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아닌 '풀'의 기억

김금숙 <풀>

by 이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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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프리모 레비의 <휴전>이 떠올랐다. 2차 대전 당시 수용소 수감자였던 저자가 귀향하기까지의 여로를 그린 이 저서는 폭력과 광기의 사건이 어느날 갑자기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시시켰다. <휴전>의 화자가 자신의 고향으로 향하는 그 길 사이사이에서, 전쟁이라는 폭력의 공포가 남긴 상흔들이 그를 습격해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림자처럼 늘어져서 끝없이 그를 괴롭혀갔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는 '종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폭력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근원을 마주보고, 끝없는 경각을 가져야 한다.


김금숙의 <풀> 역시 귀향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인상을 준다. '위안부'라는 역사의 상처에 대해 우리가 논할 때에 우리는 그 시각, 그 때,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지독한 폭력의 순간만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기에 제국주의 일본이 몰락한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함께 사라졌다고 납득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해방의 그 날이 도래했음에도 폭력은 끊임없이 이어져간다. <풀>에서의 폭력은 '특정한 집단'의 무력과 강압으로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라는 배경 안에서, 개개인의 힘으로는 도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어떠한 공기처럼 묘사된다. 그렇기에 <풀>은 과거의 이야기라고 한정지을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로, 그리고 '여성 서사'로 읽히게 된다.


<풀>은 그 제목 그대로 끊임없이 '풀'들을 컷의 프레임 안에 그려넣는다. 이 풀들은 우리가 소위 생각하는 생명과 활력의 원천과는 다르다. 풀을 묘사할때의 가장 대표적인 수사인 '녹음'은 이 작품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단지 이 작품이 흑백의 수묵화로 구성되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풀>에서 묘사되는 모든 풀들은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검은 색으로 태어났다는 듯이 새카맣게 묘사되어 있다. 이 새카만 풀들은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도 구석에 아스라히 놓여있기도 하나, 때로는 전면으로 묘사되어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꼿꼿하게 수직으로 활기를 띈 풀은 찾기 어렵다. 풀들은 바람에 휘날리듯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이지러져있는 형상이다. 또한 <풀>의 풀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바닥에서 솟아난 이름 모를 풀 부터, 나무의 줄기에서 뻗어나오기 시작한 풀까지 그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없는 다종의 새카만 풀들이 페이지의 곳곳에 피어나있다.


이옥순 여사의 일대기를 쫓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이는 <풀>의 모든 켠에는 풀들이 존재한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쉼없이 등장하는 풀들은 이옥순 여사의 행로의 한켠을 조용히 지켜간다. 색을 가지지 못하는 그들은 풍파가 불어오면 대항하지 못하고 쓸리듯 눕어버리는 것이다. 이옥순 여사의 삶은 그리고 고백은 이러한 이름 모를 그리고 색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풀들을 대표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름을 가지지 못한, 그리고 색을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의 흔들림에 쓸려버리는 그 풀들이 일제라는 사회의 폭력에 휩쓸린 이옥순 여사의 삶과 닮았음을 상기하자면, 그와 같은 생을 겪었음에도 드러나지 않은 혹은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이들에 대한 묘사처럼도 읽힌다. 결국 <풀>에는 그 '풀'들이 있기에 이 서사가 단 한 명의 삶을 조망하는 서사에서 끝나지 않고 시대를 살아간 더 많은 이들의 서사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풀들은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졌던 색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 풀들은 처음 등장하는 그 때부터 이미 검은 색으로 물들어 그 형상을 드리운다. 그렇기에 <풀>은 우리네가 겪은 시대의 아픔에서 끝나지 않고 여성 서사로까지 발돋움한다. 그 수많은 풀들이 무언가를 대변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같은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일 것이 자명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나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옥순의 모습은 그대로 색을 가지지 못한 검은 풀과 오버랩된다. 원하는 색을 얻지 못하는 그 풀들, 그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색을 선택하지 못했던 그 여인들의 모습 그 자체다. 그리고 가계를 위해 '수양딸'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받아야 했던 옥순의 모습은 바람이 부는대로 자신의 몸을 한없이 꺾어야 하는 풀들과 그대로 등치된다. 그 뒤로도 하나의 장(章)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다 세차게 그 몸을 흔드는 풀들의 모습에서 폭력과 광기로 뒤덮힌 시대에 의해 고통받는 옥순의 모습을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작가 김금숙이 가지고 있는 심려깊은 균형감각이 읽힌다. <풀>은 역사의 폭력을 불러일으킨 특정 대상을 향해서만 분노를 쏟아내는 형태의 작품이 아니다. 그는 일대기라는 작품의 형식을 통해 이 모든 비극의 근저에 당대의 의식 그 자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표면화 한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질문이 되어 현대의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아직도 그와 유사한 폭력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 것일까? 우리 시대의 '풀'들은 본래대로의 녹음을 되찾아가고 있을까? 역사의 기능이 현재의 우리로 하여금 더욱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작가 김금숙의 질문을 가장 '역사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풀>을 읽는 과정은 가시밭길 같았다. 페이지 하나하나가 마치 만근같은 무게감을 주어 쉽게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건의 무게감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에 켠켠이 그려진 풀을 발견할 때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한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작가 김금숙은 우리의 동력이 떨어질 때 즈음에 페이지 위에 꽃을 올려놓는다. 검은 나무와 풀 사이에 수놓아진 그 꽃들은 비록 화사하지는 않으나 일시적으로 마음에 휴양을 선사한다. 아마도 이 꽃들은 작가 김금숙이 가진 사려깊음, 그리고 그가 놓치지 않는 희망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 작가 김금숙은 세차게 흔들리는 풀은 그릴지언정 뿌리가 뽑혀 바람에 날리는 풀은 그린 적이 없다. 모든 풀들은 바닥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모진 바람에도 견뎌가고 있었다. 그리고 냉혹한 풍파가 거치면 그들은 자신의 힘을 내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위안소에서의 옥순은 자신의 죽음을 갈망할 때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죽지는 않아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절망하지 않는 것, 어디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것. 그래서 먼 훗날에 꽃이라는 삶의 희망을 피울 수 있게 되는 것. 작가 김금숙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의 인상에 그 잎파리가 검게 묘사되지 않은 하나의 꽃이 남아있다. 바로 9장 '연길 시내로'에 나오는 민들레다. 일본군들의 폭력을 증언할 때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민들레는 사실 이 때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7장 '순결'의 첫 장에는 구둣발에 짓밟히기 직전의 민들레가 묘사된 하나의 컷이 그려져있는데, 이 두 민들레는 아마도 하나 일 것이다. 말하자면 7장의 시작에 짓밟힌 이 꽃이 9장에까지 시들지 않고 숨쉬며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그 많은 폭력들은 이 꽃을 사멸시키지 못했다. 도리어 꽃은 더 깊은 땅까지 뿌리를 내리고 생의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그리고 현재까지 살아남아 이옥분 여사의 곁에서 그 꽃씨를 공중에 흩뿌리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풀> 256p.)


작가 김금숙에게 이 모든 고난의 역사는 푸르른 잎을 생성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차디찬 겨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풀>의 마지막 장면은 겨울을 이겨낸 나무에서 꽃봉오리가 오르며, 그 옆에 이옥순 여사의 환한 미소가 담겨져 있다. 책을 펼치면 나란히 있는 두 '얼굴'은, 책을 덮으면 서로 마주보게 된다. 작가 김금숙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두 개의 '얼굴'이며, 이 둘은 곧 하나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얼굴'은 작가 김금숙이 이옥순 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내린 하나의 인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을 '꽃'이 아닌 <풀>로 결정했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 것이다. 설령 꽃이라는 희망이 있을 지언정,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에 그 색을 갖지 못했던 풀들, 차디찬 대지에 뿌리를 내려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운 풀들, 앞으로의 세상에는 본래의 녹음을 되찾아야 할 풀들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평창 올림픽 성평등 센터의 총괄 책임을 맡은 김성숙 수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세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표현하는데요. 저는 그 표현에 대해 반대합니다. 상처는 씻어낼 수 있습니다. 상처를 이겨내고 더욱 건강하고 멋있게 살아가는 여성을 저는 많이 보았거든요." 작가 김금숙이 본 그 꽃은, 그리고 그 꽃을 피운 풀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 본 글은 2018년 3월 17일에 부천 만화박물관에서 개최된 [김금숙 풀 원화전]의 리플렛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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