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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퇴근의 의미: 15년 만에 찾은 나만의 행복

나는 이제 일하러 출근하지 않는다.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한다

by 여지행

15년 만에 나의 퇴근길이 달라졌다.

사람들에 떠밀려 겨우 타는 지하철, 숨 쉴 틈도 없이 꽉 찬 공간에서 스마트폰을 보겠다고 어떻게든 팔을 올려 동영상을 보며 시간을 때운다. 내가 언제 갈아탔는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어느새 집 앞 역에 도착한다.

때로는 끝내지 못한 업무를 메모장에 정리하거나, 전화로 내일의 업무를 지시하고 점검하기도 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조차 나는 업무를 떨쳐내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야근을 반복했다.

이것이 지난 15년간의 나의 퇴근길이었다.


그런데 2주 전, 나의 퇴근길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따릉이를 빌려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저녁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 거리를 지나 한강으로 진입하면, 푸른 잔디에서 퍼지는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그렇게 나의 퇴근길은 180도 달라졌다.

운이 좋을 때면 한강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치 나의 퇴근을 축하라도 하듯 반포대교의 분수가 나를 반겨준다. 일몰이 내려앉는 한강의 풍경은 하루의 끝을 빛나게 한다. 자전거를 타며 바라보는 이촌, 마포 부근의 63빌딩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행복이란 거창한 한 방이 아니라, 이런 소소한 감동과 감사, 그리고 새록새록 피어나는 작은 설렘들의 합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나는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퇴근 시간과 함께 퇴근길이 더더욱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15여 년 만에 어떻게 퇴근길을 바꾸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한 달 전의 교통사고였다. 그날 나는 차 수리를 맡기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귀가해야 했다. 무척 더운 날이었지만 AS 센터 앞에 놓인 따릉이가 눈에 들어왔고, 연차를 낸 덕분에 시간도 충분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집에 가볼까?’라는 작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자전거 속도에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은 땀이 맺히지 않게 했고, 파란 하늘과 초록 잔디, 그리고 풀 내음은 나를 완전히 힐링시켰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따릉이 퇴근에 도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자전거로 퇴근하는 새로운 일상을 과연 시도했을까?

'하워드의 선물'에서 인생의 전환점은 때로는 누군가에 의해,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와 계기로, 혹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나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번 경험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지만, 그 기회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다. 전환점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우리가 발견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그것이 기회인지도 모른 채 지나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전환점이 될 기회를 발견하고,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제 나는 하루 60분의 설렘이라는 선물을 매일 안고 사랑스러운 풍경을 만난다. 무엇보다 이제는 퇴근하며 남는 손이 없기에,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업무 고민과 업무 지시로 카카오톡과 메모장을 붙들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15년 만에 퇴근과 동시에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진짜 퇴근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퇴근이란 이런 거구나.” 이걸 깨닫는 데 15년이 걸렸다. 과거에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보다는, 지금 이 순간 이 퇴근 풍경을 찾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행복을 발견하는 과정은 참으로 소소했고, 그 소소함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참으로 크다. 내가 놓치고 있던 일상 속 행복을 발견하자 정말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또 다른 발견을 할 수 있는 시야가 트이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일하러 출근하지 않는다.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한다.

2024년 여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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