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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ug 16. 2022

환상과 신비가 가득한 세계!

만화 <메이코의 놀이터>와 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우리-어른들-는 아이의 시선 안에 환상이 있음을 꿈꾼다. 그런데 어른과 아이의 시각은 정말 그만큼 다른가? 스티븐 스필버그는 <E.T.>를 연출하며 카메라의 기본 레벨을 어린이의 아이 레벨에 고정시켰다. 그 결과, 세계는 더 커보이고 어른들은 더 우악스러워졌다. 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보는 세계 자체가 달라지진 않았다. 아이들과 조우한 외계의 존재는 여전히 어른들의 시야에 잡혔다. 물론, 그 작고 유악해보이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대등한 관계로 보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보는 행위'는 해석을 수반한다. 즉,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눈을 통해 얻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것, 시각의 데이터를 도해해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일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시선에 환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배경에는, 아이들의 해석의 방법이 어른과 다를 것이라는 추측에서 온다.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어른보다 적은 데이터를 해석에 이용할 수 밖에 없다. 그때 발생하는 커다란 빈 공간을 '아마도' 상상으로 채울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와 '환상'을 쉽게 연결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환상와 나라와 접촉하는 서사는 지나칠 정도로 많다. 그 환상을 구태여 믿지 않는 어른 캐릭터가 등장하는 건 이제 클리셰의 영역이다. 그 많은 아이들은 환상 안에서 고난을 겪고 지혜를 배우며 종국에는 환상과 이별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른의 상상으로 만든 설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설계' 말이다. 조건을 바꿔보자. 아이들을 불안으로 가득 찬 현실로 밀어넣은 뒤, 환상과 접촉시킨다는 식으로. 예컨데 '부정적인 설계'의 가정이다.


어떤 작품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설계'를 전제한다. 이때 이 설계의 근간에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이 놓인다. 예컨데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미국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홈리스의 문제를, 이사 로페즈의 <호랑이는 겁이 없지>는 치안이 작동하지 않는 멕시코의 현재를 어떠한 베이스로 위치시켜 서사를 작동시켜나간다. 이 '부정적인 설계' 내부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환상과 접촉해나가지만, 환상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현실의 문제들은 적나라하게 도드라진다. 이는 비실재(=환상=어린이의 시각)과 실재(=현실=어른의 시각)의 관계가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한쪽 면의 증가가 곧 반대편의 면적을 늘린다. 이것이 '부정적인 설계'의 핵심이다.


즉 이 설계는 그만큼 시각적이다. 현실의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환상의 표출을 증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환상의 표출'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의 문제가 된다. 비실재의 시각화가 곧 실재에 대한 강한 인지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다. 환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두 개의 세계로 이루어진 <판의 미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하 <판의 미로>)는 1944년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얼마전 내전이 종결되었으며 프랑코를 중심으로 하는 왕당파가 공화파에 승리해 군부에 의한 독재 시대가 도래한 참이다. 세계는 대전의 불길로 혼란스러우며, 공화파는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왕당파는 남아있는 공화파의 레지스탕스들을 색출하고 처형해나갔다. 공화파는 점차 산이나 숲 속으로 몰려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스페인의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되려는 참이다.


멕시코로 망명해온 공화파 사람들의 증언으로부터 이야기를 구성해낸 델 토로는 '오필리아'라는 소녀를 렌즈 삼아 '부정적인 설계'를 꾸려나간다. 아버지를 잃고 군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산 속으로 오게 된 오필리아는 즉시 환상과 접촉한다. 영화는 오필리아의 새 아버지 비달에 의한 레지스탕스 숙청과 오필리아가 보는 환상의 세계를 교차시키며 진행해나간다. 여기서 환상에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은 오필리아가 유일하다. 특이하게도, 영화가 교차시키는 두 세계는 결코 상호 간섭하지 않는다. 요컨데 오필리아가 환상을 보는 씬들이 모두 제거되어도 잔혹한 군부에 의한 레지스탕스 색출이라는 서사는 뼈대를 잃지 않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필리아가 자신의 진짜 세계인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사 역시 현실의 문제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 이는 최후의 순간, 비달과 오필리아가 미로로 뛰어드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하나의 문제로 연결된다.


<판의 미로>가 만든 이 상호 불간섭은 (당연하게도) 방기의 목적이 아니다. 이에 개입하는 건 '본다'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두 개의 서사-두 개의 세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많은 이들이 오필리아가 '보는' 요정의 세계가 진짜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요정의 세계를 '보는' 이는 오필리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오필리아 역시 공화파 레지스탕스의 문제를 결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그를 도와주는 하녀 메르세데스가 레지스탕스의 조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는 결코 이 현실의 문제와 조우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오필리아가 판과 대화하는 순간을 발견한 비달은 판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는 요정의 세계가 오필리아가 만든 환상이라는 것을 정확히 증명해주는 순간일까? 글쎄. 이를 진위의 문제만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비달의 세계(=실재, 어른의 세계)와 오필리아의 세계(=환상, 아이의 세계)는 결코 상호 교차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이는 '보는 행위'의 본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증명일 뿐이다.


<판의 미로>에서 환상은 인물의 외부에 구축된다. 이것이 <판의 미로>가 가진 세계가 두 개인 이유이며, 서로 간섭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오필리아가 보는 환상의 세계가 내면의 투영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의 문제에서 델 토로는 외부적 구축이라는 선택을 밀어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오필리아의 내면으로부터 발생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의 외부에 위치하게 된다. 공간이라는 문제, 여기서부터 파생되는 '공간을 본다는 문제'를 통해 세계는 두 개로 분열해버린 셈이다.


오필리아가 최초로 요정(이라 부르는 커다란 벌레)과 조우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한쪽 눈을 잃은 석상을 발견한 오필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석상의 조각을 맞춰 '두 눈'을 완성시킨다. 이는 명백하게 시각의 회복을 말한다. 이로부터 오필리아의 '보는 능력'은 시작된다. 다만 그 결과, 오필리아는 결코 현실의 문제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여러분이 환상을 믿는다면 오필리아는 진짜 자신의 세계를 볼 능력을 얻게되었다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된다. 하지만 여러분이 환상을 믿지 않는다면, 오필리아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도망쳐온 것이 된다. 그리고 여러분이 목도한 것은 (애석하게도) 비극이 된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정답같은 건 없다. <판의 미로>는 두 세계를 동등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은 영화를 보는 여러분이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정확하게는 영화가 여러분에게 두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이겠지만.


하나의 세계를 둘로 나눈 <메이코의 놀이터>

오카다 사쿠모의 <메이코의 놀이터>는 오사카의 가마가사키(釜ヶ崎. 현 아이린 지구愛隣地区)를 배경으로 1973년 초부터 1974년 초까지의 1년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시작시, 아버지와 함께 막 가마가사키에 도착한 메이코는 한 야쿠자 조직으로부터 사람들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실행하며 생활해나간다. 일반적인 상식도 없고 사람의 감정에도 둔한 메이코는 '자신의 내면'을 보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메이코의 왼쪽 눈을 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메이코의 내면으로 빨려들어가며, 그 안에서 살해당하면 정신이 망가져 죽거나 폐인이 되고 만다. 메이코는 가마가사키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매일 새로운 놀이를 배우며 놀지만, 밤이 되면 그 놀이의 방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해한다.


배경이 되는 가마가사키는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자, 야쿠자 조직 등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오사카 최대의 슬럼가로 알려져있다. 주민에 대한 처우 개선을 목표로 1961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24번의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 중에서는 1973년 6월 14일 실제로 벌어진 21차 폭동이 묘사되고 있다.) 야쿠자 항쟁과 연루되며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메이코는, 정작 일본의 '아웃사이더'들과 조우하며 도리어 자신의 세계를 더 가꿔나가게 된다.


메이코의 초능력은 실재하는 능력이며, 정확한 법칙 하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메이코의 놀이터>는 <판의 미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환상을 작동시킨다. (메이코의 초능력이 '세로로 세워진' 메이코의 왼쪽 눈으로 부터 작동한다는 사실을 <판의 미로>의 석상과 비교해봐도 재밌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환상은 메이코의 내면에 안치되어 있다. 아이 그 자체가 '환상'인 셈이다. 환상을 아이의 바깥에 위치시켰던 방식과는 정반대의 작동법이다. 그렇기에 <메이코의 놀이터>의 세계는 둘로 나뉘지 않는다. 오직 실재 세계(=현실, 어른의 세계) 만이 냉혹하게 머무르고 있다.


단, <메이코의 놀이터>에서는 하나의 세계가 두 가지로 분화된 형국을 가진다. 이 분화의 핵심은 시간이다. 낮의 메이코는 가마가사키의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배우는 소녀이지만, 밤의 메이코는 선택된 살해 대상을 제거하는 킬러가 된다. 재미있게도 <메이코의 놀이터>는 결코 환상을 아이의 시간에서 발현시키지 않는다. 메이코의 초능력이라는 '환상'과 조우하는 것은 모두 어른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상은 오직 '어른의 세계'에서만 작동하도록 유도되어 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1년 발간된 <지금, 만화> 11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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