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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Dec 19. 2018

민감한 여행자의 발리 한달살기 : 발리에는 벌레가 많아

다 좋을 줄 알았지 

19세기 소설 <에레원Erehwon>의 책 제목은 '낙원', '이상향'이란 뜻이다. 이를 거꾸로 읽으면 nowhere - 어디에도 이상향은 없다는 뜻이 된다. 반면 떼어서 읽으면 now here - 이상향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뜻이다. (책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잔 브라흐마 에서)   


이곳 발리 빌라의 정원은 정말 마음에 든다. 파아란 타일을 붙인 수영장의 테두리는 아이보리색 돌로 마무리되어 있고, 벽과 닿아있는 수영장 한쪽에는 커다란 나뭇잎의 열대식물들이랑 꽃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거린다. 조용할 때도 있고 새들이 와서 지저귈 때도 있고 옆집의 닭들이 차례로 하모니를 이루며 노래할 때도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수영장 옆에 마련된 썬배드에서 보내는 나는 두 자리밖에 없는 이곳이 늘 비워있는 게 고맙기만 하다.

나에게는 외국에서의 한 달 살기에 대한 로망이 꽤 오래전부터 꽤 컸다. 늘 어느 나라든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다른 문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틈에 사는 일이란 어떤 걸까 궁금했다. 20대의 여행지에선 늘 잠깐이라도 현지인처럼 굴려고 무지 애를 썼는데, 지나고 보니 감출 수 없는 티가 엄청난다는 게 우스워져  어느 순간부터 그만두었다. 관광객에는 관광객다운 태도가 더 쿨한 것 같아서. 

막상 ‘발리 살기’가 시작되자 나에겐 로망만 있었고, 그 어떤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은 짧았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엄청 예민하고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미리 이 모든 것들을 고려했다면 아예 시작도 못했을 거지만. 어제는 그 공포와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보다 이곳에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사실 나는 오들오들 마음을 떨고 있다. 

공포의 주범은 바로 벌레와 하수구 냄새. 사누르의 하수 시설은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 스콜이 내릴 때의 엄청난 빗물 때문인듯 길가에는 중간 중간 구멍이 나 있다. 그 구멍 안에 있던 쥐와 눈이 마주쳤고, 숙소에서는 첫날부터 퀘퀘한 하수구 냄새가 올라와 심기가 불편했다. 카카루치를 특히 무서워하고 냄새, 소리에 예민한 나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일을 지내야 하는 숙소의 욕실이 영 거슬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푼 바로 그날 밤, 욕실 문을 연 나는 정말 커다란 카카루치와 마주했다. 하휴 얼마나 놀랐는지, 그 다음날 그것은 체포가 됐지만 나는 여전히 욕실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의식을 거친다. 문을 두드리거나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 발로 찰 때도 있고. 문을 격하게 연 후 살며시 고개만 들이밀고 왼쪽 오른쪽 살핀 다음, 다시 문과 제일 가까운 세면대를 떵떵 두드린 후 발을 디딘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하구수 냄새와 벌레는 머릿 속에서 한데 결합돼 엄청난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줬고, 그날 이후 나의 모든 주의력은 이 나라에 존재하는 온갖 벌레들에게로 향했다(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벌레들이 존재한다). 거리는 한없이 더러워 보였고, 쥐나 커다란 카카루치 사체가 정말 내 눈에만 쏙쏙 들어왔다. 귀여운 도마뱀마저 재빨리 움직이는 등장에 얼마나 까무러쳤는지. 울기 직전 상태였다.  


어제는 발리에 와서 처음으로 마사지도 받고, 석양을 보며 저녁을 먹기 위해 해변의 꽤 비싼 레스토랑에 갔다. 마시지는 정말 가격 대비 훌륭했고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해변 레스토랑은 깨끗하고 서비스도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무감각했다, 멍하니 한 번씩 움찔되며 바보같이 놀라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져 자존감마저 바닥에 다다를 정도였으니 행복을 느낄 틈은 없었다. 나의 모든 마음은 발리의 더러운 거리와 벌레에게로 가 있었다. 



사누르의 한 해변 *사진은 모두 파자마보이(@pajama.boy55)


나는 결국 남편에게 돌려 돌려 말했지만 숙소를 바꾸거나, 일정을 줄여 서울로 돌아가면 어떨지 묻고 말았다. 손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상황을 견뎌내기에 나는 너무 예민한 사람이었다. 직접적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도 못했는데, 남편은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고 우린 크게 싸웠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나도 잘 안다. 인생에 누구나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아니란 걸, 그리고 어쩜 30대 중반을 넘어선 우리 부부에게도 다시 도전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기회라는 걸. 젊은 날들에 얼마나 꿈꾸던 일이었는지도. 하지만 정작 그 기회를 잡게 된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칠 생각에 접어들고 있었다. 


울며불며 잠이 든 후 아침은 더 침울해져 이른 아침부터 눈을 부릅떴다. 내가 명상을 배우는 스승은 12월과 내년 1월 두 달간 한국 시간으로 아침 6시 전부터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함께 아침 명상을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새벽부터 서핑을 떠나는 남편이 사라지자 나는 일어나 앉아 명상을 시작했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내일 스승에게 고민 상담을 할 요량으로 질문을 미리 써두기로 했다(실시간 방송 중 마지막에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신다). 헌데 질문을 만들며 스승이 뭐라 답할까 생각하던 나는 읽었던 책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의 첫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잔 브라흐마가 수행자 시절, 새로 절을 짓는 곳에서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던 에피소드이다. 시간이 얼마든지 많았던 수행자는 신중하게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렸는데, 아니 첫 번째 벽을 완성하고 보니 벽 중간의 벽돌 두 장이 각도가 약간 어긋나게 놓여져 있었던 거다. 그는 주지 스님에게 그 벽을 허물고 다시 쌓자고 했지만 스님은 단호하게 그냥 두라 말했다. 이후 절은 찾은 방문객은 브라흐마에게 매우 멋진 벽이라고 말했지만 브라흐마는 저 어긋난 벽돌 두장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했다. 방문객은 "물론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훌륭하게 쌓아올린 998개의 벽돌도 보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거다. 그제야 브라흐마는 그 잘못 놓인 두 장의 벽돌 대신 나머지 잘 쌓아올린 벽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을 때의 나는 진정 너무 뻔한 이야기로구나, 생각하고 책을 몇 번 덮은 바 있다(최근에야 끝까지 읽은 이 책은 이로운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있다). 헌데 문득 그 벽돌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아직 일주일이 안됐지만 그간 나는 발리에 와 좋은 순간들을 분명 몇 번이나 마주했다. 이국적인 경이로운 건축물, 한가롭게 부는 바람,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는 식사와 남편 덕에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현지인처럼 다녀보는 경험도 훌륭했다. 앞서 말한 숙소의 정원과 조용함은 어떻고!

그래, 그 잘못 쌓은 두장의 벽돌 같은 존재인 벌레에게 뺏긴 마음을 아름다운 발리를 느끼는데 쓰면 된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이론만 익혔지,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르겠어 마음이 답답했다.  


나는 마음먹기 느리고 적응력이 더딘 사람이다. 허나 오늘은 아직 성난 남편을 두고 처음, 홀로 길을 나서봤다. 남편이 없으면 늘 숙소에만 머물며 좋아 이게 내가 하고 싶던 거야,라고 주문을 외웠던 모양이다. 될 대로 되라지, 이 불끈 솟은 용기는 마음속 화가 커지자 공포심을 이겨버린 오기였던 것 같다.

늘 남편 뒤에 숨어 다니던 내가 마침내 혼자 낯선 곳에 서게 되자 비로소 숨어 있던 마음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가 만들어준 시원한 그늘 아래 행복해보려고 노력했던 나는 막상 혼자가 되자 더럽고 무섭기만 했던 바닥 대신 앞을 보게 됐다. 눈이 마주치는 현지인들과 인사를 하고, 길가에 어마어마한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발리의 자연 그대로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여기저기 꽃이 핀 나무에서 좋은 내음이 바람에 실려왔다. 전선과 나뭇가지를 오고 가는 청설모, 아무 데나 누워 편히 쉬는 발리 개들을 보고 싶은 만큼 서서 구경할 수도 있었다(남편 뒤를 쫓을 때는 그걸 보는 동안 그는 저만치 앞서 가 있어 난 곧 뛰어야 했었다). 


그제야 발리가 조금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길가에 구멍이 크게 크게 뚫려있는 하수 구멍들이 무서워 혼자 펄쩍펄쩍 요란하게 뛰지만(현지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뛰지 않는다, 동작을 크게 움직이는 이들도 잘 없어서 내 행동은 더 유난스럽고 튀게 느껴진다). 발이 가는 곳으로 자유롭게 길을 걷다 보니 이것저것 혼자 헤쳐나갈 게 많아지고, (잠시 잊은 거겠지만) 벌레를 향한 공포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이거였다, 이국적인 도시를 탐험하는 방법은, 마음대로 누벼보고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는 것. 두 달 살기의 로망 역시 험하고 거친 곳에 나를 내던져 나를 단련시키기 원했던 거 아닐까?

민감한 스스로가 늘 고민이었다. 스승은 그건 타고난 거라 바꿀 수 없다고 좋은 쪽으로 발현시키라 했지만, 내 민감함이 스스로도 버거웠다. 회사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첫 명상 수업에서 스승이 명상을 왜 배우려 하느냐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민감해서 살기가 힘들어요, 명상을 하면 나아질까 해서요” 거기에 “민감한 건 타고난 거라 없애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명상을 하는 과정에서 소리나 냄새 등에 더욱 예민해질 수 있다”는 답을 받아 나는 마음이 조금 휘청했다. 하지만 호흡 명상을 배우다 어렴풋이 알게됐다. 민감성 자체를 바꿀 수 없지만 주의력을 고통받는 곳에서 돌려 내가 원하는 곳에 둘 수 있다는 것, 물론 나에게 꽤 많은 훈련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민감함처럼, 인생에서 빼내고 싶은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그걸 없애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이롭고 행복한 경험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오후엔 (또 처음으로) 현지 요가 수업엘 갔다. 그전엔 한참이나 억지로 용기를 북돋아봐도 ‘나만 못하면 어쩌지, 난 아주 비기너인데’, ‘영어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혼자 다른 동작하고 있으면 얼마나 창피할까’ 등등 걱정거리가 떠나지 않았다. 나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는 중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느긋해져서는 그냥 해보지 뭐,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다. 마음가짐이란 이렇게 신기하고도 불확실한 것인걸, 멋대로 두면 늘 근심거리, 공포, 미움 같은 어두운 마음을 먼저 확장시키는 모양이다. 이제야 발리의 두 달 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오늘 걸으며 만난 발리 사누르 지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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