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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ug 16. 2022

패럭시스의 섬, 제주도!

윤인완, 양경일 <아일랜드>

2019년 11월 18일 인터넷 뉴스사이트 '제주왓'에는 윤인완, 양경일의 만화 <아일랜드>를 소개한다. '만화는 제주도에 대해 짧은 전제를 깔아놓고 시작한다.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본 적없는 대담한 발상.'이라는 내용을 담은 이 기사의 제목은 《만화 '아일랜드' 속 제주는 죽음의 섬 '왜?'》였다. 흥미로운 질문으로 운을 떼는 기사이지만 내용은 '제주도에는 400개가 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는 정도로 대답을 일축한 뒤, <아일랜드>에 대한 홍보로 내용을 마무리한다. 윤인완 역시 단행본 출간 당시의 인터뷰에서 유사한 대답을 했지만('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인 제주도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귀신이나 요괴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이러한 대답이 제주도를 굳이 '지옥의'(혹은 '악마들의') 섬이라고 까지 지칭할 이유로 보기에는 조금 심드렁한 기분이 된다. 이 의문은 단순히 작가적 모티베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환상을 다루는 장르의 세팅으로서 제주도가 어떠한 개념으로 위치지어지는가에 대한 지정학적 의문이다. 말하자면 '제주도는 왜 판타지의 공간으로 설정되는가' 가 더 핵심적인 질문의 요지라고 할 수 있겠다.


제주, 점근축(paraxis)의 세계

비교영화학자 폴 윌먼은 장르로서의 판타지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검증 가능한 과정에 의해 작동하는'실재' 세계와, 이성 및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들의 영역을 벗어나는 사건들이 속하는 초자연적 세계 사이의 경계가 문화 전체 내에 확고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판타스틱'이라는 장르는 이미 근대화되고 이미 합리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에 준해 구성된 세계에서만 발달할 수 있다." (발췌 : 김소영(2000), 《근대성의 유령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이는 판타지의 존재는 근대성이라는 기반 안에서만 발달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근대성이 전근대적 질서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그 근간에서 '환상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츠베탕 토도로프의 저서 《환상성 : 문학 장르에 대한 구조적 연구 The Fantastic : A Structural Approach to a Literary Genre》로부터 기인한다. 토도로프는 전근대적 혹은 초자연적 질서를 다루는 서사를 '경이(the marvellous)'로 정의하며, 근대 이후에 자연적 질서와 마주하게 되는 서사를 '기괴(uncanny)'로 정의하는데 환상(fantastic)은 그 중간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토도로프의 환상 이론을 기반으로 환상성을 연구한 로즈매리 잭슨 역시 자신의 저서 《환상성 - 전복의 문학》을 통해 이러한 구조를 재정립한다. 잭슨은 전근대의 법칙이 실재 작동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서사를 '경이적인 것'으로, 리얼리즘의 기준을 통해 허구적 세계의 텍스트와 '실재' 세계가 동등한 것임을 드러내는 서사를 '모방적인 것'으로 정리한 뒤 두 요소가 혼합된 서사를 '환상적인 것'으로 정리한다. 잭슨은 "환상적인 것은 경이로운 것과 모방적인 것 사이에서 각각 과장된 것과 일상적인 것을 빌려오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환상-판타지-의 위치를 정리한다. 특히 잭슨의 이론에서 흥미로운 구절은 판타지를 '점근축(paraxis)'라는 요소로 정리한 부분이다. 타자로서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항상 렌즈 혹은 거울이라는 투과면을 통하는 것을 전제한 뒤, 투과면으로 발생한 '이미지'와 투과면 사이의 부정확한 공간(점근축)에 판타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잭슨은 환상적인 것이란 "'실제적인 것'(대상)도 '비실재적인 것'(이미지)도 아니며, 그 둘 사이의 어디엔가 불확정적으로 위치"한다는 문장을 통해 판타지의 지리적 위치를 정리한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판타지는 근대와 전근대, 자연과 초자연, 대상과 이미지라는 두 축의 사이에 걸쳐진 불확정한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대기업 회장의 딸이자 서울이라는 근대 공간의 인물인 '원미호'가 제주에 진입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원미호가 전근대적 질서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 원미호는 그 유명한 대사 '지옥의 섬 제주도'를 내뱉는다. <아일랜드>에서 제주는 전근대의 공간으로, 근대의 인간들이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 충돌이 발생하는 땅으로 설정된 셈이다. 흥미롭게도 <아일랜드>는 대부분의 '퇴마'라는 행위를 그린 어반 판타지 만화와 달리, 그 어떠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지 않았지만 부자로 설정된(=근대의 법칙을 조종할 수 있는) 원미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런 원미호가 자들-정체를 알 수 없지만 밀교의 주술을 쓰는 반, 가톨릭 사제로 신성력을 이용하는 요한-은 모두 전근대의 질서 내부에 위치하는 인물들이다. 그 뒤를 이어나가듯 전근대의 질서를 가진 인물들은 지속적으로 제주라는 세계에 진입한다. 1부의 대미를 장식한 '또다른 고향' 에피소드에서도 역시 흑마술, 밀법, 강령술을 사용하는 일본인들이 제주로 진입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시점이 되면 제주는 초자연적 질서가 자연적 질서보다 앞서는 불온한 공간이 된다. 특히, 윤인완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으로 '인과성의 법칙'을 거론한다. 이 인과성의 법칙은 주술적 영역의 인과는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는 절대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단순한 개념의 전개에는 시간도 공간도 영향을 주지 않으며 제주를 주술적 결정론의 세계로 둔갑시킨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1년 발간된 <지금, 만화> 10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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