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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ug 16. 2022

만화는 교실이라는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부조리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손아람은 2014년 8월 한겨례에 기고한 《부조리할 권리》라는 기사에서 '법을 명문화된 조리라고 한다면, 특권은 부조리할 권리다. 모두가 줄을 서야 한다고 배우는 사회에서 즉시 입장할 권리가 바로 특권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관점에서 부조리는, 어떠한 부당함이 발생한 순간이 아니라 그것이 초법화하는 순간에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10대의 부조리'라는 주제를 마주하면 우리는 즉시 학교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전제한 정의에 따르자면 폭력이라는 현상 그 자체 아니라 그 폭력이 조리(=법)의 영향을 벗어남을 감지할 때에 비로소 '부조리의 경험'을 목도하게 되는 셈이다.


근 몇 년 사이 이어지는 연예인들의 학교폭력 가해 폭로는 폭력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가해 인물이 '선망의 대상'이라는 위치에 올라선다는 초법적 현실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당사자가 폭력의 유발자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그들이 아무런 법적 조치/자성이라는 경험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적 이득을 취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작품을 통해 10대의 부조리라는 주제를 탐독하기 위해서는 렌즈의 설치 위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폭력이라는 과정이 아니라 초법화를 둘러싼 맥락에 더 집중해야 한다.


'낭만적 폭력'의 시대를 지나

학교와 폭력이라는 매칭은 만화의 역사에서 굵직한 하나의 갈래로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지난 시대의 소위 '학원액션물'은 부조리의 초법성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 이는 이들의 폭력이 법적 테두리 내에서 머물기 때문은 결코 아닐 것이다. 도리어, 이 만화들이 그리는 학교는 외부와 단절된 주체적인 법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이 장르의 내부에는 '법'이 독자적인 형태로 형성되는데, 이 법을 통해 내부에서 '용인될 폭력'과 '용인되지 못할 폭력'을 구분해낸다. 장르 무협 세계의 협(俠)과 유사한 이 법칙은 부정한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폭력이라는 이분적 세계를 구축한다. 이 내부에서 정의로운 폭력이 '협의 법'으로 작동하므로 그 어떠한 초법적 폭력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즉 정의로운 폭력은 그 자체가 법이므로 초법화하지 않고, 부정한 폭력은 정의로운 폭력에 의해 법치되어 부조리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부정한 폭력을 일으키던 이들이 정의로운 폭력에 가하는 집행이 진짜 '법의 집행'처럼 여겨지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임재원의 <짱>에서 인천연합이라는 일군이 보이는 변화가 마치 법적 교화의 결과처럼 읽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이 흐름의 만화들에 있어서 폭력이란 일부 낭만화할 수 있는 어떤 위치를 점유한다. 협(俠)의 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이 성립의 배경에는 학교라는 세계를 하나의 닫힌 세계로 간주하는 의식이 있다. 이 만화들은 외부 세계의 구조, 법칙, 계급이 학교라는 세계 안으로 쉬이 틈입해오지 않는다. 덕분에 세계에는 거대한 윤리적 공동(空洞)이 발생하며, 주체적인 법이 쉽게 발생하고 안치된다. 그것이 협의 법으로 결정된 데에는 어떠한 계보적 이유(요컨데 김용적 무협 세계의 후계적 위치 혹은 모리타 마사노리의 <비바! 블루스>등 일본만화로부터 받은 영향)와 함께 남성적 호모 소셜이 가지는 이상적 판타지의 투사도 함께 작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이 군집의 만화들은 부조리라는 현상을 소거해내길 바라는 남성적 판타지에 복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역설적이다. 학교라는 세계 내에서 폭력이 하나의 부조리로 현상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만화 같은 정의로운 폭력은 (아마도) 없다. 정의로운 폭력이라는 판타지는 실존하는 부조리를 해결하길 바라는 요청 같은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교실에 법은 지속적으로 실종상태에 있(다고 여긴)다.


90년대의 풍광 - 차폐된 교실

그래서 실재하는 교실의 풍광은 어떠하였는가? <메이드 인 경상도>의 작가 김수박의 2018년 만화 <아재라서>는 90년대 초 작가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경험했던 교실 내부의 부조리를 그대로 묘사한다. 학기의 시작에 폭력적 기류를 근거로 서열이 정해지는 광경, 그리고 그 서열이 어떠한 근거로 용인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담임이 보이는 무관심이다. 2학기가 되도록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이 인물은 허술한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도리어 '선생이 지겹다'는 이유를 들며 교실 내 폭력의 구심점인 '동욱'에게 시스템의 일부를 이양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무지의 산물이었는지, 아니면 의도된 권력 배분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지만 김수박은 슬쩍 후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마찬가지로 부조리의 핵심은 동욱이 만들어진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구조가 아니다. 그가 만들어낸 구조가 교실이라는 환경 내에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부조리를 발생시킨다. 감시자 없는 이 환경은 앞서 논한 '학원 폭력물'의 전제와 즉시 연결된다. 내부에 윤리적 공동이 발생하며 그 빈 공간을 다른 법칙이 채운다. 힘의 논리라는 새로운 법칙을 통해 자행되는 착취들은 결코 해결되지 못한다. '정의로운 폭력' 따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나마 '협의 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 '재국'은 동욱과의 교섭을 통해 충돌을 피하고 '부당한 폭력'을 좌시할 뿐이다.


이 시기 부조리의 탄생은 교실이 가진 독립적 생태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요컨데 외부의 법칙, 계급, 윤리적 감시망이 전혀 작동하지 않기에 가장 쉬운 법칙(=폭력)으로 환원되어버린 것이다. 김수박은 이 과정의 연유로 (앞서 설명한) 교사의 무관심과 당대 대구라는 환경에 만연한 가부장적 성질(='싸움에서는 진 놈이 잘못한 것'이라는 남근중심적 수사)의 두 가지를 제시한다. 전자가 기존 법의 작동을 정지시켰다면, 후자는 그 빈 공간에 폭력을 채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동욱의 법칙은 거대 담론 하에서만 비윤리적일 뿐, 조건 지어진 문화 내에서는 충분할 만치 합리적인 방식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 담합이, 비윤리성이 다른 조건을 통해 합리적인 것으로 둔갑하는 상황이 부조리라는 결과로 연결된다.


21세기의 풍광 - 틈입의 허용

어느샌가 만화가 학교의 부조리를 묘사하는 방식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기존의 만화들이 교실이라는 공간의 차폐성에서 탄생한 힘의 논리와 계급성으로부터 부조리를 찾았다면, 작금의 만화들은 그 원천을 외부의 법칙으로부터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데 <TEN>(이은재)의 현유학, <참교육>(채용택/한가람)의 류준형, <왕따협상>(아이아리)의 유환웅의 힘의 원천은 교실 외부에서, 그가 소속된 사회 계급에 근거한다. <체벌교사>(시노키오/홍슬민)에서는 '엘리트 집단'으로 규정된 학생회가 학교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만화들이 부조리를 배치하는 패턴은 매우 일정하며, 그 형태는 <아재라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지닌다. <아재라서>에서 묘사된 90년대 풍광은 물화된 폭력의 결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즉시적인 현상보다는 기류에 더 가깝다. 확실한 폭력적 위계와 만연된 긴장이 '시스템화되어' 작동한다고 설명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작품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기체적인 작동방식을 가지지 않는다. 이들이 묘사하는 폭력은 훨씬 더 집요하고 가시적이며 기체의 역동보다는 고체의 역동에 더 가깝다. 더 강한 물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잡지는 않는다. 은밀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지배적이기보다는 집요하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현상적이다.


가시성이 도드라지는 만큼 묵인의 액션도 더 명확해진다. '용인'이 아닌 '묵인'. 요컨데 <아재라서>의 폭력은 대행할 시스템을 위해 '용인'된 것이었지만, 현시대 만화에서 보이는 폭력들은 현상의 비가시화를 위한 침묵의 결과다. 애당초 교사들은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아무것도 이양하지 않는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1년 발간된 <지금, 만화> 12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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