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올라오는 분노로 내 안의 엄청난 폭력성을 확인할 때에는 스스로가 놀라기도 하고, 우울하고 슬픈 마음이 들어오면 다시 우울증을 겪었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불안감이 같이 몰려오기도 한다.
살아온 유년시절과 만들어진 성격들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육아와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안다.
마음이 불안하게 살아왔는데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애착을 주고 싶은 나는, 그래서 육아가 많이 어렵다.
아직은 감정을 바라보는 게 쉽지 않아 그것들을 관찰하며 흘러가게 두고 싶은데 여전히 쉽지않고,
그 감정에 동요되고 집착하는 날에는 행동과 말이 같이 거칠어져 아이들에게 감정을 쏟아붓는 날이 많기도 했다.
체벌을 하지 않기 위해 생각으로는 내 아이를 여러 번 죽였다는 어떤 엄마의 고백을 들은적이 있다.
그만큼 육아의 버거움이 느껴지면서도 내 아이에게는 폭력을 절대 행하지 않겠다는 그 엄마만의 다짐과 각오가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상이 높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게 될리가 없다고 했다. 사람 쉽게 변하지않는 거라고 했고, 그냥 살아온 대로 키워도 된다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나보고 애쓴다고 했고, 누군가는 나에게 노력하는게 대단하다고 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믿는가보다는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육아하는 엄마인생에서 혼자 느끼는 막막함은 덜어질 수 없는 걸까.
고민이 많아질 때쯤.
직접 엄마들의 경험과 지혜를 나눌 시간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수요일 전업엄마들을 대상으로 3주동안 마음을 듣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임이 이틀전에 끝났다.
3주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아닌 오히려 에너지가 솟는 일임을 다시 확인하기도 하고, 그 수요일을 위해 어떤 질문과 말을 해야할지 고민을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오늘의 자신이 얼마나 아이들과 고군분투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남편과의 대화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이의 행동에 얼마나 내 마음이 요동쳤었는지 자신들의 불안을 이야기했다.
각기다른 모양의 불안과 상처, 지난 감정들에 대해 스스럼 없이 이야기 하는 시간이 되었다.
평가와 비난이 아닌, 그럴 수 있다는 그 말에, 나도 그랬었다는 그 말에, 엄마들의 마음이 포개지고 오늘 하루육아로 지쳤던 마음이 반쯤은 덜어지는 기분을 서로가 나눈다.
누구 하나 [당신의 감정이 민감하고 예민하다]고 타박하지않고 [당신의 감정이 그럴만했다]라고 말해주는 그 랜선모임에서 서로가 마음의 상처를 부축해주는 전우가 된다.
매 시간 예정된 시간을 지나 모임이 진행이 되었는데 자정이 다되는 시간에 세명의 아이들이 자지 않아도, 코로나 격리중에도, 그날 하루의 풀 스케줄을 소화하고도 그 시간까지 함께 하는 엄마들을 보면서엄마들이 얼마나 육아에, 그리고 자신의 엄마인생에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70살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질문이 막연하고 상상이 되지않아 고민이 많았다고 했지만 모두 다 편지를 쓰고 읽으며 의미가 남달랐다고 말해주었다.
각자 70살의 내 모습, 나만의 할머니를 상상하며 지금의 나에게 쓰는 편지글에서 서로의 이름만 바꿔넣어도 될 정도로 편지의 내용이 거의 비슷했다는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어쩌면 인생을 70년정도 살면 삶의 의미가 거의 비슷해지는건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편지를 읽고 듣는 동안 내 마음과 비슷한 내용의 편지글로 받은 위로와 감동으로, 모임이 끝나고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지금의 엄마인생에서 겪는 나의 힘듦이 유년시절 상처를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엄마]인생을 진심으로 살아가기에 느끼는 일임을. 그러니 좀 더 편하게 살아가도 되겠다는 지혜를 얻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