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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지원 트랙을 신설하라

돈을 주고 시간을 쌓는 것에서  시간을 믿어주고 돈을 주도록!


문화예술계의 1, 2월은 비수기다. 단체에서는 지원사업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 작업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극장에서는 대관 일정이 헐렁한 시간을 활용하여 한 달여간 정기 점검에 들어간다. 반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CES(국제전자박람회)는 한 해의 기술 경향을 연초부터 전시하고 공유하며 시장을 견인한다. 2020년에  ‘모빌리티 예술, 인공지능 예술, 그리고 예술생태계를 위하여’ 라는 글을 쓰며 언젠가 문화예술이 테마가 되는 CES의 등장을 바랬는데 4년이 지난 올해 문화예술분야에서도 브러쉬씨어터의 이길준대표가 참가하고 KOCCA공동관에선 문화기술을 기조로 운영되기도 했다. 문화부의 비전인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가 실현되기 위해선 AI를 비롯 기술이 모빌리티와 함께 다양하게 융합해야 확장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한편, 국내에서 규모가 작지만 의미있는 포럼이 지난 1월 9일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청(SAPY) 그레이홀에서 열렸다. 우리나라 축제감독으로 손꼽히는 스무명의 축제감독으로 구성된 한국축제감독회의에서 연 겨울정례포럼이었다. 그동안 축제가 열리는 지역마다 돌아가며 축제 프로그램 네트워크 일환으로 정례 포럼을 열어왔는데, 올해는 축제가 열리지 않는 1월에 타 기관의 지원 없이 감독들의 회비만으로 독립적으로 처음 열었다. 포럼을 기획한 윤성진(한국문화기획학교 교장)축제감독의 말처럼 어느 곳에서도 지원받지 않고 참가비도 받지 않는 포럼, 감독들 회비로 만든 포럼이어서 그럴까?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축제감독들이 저마다 자신이 추진한 축제 사례를 공유하며

마치 축제감독들의 노하우 배틀같은 모양새로 제한된 시간 안에 축제의 전략과 성과를 나눴다. 축제감독들이 즐겁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만큼,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전국의 많은 기획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모였다.


기획부터 발제, 토론, 진행까지 모두 축제감독회의에서 직접 다 하니 왠지 모를 연대감과 친밀감에 분위기도 더없이 좋았다. 특히 지원금을 받아서 하면 뭔가 알맹이 없이 겉만 핥는듯한 여느 포럼과 달리 축제감독 회비로 마련한 자리라 지역소멸을 고민하고, 공동체의 부재를 축제를 통해 일궈보고자 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의 생생한 사례가 전해져 가슴이 뜨거워지기까지 했다.


특히 그 가운데 내게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는 류재현감독이 발표한 전라북도 남원 요천 페스티벌 사례이다.


지역축제니만큼, 지역 청년들로 이뤄진 청소팀과 일을 했다. 정해진 과업과 계약대로라면 그들은 축제 현장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임무만 완성하는 용역사에 머물기 마련인데, 지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지역 청년으로 구성된 그 팀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남원의 여름을 즐기는 방법을 그들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알리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역량이 검증 안 된 지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과 의심 어린 시선에 멈칫할 수도 있었지만 류감독은 ‘좋아~해 보자구’ 흔쾌히 동의했고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처럼 그들을 믿어준 신뢰의 청년들은 신나게 남원축제SNS 활동까지 펼쳐 젊은이들이 호응하는 축제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윤성진 감독이 세종시 축제사례를 발표하면서 던진 한 가지 제안이다. 전국적으로 600여 개가 넘는 지역축제가 있고 축제예산은 공공 대 민간 예산 비율이 8 : 2 일 정도로 공공지원비중이 크다. 근데 언제까지 지역축제 예산 배정 기준으로 관람객 수나 프로그램 및 근거나 기준이 불명확한 관광 경제 효과 등을 삼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이에 대해 그는 축제를 준비하며 공들인 시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지원금을 분배하는 해외의 펀딩방식을 잠시 짚었다.


내가 미루어 짐작할 때 축제 계획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프로그램 숫자만 화려하게 늘어놓은 것보다는 이제 그 축제가 공들인 시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지원금을 분배하는 방식이 생길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축제를 위해서 그동안 지역주민들과 기획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얼마나 다양한 지역을 리서치하고 동네와 동네의 장소를 발굴해 내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공을 들였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해 보고 그 과정을 통해 지역 내 사람을 키울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축제예산을 지원하는 새로운 기준을 삼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거버넌스를 구성하였는지 등을 점검하는 지표와 다르지 않은데 거버넌스라는 정책용어가 정치적으로 소비되고 있으니 그 대신 ‘시간과 사람’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24년 가을 축제를 위해 가을축제 사업계획만을 기획해 유수한 용역사에 의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23년 축제 평가부터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피드백을 나누고 새로운 축제를 만들기 위한 지역민들의 의기투합 및 지역 역사부터 문화자원의 발굴, 스토리텔링 등의 준비과정 속의 지역상인과 지역 예술가간의 네트워크 등 발품을 팔고 밥을 같이 먹고 막걸리도 한 잔 기울이는 곡진한 시간을 존중하며 그 시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믿고 지원하는 트랙을 신설해 보는 것이다.


지역 축제의 자생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선 어느 지역의 축제든 비슷비슷한 클리셰로 가득찬 사업계획에 따라 나눠 주기하는 것보다 축제 준비를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고, 얼마나 많은 지역 주민들이 서로 만나며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축제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상상을 하였는지,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기획사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작성해주는 계획서보다 지역민들이 워크숍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지금에 걸맞게 고쳐내어 다시금 프로그램화하려는 노력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축제 지원 문화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


지역마다 예산을 얼마 유치했다는 정치인의 현수막은 더이상 자랑이 아니다.

소소하지만 송알송알 싸리잎에 맺힌 은구슬처럼 앞집 뒷집의 이야기로, 웃마을 아랫마을의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민담으로 우린 더 다정해지는 기획을 할 수 있다.


인구소멸의 지역에선 예산이 얼마 내려왔다는 정보에 귀가 커지는 투기성 예산 사냥꾼보다는 사라지는 지역 문화유산을 안타까워하며 지키려고 하고 오래 사신 어르신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귀담아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쓰는 지역 일꾼들이 더 소중하다.


마침, 경기도에서는 유명인사들이 즐겨 모이는 신년인사회 대신에 지난해 성과를 펼치고 올해 계획을 예술인들과 지역민들이 다함께 공유하는 경기공연예술페스타를 경기문화재단과 용인문화재단이 협력하여 열었다.

세계국제공연연맹인 ISPA도 공연예술인들의 비수기인 1월에 공식회의를 연다.

축제감독회의를 시작으로 경기공연예술페스타까지 우리나라에서도 1월 벽두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력이 포착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3년 동안 기회를 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중장기지원사업인 ‘창작산실’이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시간이 켜켜이 쌓인 덕분이다. 지원금을 주고 시간을 쌓는 트랙이 있다면 또 다른 트랙으로 그동안 준비해온 시간의 과정을 보고 지원해 주고 트랙도 신설해 볼 만 하지 않을까? 문화예술씬에서 비수기인 1~2월의 다양한 활용과 사업비 개념이 아닌 시간의 가치를 믿어주고 그 취지에 연대하며 협력하는 실험적인 지원트랙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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