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이중성
오늘따라 유독 일상이 부대꼈다. 사실 이 부대낌은 두 아이가 번갈아 아팠던 일주일 전쯤부터 조금씩 쌓여온 것 같았다.
사건은 어젯밤에 터졌다. 힘들고 지친 내 마음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운동을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화가 치밀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았을 그 뒷모습이 왜 이토록 서운하고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나의 패턴은, 마음이 부대끼면 늘 몸에 신호가 온다는 것이다.
며칠째 가시지 않는 두통, 바닥난 의욕. 결국 휴일을 핑계 삼아 오늘 반나절을 침대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니다 못한게 아니라 나오기 싫었던 것 같다. 기분나쁨을 은근히 티내며 무기력하게 누워 남편에 대한 야속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서운함의 실체는 남편을 향한 비난의 크기보다, 내가 나를 전혀 위로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나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마음이 변해갔다.
물론 사람은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진 존재다. 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는 법을 잊었을 때, 타인의 평범한 루틴은 내면의 결핍을 건드리는 거대한 자극이 된다. 어제의 내게는 남편의 운동 루틴이 바로 그 자극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방임한 채, 그 결핍을 채워줄 책임을 온전히 남편에게만 의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감정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세운다는 것을 안다. 삐진 마음으로 남편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 은근한 수동공격적 태도를 선택하며 나는 잠시나마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외롭게 고립시키는 감옥이라는 것을 오후에서야 깨달았다.
또한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들과 노는 남편을 보며 묘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만든 감정의 늪은 타인에게 타격을 주기보다, 결국 나만을 가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누가 구해주길 기다리지지 말고 내가 스스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안다.
나는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마음을 정리할 때 주변을 청소하는 나의 오랜 습관은, 어쩌면 어질러진 마음을 정리하고 바로잡는 의식같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평온함이 찾아왔다. 늘 그랬듯 일상은 안온해 보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마음이 든다. 이제는 부대끼는 마음이 들 때 그것을 밀어내기보다 [내가 요즘 힘들진 않은지, 나 스스로를 먼저 돌보고 살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겨 둔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읽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엔 익숙하면서, 정작 나의 욕구는 먼지보다 작게 여기던 나의 오래된 습관.
오늘 그 낡은 패턴을 또 확인했다.
실망스럽진 않다. 중요한 건 방향성이고, 알고 나아가면 그만이다.
오늘도 애썼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