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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이라는 이름의 무능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by NowHereUs

부당한 지시, 나라면?

계엄령 선포 이후 두 달, 출퇴근길마다 한국 뉴스를 배경으로 틀어놓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탄핵 심판과 국정조사 특위 영상을 반복해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20년간 공공기관에 몸담아온 내게, 이번 계엄 사태는 개인적이고도 직업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가 맡은 일이 내 양심과 충돌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날 밤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과 경찰은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지시에 우왕좌왕하며, 국회의원들을 저지하거나 끌어내라는 명령을 따르다가 철수 명령이 떨어지자 시민들에게 “미안합니다.” 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부당한 지시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맡은 업무가 내가 가진 상식과 충돌할 때, 법을 어기게 만드는 지시를 받았을 때, 혹은 내가 속한 조직의 리더와 법정에서 책임 소재를 다투게 되었을 때, 부당한 지시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전직 서기관 노한동의 저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은 이런 고민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환기시킨다. 이 책의 부제, "한국 공직사회는 왜 그토록 무능해졌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필리핀, 미국의 공직사회를 경험한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무능은 한국 공직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교과서적으로 보면, 공무원은 공익의 수호자로서 상관의 위법하거나 부당한 명령은 양심에 따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위법하거나 부당한 명령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권한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 행위 혹은 재량 행위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집권 세력의 지시를 받고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 입장에서 그 둘을 완벽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고 구분의 기분 역시 명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업무 지시에 각각의 공무원 개인이 그 위법 여부를 일일이 따지다 보면 아마 행정은 마비될 지경에 이를 것이다. 공직사회에서 항명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문화는 그 나름대로 행정의 민주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문화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도 차장의 부당한 지시에 선을 그었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 는 이유로 서류철을 얼굴에 맞았던 기억이 있다. 팀장은 나를 따로 불러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는 말을 전했다.

20250217081020460keaq.jpg 출처: 도서출판 사이드웨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을까?

탄핵 심판에는 주로 고위 관료들이 나온다. 공직 사회에서 주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이다.

위계서열이 분명한 공직 사회에서, 누군가는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또 누군가는 그 지시를 이행해야만 한다.

작가의 다음 진술은 헌재나 국회에서 보이는 고위공무원의 모습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듯 하다.

고위공무원은 정책을 직접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증인은 모두 14명이지만, 개인에 대한 공격은 일부에게만 집중되었다. 지시를 따르지 않았거나, 과정 자체를 폭로하는 사람에게 ‘조직’이 내리는 벌이 아닐까.

사회 초년생 때, 업무상 민원, 내부 감사, 소송이 빈번한 부서에 배치되었다. 선배들이 가르쳐 준 팁이 생각난다. “업무 일지에 무조건 적어. 그래야 네가 산다.”

노한동 작가의 말처럼, 세상은 공무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키는 대로 했다’ 는 말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지시를 완전 거부할 수는 없지만, 내가 했거나, 해야 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을수록, 더 자세하고 세밀하게 기록을 남겨야 한다. 문제 발생 시 상급자가 애매한 단어를 사용해 발뺌할 경우에 대비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최근 논란의 중심인 체포명단 메모도 공직사회의 이런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항명할 수 없다면,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하게 된다. 지시를 충실히 따르지 않거나, 자리를 피하거나.


수습 사무관으로 문체부에 임용된 작가는 출판과에 배치되었다. 그는 동료에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를 추천하며 “올해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군 입대 후, 그는 아찔한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소년이 온다>는 지원 사업 배제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시점에 그는 스스로 질문한다.

“만약 내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블랙리스트에 따라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요령 있게 상황을 회피한 공무원들도 많았다. 일부러 한직으로 발령받거나, 휴직 등을 적절히 활용해 해당 보직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제 막 부서 배치를 받은 신입 사무관은 그런 요령을 부리기 어렵다.


그의 다음 고백은 ‘부당한 지시’ 앞에서 고민하는 공직자에게 울림을 준다.


내가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입대 시기에 따른 행운 덕분이었다.

나 역시 몸을 사리기 위해 휴직을 활용한 적이 있기에,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집행된 후, 경호처 안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일부는 연차를 사용하거나 자리를 비우는 방식으로 '소극적으로 저항'했고, 취재진 등 외부 세력에 도움을 청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누가 이런 사실을 유출했는지 색출하는 작업이 뒤따랐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공공의 효율성인가

올해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의 핵심 정책인 ‘정부 효율화’ 는 맹렬한 속도로 강경하게 추진되고 있다.

국제개발처(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를 비롯해 다수의 기관이 문을 닫거나, 대규모 감원이 이루어지고, 지원 사업 예산이 삭감되고 있다. 2월 중순 기준으로 약 1만 명의 직원이 해고통지를 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기구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가 거주 중인 DMV 지역(워싱턴 DC, 메릴랜드, 버지니아 일부)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2025년 1월에만 평소보다 다섯 배 많은 집이 매물로 나왔다고 한다. 해고된 공무원들은 당장 출근을 금지당한 채, 자신의 직업과 기관의 생존여부에 대한 결정을 불안 속에 기다리고 있다.

특히 씁쓸한 점은 해고된 다수의 공무원이 ‘수습 직원’이라는 사실이다. 정작 공공의 비효율성을 고착화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태업을 일삼는 이들 대신, 이제 막 책임감과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임용 1년 미만의 수습 직원들이 절차가 간단하다는 이유로 주된 해고 대상이 되고 있다. 태업 직원들은 주로 근속연수가 오래되었지만, 더 이상 조직에 기여하려는 의지나 동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해고 바람’이 과연 진정으로 공공의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해고가 국가 안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올 2월 해고된 400명 중에는 국가핵안보관리청(NNSA: National Nuclear Security Administration)에서는 국가 원전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뒤늦게 이들 전문가에 대한 해고 요청이 철회되었다고는 하지만, 다시 복귀한 이들이 업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또한, 교통안전청(TSA: Transportation Security Administration)의 수장이 경질되고 항공보안 자문위원회가 해체된 후, 1월에 연달아 발생한 항공기 사고와의 연관성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심화될수록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면피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의 후반부의 문장이 떠오른다.

공직에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을 뽑아도 결국에는 바보가 된다.
아니,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된다.


나라를 뒤집어 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 고 말하는 사람이 국군통수권자로 있는 나라, 거슬렸던 사람과 조직을 없애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나라에서, 그들이 꿈꾸는 ‘효율적인 정부’ 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공공의 효율성을 내세운 정책들이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체제 순응적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지는 다시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무능이 제도화되는 것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021년부터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기고중인 글을 모았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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