기사라든지, 내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삶의 철학 같은 걸 세상에 말해볼 수 있는 원고를 쓰지 못하는 약간의 열등감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음미하며 곱씹게 되는 문장’력’(나의 능력이 들어간)의 시나 소설까지는 아닐지라도 글에 ‘내가’ 좀 묻어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누가 써도 크게 상관없는, 무언가 잘 팔기 위한, 글을 쓰면서 ‘내가 글을 써 돈을 번다’, 얘기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라는 마음은 에디터를 하는 내내 점차 커졌던 것이 분명하다. 처음 에디터가 될 땐, 그 직업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세상에 그럴싸하게 잘 살아 보이는 방법을 전파할 수 있는 직업이라 여겼다. 그게 매력적이었지, 무엇으로 (어떤 수단으로) 알릴지는 중요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보다. 전공 때문에 자연스레 패션을 택했는데, 막상 패션 에디터가 잘해야 하는 일엔, ‘원고 잘 쓰기’의 비중은 아주 크지 않았다. 이미지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거나, 스태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거나, 기획력이 좋거나, 등등 글을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됐다. (그럼에도 원고 쓰기가 어려워 패션 에디터를 유지해 나가지 못하는 일도 분명 발생했다) 

그런데 일을 해나가면 할수록 나는 글에 욕심을 냈다. 사람들과 어울려 화보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마감에 회사에 박혀 원고나 쓰는 게 훨씬 좋았다. 그러다 새벽에 쓰다 말고 집에 다녀와 아침에 보니, 써놓은 원고가 누가 썼나 싶게 잘 썼을 때, 기분이 좋았다. 회사 사람이 “기자님이 쓴 글은 무슨 설명인지 이해하기가 쉬어요”,라고 말해주는 게 “이번 화보 진짜 멋있어요”, 보다 듣기 좋았다. 글을 잘 쓰는 게 좋아졌다. 



왓챠에 새로 올라온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보다 의뢰받은 원고 생각에 마음이 부대껴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가가 주인공인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글쓰기 강좌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워딩이 정확하지 않지만)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지만, “왜” 쓰는가도 중요합니다” 아, 그렇다. 왜 글을 쓰려는 걸까, 왜 글이 쓰고 싶은 걸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돈 벌기 위해 쓰는 글 말고, 진짜 글이 쓰고 싶어,라고 말하는 나는 왜 글이 쓰고 싶은 것인지 생각해 봤던가. 


일기를 쓰던 젊을 때의 글은, 어찌할 수 없이 쏟아지던 슬픔이나 우울을 받아 희석해 주던 물 같았다. 눈물범벅으로 써나가던 수첩 위에 휘갈긴 글들은, 내 일부처럼 버리지 못하고 박스 안에 보관돼 여전히 작업실 한구석에 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며 싸 들고 다니던 박스들, 점점 그걸 꺼내 다시 읽을 날이 멀어지는 것만 같다. 상자를 여는 것이 두려워 피하는 중이구나, 이제야 그걸 어렴풋이 알아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쓰던 글은, 나를 입고 먹고 살아가게 해줬다. 그러고 보니 참 고맙네. 지금의 글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내가 유일하게 눈에 드러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 정답을 찾아보고 싶지만,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위해 잠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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