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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Dec 17. 2018

인트로 : 두달 살기를 하는 이유

발리 두달살기의 시작

나는 겁이 많다. 겁만 많은가. 늘 근심 걱정거리도 많다. 아아 이쯤 멈춰야 하겠지만, 난 예민한 데다 불평불만도 많고, 잘 참지 못하나 제대로 표현할 줄도 모른다. 게다가 열심히, 꾸준히 하는 일이라곤 없지만 늘 완벽하길 원한다. 이런 객관적인 평가를 인정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자기소개는 이쯤으로)  


나는 지금 발리에 있다. 발리 공항에서 만난 대부분의 관광객이 향한다는 꾸따 대신 서쪽의 사누르Sanur 지역의 한 숙소에 있다. 이곳에서 한 달을 머무르다 우붓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시 한 달을 지내볼 예정이다. 결혼한 지 1년이 넘어선 그와 나는 얼마 전 의도치 않게 차례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저런 성격의 사람이란 회사 다니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반대로 꽤 긍정적이고 무던한 남편도 회사가 힘이 든 건 마찬가지였다.


나와 그는 각자 다른 이유를 안고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고민했던 몇 곳의 도시 중 발리, 그중에서도 사누르를 택한 건 남편을 위해서였다. 그는 서핑이나 실컷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바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 스무 살 무렵부터 파도가 좋은 날이면 20분 안에 차를 몰고 가 서핑을 하던 사내가 서울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가끔 서핑을 가면 그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난 해맑은 표정을 보는 게 좋아서 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그를 바다로 보내곤 했다. 나는 서핑 같은 건 죽을 때까지 안 해도 좋은 사람이지만, 남편 때문에 서퍼들과 파도를 구경하는 재주가 하나 늘었다. 틀에 박혀 살던 남편은 맘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했고, 그러기엔 한달은 부족하다고 두달을 고집했다. 


서퍼들의 성지라는 발리  *사진은 모두 파자마보이(@pajama.boy55)


11-12월이면 발리는 우기다. 이때는 좀 더 습하고 매일 맑고 쨍한 날은 아니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한낮이 아니면 엄청 덥진 않아 지내기 적당하다. 하지만 서퍼들에게 그다지 서핑하기 좋은 시기는 아니라고 한다. 서퍼들은 매일 파도 차트를 체크한다.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있다는 거다. 남편은 서핑 트립으로 혼자 발리를 서너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서핑 한번 실컫해보고 싶다는 그를 위해 우기 중 파도가 그래도 좋은 편이라는 이곳, 사누르 지역을 택했다. 발리에 온 지 5일째 접어든 오늘, 이번 여행의 첫 서핑을 앞둔 그는 심장이 두근 된다는 말을 남기고 혼로 서핑 트립을 떠났다.


숙소에 혼자 남은 나는 여기 온 이유들을 꺼내본다. 사실 쫓기듯 도망 온 나는 아직 내가 여기에 왜 와있는건지, 우습게도 명확하지가 않다. 돌아보면 어쩜 인생에 큰 쉼표일지 모르는 두달살기의 결정을 물 흐르듯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고, 발리에 대해 많이 알아보지도 않았다. 나보다 여러번 이곳에 와본 남편을 묵묵히 믿었고, 물가가 서울보다 싸다는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을 뿐. 나도모르게 마음 깊이에서는 남편이 다 해결할거란 의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나는 서울이 아닌 곳이라면, 아침에 눈 뜨고 싶을 때 일어나도 죄책감이 덜 들것 같았고, 설렁설렁 숙소에서 책이나 보고 내키면 영어 공부나 하려는 생각이었다. 서울에 살던 나는 좋든 싫든 온갖 만남에 스스로를 출석시켰다. 퇴사생이 된 이후로는 더 바빠졌다.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가득 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러 돌아다녀야 했다. 야근이나 상사 같은 핑계가 없어지자 거절이란 게 더 어려워졌다(앞서 소개했지만, 불평불만이 많으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타입입니다).

내 딴에 최선을 다해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버거웠다.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나갈 수도 없고, 꼬박꼬박 즐겁게 답하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스스로가 우습기만 했다. 여기선 메세지 확인을 잘 안한다. 만나러 오겠다는 이 없으니, 뭐라고 말해 거절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걸어가보는 것, 그게 그리도 어려워 나는 서울에서 발리까지 도망을 왔다. 


*사진은 파자마보이(@pajama.boy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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