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와 함께 격리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코로나에 걸리는 순간을 자주 상상했다. 혼자 방에 격리되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드라마들을 집중하여 보는 나의 모습과 남편에게 아이들을 다 맡겨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까지도 상상해 보았다. 방 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엄마를 찾지만 아빠가 엄마는 코로나에 걸렸다며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는 구체적인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상상과 다르다. 그것이 육아에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육아를 하고 되돌아보니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어쩌면 늘 계획대로 되었던 것 같다. 이번 코로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격리를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아프거나 수술을 하면 잠이 많이 오는 편이었다. 첫 째 제왕절개 때도 마취약 때문에 잠을 오래도록 자는 바람에 수술의 아픔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번 격리기간에도 그랬다. 잠이 쏟아져 내렸다. 잠이 쏟아지다 못해 발목까지 흘러내리면 아이들에게 영상을 틀어주고 침대 위로 흘러내려 잠이 들었다. 그 와중에 음식재료가 떨어지면 오후 6시가 되기 전 혹은 자정이 넘어가기 전 번쩍 눈을 떠서 다음 날 먹을 과일과 재료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이럴 때 새벽배송 시스템이 정말 감사했다. 끼니는 어찌나 빨리 돌아오던지. 컨디션 좋은 아이들은 끼니뿐 아니라 간식도 달라고 성화다. 마치 나를 깨우는 것이 자기들의 소임인 양 단잠을 깨워댄다. 곧 다가올 이사로 인한 짐들과 다 풀지 못한 여행가방을 넘어 다니며 그나마 집에서 가장 깨끗한 (어쩔 수 없이 손이 닿아야 하니 깨끗할 수밖에) 주방으로 가서 아이들 밥이나 간식을 준비해주고 나면 또 흘러내리듯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거기에 남편은 밤만 되면 어김없이 열이 39도를 넘었다. 아이들과 함께 기절하는 나에 반해 남편은 밤마다 오르는 열로 새벽에야 잠들어서 중천에야 잠에서 깨었다. 오전 아이들 당번은 어김없이 덜 (?) 아픈 내가 되었는데 그 순간엔 아픈 남편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러다 컨디션이 좀 괜찮은 날이면 여행가방 정리와 밀린 빨래와 청소를 했고 무리하고 나면 온몸이 힘들었다.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격리 기간의 끝이 보였다. 중간에 어머님의 산타 배달이 두 번이나 있었다. 배달 가방에는 직접 만드신 잡채나 식료품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식단걱정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격리가 끝나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려니 코로나가 신경 쓰여 격리해제 며칠 전부터 자가진단을 했다. 그리고 첫째의 선명한 두 줄은 격리 하루를 남겨두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을 웨건에 태우고 병원에 가서 코로나 진단을 받고 다시 일주일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일을 해야 하니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을 끌고 회사로 갔고 나는 다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격리육아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아이들 방학기간과 주말이 겹쳐 억울한 마음이 조금은 달래졌다. 두 번째 격리가 이어지 던 어느 날 밤, 남편이 문득 그날 본 뉴스 얘기를 꺼냈다. 아마도 누군가 사망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남편은 현재 어떤 마음이 들고 어떤 일이 있던 지간에 '살아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죽을병을 겪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이 말이 마음을 울렸다. 한번 아파보니 투정 부렸던 하루가 소중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허망하게 간 그 뉴스를 듣고 나니 아이들과 씨름했던 지난 2주의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일까? 입버릇처럼 말하던 '일상이 소중하다'라는 말에도 그 깊이가 무한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각자 다른 깊이로 일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밀도 높고 생산성 좋은 삶이 아닌 충만한 일상을 각자 다른 깊이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남편과의 대화로 (짧아 보이지만 긴 대화) 우리만의 코로나를 겪은 듯하다. 격리 기간 동안 한 순간도 맘 편히 쉬지 못했고 코로나는 생각보다 아팠지만 생각보다 서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코로나도 함께 겪은 가족사이. 격리기간에 새해를 맞은 우리 가족. 2023년 액땜은 코로나가 다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