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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124일

by 은은


오늘은 음력 십이월 미망(未望, 보름 전)입니다. 어젯밤 산책길에 마치 숨바꼭질하듯 산마루에 고개를 살짝 내밀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달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 구경을 하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를 자아냅니다.


겨울은 겨울인가 봅니다. 미국 LA에서는 강풍에 화재 진압이 안 되어 뭇 생명이 고통받고 있고 중국에서는 인공강우로 인한 이상 기후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도 약 3주 뒤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은 오겠지요.


우리는 말로 인해 사람을 얻기도 하지만 잃기도 합니다. 일이 시작될 기미를 미리 알아 사전에 대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외부의 경계에 휘둘려 코 앞의 일을 처리하다 보면 달님처럼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곤 합니다.


우리는 언제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을 한계 지우는 미망(迷妄: 헤멤)에서 벗어나 하늘과 땅의 중간자이자 대행자로서 보름달처럼 환하고 밝으며 의젓하고도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삼라만상 앞에 나설 수 있게 될까요?


우리 성현(聖賢)들은 깊은 연못에 임하듯[여림심연(如臨深淵)] 마치 살얼음을 밟듯[여리박빙(如履薄氷)] 말과 행실을 조심하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하늘을 공경하고[경천(敬天), 사람을 공경하며[경인(敬人)], 만물을 내 몸과 같이 공경하라[경물(敬物)]고 때론 다정한 누이와 형의 모습으로 때론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으로 따스하게 일러주기도 하였습니다.



깊디깊은 긴 호흡으로

내면의 깊은 곳 가 닿고


텅빈 침묵으로

내면의 힘 기르면

모래 한 알

쌀 한 톨로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다네


오늘 밤 달이 밝고 참 좋습니다.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斂而靈(렴이령) 그대 밝은 영혼 수습하여

光藏沖漠(광장충막) 지극히 고요한 곳에 잘 갈무리 하시길

九淵沈沈(구연침침) 깊디 깊은 연못 속에 잠기면

外不蕩(구연침침외불탕)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虛而(허이) 그대 마음 텅 비우면

生明涵萬象(허이생명함만상) 우주 지성 밝아져 삼라만상 품게 되고

而時出之無窮已(이시출지무궁) 수시로 꺼내 써도 다함이 없으리니

嗟吾之默其在是(차오지묵기재시) 이게 바로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

- 장유(張維, 1587 ~ 1638), <침묵을 공경하며[묵소잠(默所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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