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라시 다이스케 - <마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저작 중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최근에 영화화 된 <리틀 포레스트>일 것이다. 미묘하게도 많은 이들이 이가라시의 <리틀 포레스트>로부터 힐링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 것은 영상화 된 작품들, 특히 모리 준이치의 4부작 영화 <리틀 포레스트>(영화는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으로 2회에 나뉘어 상영되었지만 엔딩 크레딧의 여부를 통해 해당 연작이 4부작임을 알 수 있다.)가 한국에서 소위 ‘힐링 영화’로 인지된 탓이다.
도심의 삶에 지친 청년들은 이 ‘시골로 내려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영화를 일종의 대리체험으로 인지했고 덕분에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4부작은 ‘힐링 영화’라는 추천에서 단골처럼 기거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가 힐링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원작의 이야기를 4개의 계절로 분절시킨 뒤, 마지막 제의(祭儀)의 장면을 통해 각 분절의 순간들을 재환기시킨다. 덕분에 원작인 이가라시의 만화에서 얼핏 볼 수 있었던 순환생태에 대한 인간의 경의라는 테마가 훨씬 단단해졌다. 그런 면에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보다 더 노동의 강도나 표현이 보강되어있기도 한데 어째선지 ‘힐링 영화’라는 태그를 붙일 때에는 이런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그런 탓에 영상화된 일련의 <리틀 포레스트>를 먼저 본 후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까지 도래한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마저 ‘힐링’의 포인트를 찾으려 든다. 물론 이가라시의 텍스트에는 힐링으로 판독할 그 어떠한 단서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모리 준이치의 영화 역시 심적인 안위가 목적이 아니었다고 하나, 다이내믹한 노동의 뒤에 가지는 식사의 시간에서 황홀함을 읽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허나 이가라시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에는 그런 종류의 환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농촌에서 홀로사는 여성의 담백한 시간을,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작화로 쭉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감상들을 쉽사리 찾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이가라시의 목적이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밝히는 증거이지 않나 싶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는 말하자면 에코이즘 판타지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서사보다는 작화의 힘이다. 한때 ‘볼펜으로만 작화를 하는 작가’(정확히는 이번 글에서 다룰 <마녀>가 그렇게 작업되었다.)로도 이름을 날린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직선과 각면을 최대한 배제하며, 하나의 컷 안에 인물과 사물 그리고 자연을 특별히 구분하려하지 않는다. 모든 선은 완연히 닫혀있을 때도 종종 있지만 보통은 완결된 형태를 이루지 않아, 컷 안의 모든 사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 특히나 작은 컷들 보다 양면을 꽉 채우는 강렬한 전면 컷에서 그러한 에너지가 발산된다. 2권 초반의 에피소드인 ‘4월 25일의 두릅’의 이치코가 숲길을 거니는 전면 컷이야말로 이러한 형식의 극치다. 이 컷 안에서 숲이라는 환경과 이치코라는 인물을 정확히 구분하긴 어렵다. 우리가 인물을 의식하지 않고 그림을 슬쩍 넘겨본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 조차 깜빡 잊을 정도다. 이가라시의 작화 안에서 인간은 자연과 일체화 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양을 얻는 이야기지만, 자연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부여하진 않는다. 자연과 맞닿은 곳에서 노동하며 그 결과물로 식(食)을 하는 행위는 순환생태의 일부가 됨을 의미한다. 먹는 행위를 통해 체득한 에너지는 육체에 남는 에너지와 잉여 되어 배출되는 양분으로 이분화 되고 이중 후자는 다시 자연에서의 에너지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이가라시는 농촌에서 생활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자연의 순환계 내부에 뛰어드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작중에 얼핏얼핏 고개를 들이미는 도시에서의 생활은 생태적 삶과 즉시 대비되며, 양자를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들로 인지시킴으로써 자연주의(naturalism)적인 관점이 아닌 생태주의(ecoism)적 시선을 전면에 노출시킨다. 이가라시에게 있어 자연은 우리가 지켜줘야 할, 보호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구축해야 하는 근원적 터전인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가 친화적이며 상호보완적 자연의 경이를 그린다고 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인 <마녀>는 그 대척점에서 이야기를 구축한다. 이가라시의 <마녀>는 '마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딕 호러의 마술적 존재 혹은 핍박받는 타자의 서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연작의 첫 문을 여는 작품 ‘스핀들’이 그나마 우리에게 친숙한 형태의 마녀 - 카발라 등의 신비주의를 주술의 무기로 다루는 마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킬 뿐이다. 한 중동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이교도라는 이유로 이슬람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당한 영국인 여성 니콜라와 신의 계시를 받아 수도로 향하는 유목민 소녀 시랄을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수많은 마도서를 통해 세계의 질서를 깨우친 니콜라는 한때 자신에게 상처를 준 바자르(시장)의 사람들에게 주술을 이용해 복수를 시도한다. 한편 막 자아낸 실과 방직물로부터 신탁을 받은 시랄은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사명을 받은 채 도시의 한복판을 방황한다. 니콜라의 복수는 끝없이 이어지고, 그의 복수가 절정에 달하려는 그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랄은 니콜라와 마주하게 된다. 시랄은 니콜라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여 니콜라를 어둠 속에 삼켜버리고,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이가라시는 니콜라와 시랄의 차이를 ‘언어’의 개념으로 나눈다. 니콜라는 신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화된 비전(秘傳)을 통해 힘을 키워온 마녀이며, 그 언어의 힘을 맹신하기에 세상의 모든 진실과 구조를 볼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문명과 먼 곳에서 자연의 흐름 그대로 따르며 살아온 시랄은 그보다 더 큰 것, 즉 ‘언어화되지 않은 존재’에게서 힘을 빌리는 것처럼 묘사된다. 여기서의 언어는 당연하게도 (서구식의) '문명화된 것'으로 치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둘의 대립은 자연 세계와 문명 세계의 대립이며, 이 결말은 문명 세계에 속하는 이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거대한 영성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니콜라는 정복자와 지배자의 영혼을 자신의 모티프처럼 다루며 바자르의 지하에 수장되어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말하자면 니콜라는 서구적 정복관과 야욕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다. 시랄의 힘에 의해 쓰러진 나콜라가 콘스탄티누스의 수장된 시산 옆에 미러 이미지처럼 봉해지는 장면은 이러한 니콜라의 존재감을 확고히 한다.
이후의 에피소드들에서는 ‘스핀들’의 니콜라처럼 기존 인식의 마녀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대국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히는 밀림의 이야기를 그리거나(‘쿠아푸루’), 문명과 언어에 속박될 수 밖에 없는 영성인 종교계를 마녀와 대립시킴으로써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관점까지 영역을 뻗히며(‘페트라 게니탈릭스’) 문명체계와 자연의 영성이 대립한다는 구성은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다만 마지막 에피소드인 ‘노래를 훔친 자’만은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삼으며 일견 다른 톤을 가져간다. 물론 문명사회에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유일성을 깨달아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세계를 인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아 기존 이가라시의 세계관의 연장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특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비한 여성 치타루는 주인공 히나타의 이름을 의미소로써 해체해 그것이 일종의 축복임을 설파하는데, 이는 언어적 기표가 영성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이야기의 확장이다. 또한 히나타가 자신의 유일성을 인지하는 곳이 육지와 분리된 무인도라는 것 또한 이가라시가 문명사회의 공허함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을 상정하고 있다고 여겨지게 만든다. - 그런 측면에서 <리틀 포레스트>와 상통하는 면도 있다. -
물론 <마녀>는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의 영성을 그리는 작품이나, 결국 탈문명적 삶을 대안적으로 제안하는 점에서 <리틀 포레스트>와 맞닿아있다. 그런 만큼 동일한 관점에서 본다면, 작화를 통해 생태주의적 자아를 표출하는 방식은 훨씬 더 진화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볼펜으로만 그린 것으로 유명한 <마녀>의 그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선들은 모든 사물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으며 <리틀 포레스트>의 숲길 씬과 마찬가지로 전면으로 뻗어나가는 자연의 위력을 묘사할 때 그 위용이 과시된다. 다만 <리틀 포레스트>의 전면 컷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묻어있음을 통해 안락함이 전달되나, <마녀>의 전면컷은 인간의 위용을 상대적으로 위축되게 묘사하는 경향이 늘어난다. ‘스핀들’에서 니콜라를 삼키는 수많은 눈들을 묘사한 컷에서는 아름다움과 경이와 경외와 공포가, ‘쿠아푸루’에서 수많은 숲의 정령들이 나타나고 특수부대원들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연속적인 컷에서는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가라시는 동일한 방식의 작화 위에 다른 서사(<리틀 포레스트>와 <마녀>)를 얹어놓음으로써, 기저의 감정을 완전히 뒤집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만큼 이 두 작품을 떨어뜨려 놓고은 상태로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는 없다. 둘을 하나로 합쳤을 때에 비로소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가진 에코이스트로써의 자아가 명확해지는 셈이다.
<리틀 포레스트>를 지나 <마녀>를 완성한 ‘에코이스트’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연은 언제나 그곳에 있으며,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길 원한다면 보답없이 문을 열어준다.(<리틀 포레스트>)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대상화하거나 정복하려들 때에는 가장 공포스러운 방식으로 대항하려 할 것이다.(<마녀>) 자연은 우리를 품어주기만 하는 무한한 선의가 아니며, 또한 우리가 지켜주겠다고 대상화할 수 있는 작은 존재도 아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그저 문을 열어 달라 요청하고 조용히 그 안에 들어가 귀를 기울이며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다시금 <리틀 포레스트>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이 작품의 자연이 우리를 품어주길, 도회에서의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었을까? 결국 답은 <마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힐링의 도구’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언어화된 대상화의 결과물이다. 이가라시는 <마녀>를 통해,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파멸로 이어져 갈 것임을 강조한다. 만약 <리틀 포레스트>로 마음의 짐이 덜어지지 못했던 독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녀>의 일독을 권하겠다. 물론 이 두 작품을 다시 읽는다고 하여 당장 언어의 세계로부터 분리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회복의 장소를 다시 설정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이가라시는 말하고 있다. 자연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 본 글은 디지털 만화 규장각 리뷰 페이지( 링크 )에 게제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