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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Nov 15. 2021

나는 지금 넘어가고 있어

#아직도내가니엄마로보이니

#they의세계


나를 LGBTQ세계로 이끈, J는 얼마 안 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얼마 안돼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박사과정을 밟으러 갔다. 그리고 때때로 가을 타이베이 프라이드가 있을 때면 나를 포함해 친구들을 만나러 오곤 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온 이후로, 공부하는 환경상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나보다 어렸다. 20대가 대다수였는데, J는 내가 만나본 그 나이대 친구 중 가장 사려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고, 날 다 보여줘도 괜찮다 안심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J를 만나고 나서부터, 여권, 신분증 등 공문서에 그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던 성별의 표시나, 글에서 그와 그녀를 명확히 구분하는 표현 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he와 she, 他와 她 [1] 같은 성별 이분법적인 인칭대명사를 안 쓰려고, 또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성별로 먼저 구별해 인지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J와 강변 언덕에 위치한 예술가 마을에 놀러 갔을 때였다. 야심한 시각이었고, 불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 접어 들었을 때였다. J가 먼저 무섭냐고 물어봤던가. 내가 ‘여자 둘 뿐이니까 아무래도 조심을 해야겠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J가 “너는 내가 여자로 보이니?”라고 하는 거다.


갑분싸. 아니, 이게 무슨. 지금 내 발 밑도 안 보이는 이 어두운 골목에서, 너랑 나뿐인데. ‘너는 내가 아직도 니 엄마로 보이니’ 도시 전설도 아니고. 순간 속으로 뜨끔 실수했구나 싶었다. ‘여자가 아니구나 너.’ 그 순간을 내가 무슨 말로 지나갔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J도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 J를 중성적인 멋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조금 굵긴 했지만, 남자라고 생각될 정도는 아니었고, 그렇게 따지면 아침에 자다 일어난 내 목소리가 J 목소리보다 굵고 낮을 것이다. 겉으로 여자로 보이는데 여자가 아니라고 하니, 그럼 남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녀라는 성별 이분법 너머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간 맞춰지지 않고 겉돌던 손 안의 퍼즐 몇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J는 나와 만나는 중에 밖에서 화장실을 가야 할 때면, 늘 여자 화장실도 남자 화장실도 아닌,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했다. 또 J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했는데, 운동을 하고 나서 웨이트로 바짝 성난 가슴 근육이 보이는 옷을 입고 SNS에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SNS에 여성들이 웨이트를 하고 나서 뽐내는 사진들과는 사진의 포인트가 많이 달랐다.


J가 교환학생을 마치고 이 나라를 떠나기 전, 카페에서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 내게 그 말을 꺼냈는지 잘 모르겠지만, J가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 사실 나 트랜지션(transition) 중이야.”


몇 년 동안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나씩 차분히 들려주었다. 이미 전환이 끝난 트랜스젠더 들은 하리수를 비롯해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지만, 전환 중인 트랜스젠더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먼저 나는 말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호르몬 변화로 인해 몸이 겪는 부담이나 심리적 불안정은 없는지 물었다. 내가 지켜봤던 대로 J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잘 넘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J가 현재의 자신을 어떤 성별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를 그 서툰 질문에, J는 이렇게 답했다. 非2차원 성별자. 남녀라는 2차원적 성별로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논 바이너리.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에서 주류인 이성애자들과 다른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시기를 지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치열한 자기 인정의 과정이 있은 후에는, 가족 등 주변 환경에 공개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또 거치게 되는데(물론 이 과정이 모두 동일하게 순차적이거나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J를 보며, 이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거친 소수자가 얼마나 성숙하고 안정적인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데에도 편안해 보였고, 상대방의 엉뚱한 질문이나 반응에도 전혀 흥분하거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실제로 자기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및 수용을 순조롭게 거치지 못한 양성애자나 게이 친구를 주변에서 보았고 그로 인한 부작용, 트라우마랄까. 주변과 자신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들을 격렬하게 본 바가 있어서 더 대비적이었다. 


나는 J의 지성과 사려 깊음, 따뜻함을 무척 좋아하고, 인간적으로 신뢰한다. J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그때도 지금도 J에 대한 내 믿음과 애정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J는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잘 소화하고 있었고, 가정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도 그것으로 인해 차별받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자신 모습 그대로, 변화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과하게 한쪽 성별로 보이기 위한 말투나 제스처도 없었고, 내 눈엔 그 친구의 남자 같지도 여자 같지도 않은 그대로가 자연스러웠다.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범위가 굉장히 협소한 데 비해, J는 잘하면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혹은 연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다만, 이 친구에게 지금의 트랜지션이 버겁지 않기를 순조롭게 끝나기를 바랐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지내면서도 우리는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서로가 포스팅한 글이나 사진을 보고 코멘트를 달고 메시지를 보낸다. 어느 날, 경제적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 이야기를 페북에 썼는데 그걸 보고 J가 따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를 읽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 친구를 누가 마음으로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얼마 전에 올린 포스팅을 봤어.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지.

만약 네가 지금이나 혹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실질적인 거나, 경제적인 거나, 심리적인 거나… 

나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거라고. 

우리 비록 자주는 못 만나지만 나한테 있어서, 

너는 내 제일 좋은 친구 중에 하나야. 

너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미안해 말고 언제든지 연락해.  


      

[1] 중국어의 3인칭 대명사로, 여자她와 남자他를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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