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인 Aug 16. 2022

논픽션 만화

때로 자전적이고, 때로 언론적이며, 때로 역사적인.

만화와 논픽션이라는 연결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만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많은 이들이 그림과 이야기의 결합을 대답하곤 한다. 이 때에 '이야기'란 작가가 창작한 것, 작가에 의해 0에서부터 구축된 것으로 범주하는 경우 역시 많다. 우리가 종종 생각없이 던지는 '만화같은 일'이라는 레토릭의 근저에도 이런 의식이 함께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만화의 역사 내부에서 논픽션의 역사 역시 짧다고 할 수는 없다. 하파엘 보르달루 피녜이루(Rafael Bordalo Pinheiro)가 1881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리스본의 라자레또(No Lazareto de Lisboa)>는 '논픽션 만화'의 형식을 어느정도 담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피녜이루가 멕시코를 여행하며 겪은 일과 느낀 점을 일러스트와 텍스트의 연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로돌프 퇴퍼로 상징되는 초기 만화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충분히 '논픽션 만화'의 초기 계보적 작품으로 상정할만 하다. 혹은 초기 만화의 경계로 자주 거론되는 윌리엄 히스(William Heath)의 <글래스고 루킹 글래스(Glasgow Looking Glass)>의 몇 정치적 꼭지들 역시, 정치적 에세이적이라는 면에서 논픽션 만화의 범주에 아슬아슬하게 포함시킬 수 있다.


논픽션 만화의 극적 성장은 70년대 미국의 언더 그라운드 코믹과 함께 이루어졌다. 특히 저스틴 그린(Justin Green)의 대표적인 자전만화 '빙키 브라운' 시리즈가 그 폭심의 중심으로 알려져있으며, 이후 이러한 형식을 차용한 '자전적 만화'의 출현에 급물살을 타게 된다. 논픽션 만화의 대표 저자인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이 <빙키 브라운 성녀 마리아를 만나다(Binky Brown Meets the Holy Virgin Mary)>의 추천사에서 "그(저스틴 그린)의 작업이 없었다면 <쥐>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I readily confess that without his work there could have been no MAUS.)"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린의 작업은 파급력이 있었다. 그의 자전적 만화는 단순히 자신의 삶을 만화로 옮긴 것을 넘어, 시각적 서사(Graphic Narrative)의 개념으로 다룬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대상의 시각적 변형, 만화적 표현의 적극적 도입, 환상 혹은 상상에 대한 강렬한 표현 등을 통해 만화라는 시각적 특성을 최대한 적용하는 것이 그 특징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는 논픽션과 함께 두 개의 트랙으로 성장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만화는 그것이 시각적 매체로써 이미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제시와 변용이 자유롭다. 이는 현존하는 어떠한 사실, 개념, 현상들을 전달하는 데에 용이하다. 백과사전이 삽화를 이용할 때에 더 용이한 설명이 가능하듯, 만화적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은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는 목적에 충분히 부합한다. 그런면에서 논픽션 만화는 과학, 역사, 저널리즘 등의 역할에 부응할 수 있다. 둘째, 만화의 제작 코스트는 극히 제한했을 때 '1인'까지 좁혀낼 수 있다. 이는 시각 서사 매체로써는 매우 특징적인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논픽션 만화는 일기, 에세이, 회고문, 자전문, 전기의 성격을 지니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특히 자전적/회고적 만화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그 규모가 더욱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창작의 방법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이된 것과 그다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 표출 도구로써의 만화는 결국 접근성의 문제와 결부되며, 개별 창작자가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수록 그 양은 풍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탓인지 미국의 만화 시상식 아이즈너 상은 2006년에 '실화 기반' 부문을, 2021년에 재차 '회고 만화' 부문을 신설했다.


이러한 양적, 분류적 팽창의 결과로, 영미권에서는 논픽션 만화를 '그래픽 논픽션(Graphic Nonfiction)'이라는 개념으로 분류하며 내부에서의 용법, 분류, 작성 윤리등에 관한 여러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학술지 《컬렉션 빌딩(Collection Building)》 2014년 제 4호에 실린 《그래픽 논픽션: 논픽션 만화에 대한 조사(Graphic nonfiction: a survey of nonfiction comics)》에서 켄 어윈(Ken Irwin)은 그래픽 논픽션을 서지분류의 개념에서 나누고 있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그래픽 논픽션은 자서전과 회고록(Autobiography and Memoir), 여행기(Travel Narrative), 저널리즘(Journalism), 역사와 전기(History and Biography), 과학(Science), 에세이(Essays), 교육/교과(Educational / Subject Introductions)의 7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중 자서전과 회고록의 하위 카테고리로 일상적 회고(Quotidian Memoir), 건강(Health and Mental Health), 트라우마적 회고(Traumatic Memoir), 사회적 사건에 관한 회고(Memoir of news‐worthy events), 기타(Miscellaneous Memoir)의 5가지를 제시한다. 물론 어윈은 자신의 글이 사서들을 위해 쓰여졌다("Because this article is intended primarily as a guide to librarians,[...]")고 밝히니 만큼 보편적 분류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으나, 논픽션 만화의 구분에 대한 참고할만한 가이드라인임은 충분하다. 이를 토대로 본 글에서는 논픽션 만화를 자서적/회고적 만화, 저널리즘, 역사/기록의 3가지 분류로 나눠 각각을 대표할 국외의 작품에 대해 작게나마 소개해보려고 한다.


자서적/회고적 만화

상기 설명했듯 만화는 1인 창작으로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시각적/서사적 매체이다. 만화라는 이미지/텍스트의 중첩된 표현양상은 경험과 사유를 동일한 레이어에서 풀어나가기 용이하다. 이는 일기가 될 수도, 에세이가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두 가지 모두의 효과를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용이성에 힘입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만화'들은 일기적인 경향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많은 그래픽 메모어(Graphic Memoir)들은 공통적으로 자아와 세게의 충돌을 그리려 애쓰는데, 이것은 만화의 그래픽적 각색(Graphic Adaptation)이 그러한 충돌을 그리기 매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등이 보수적 세계와 충돌하는 순간에는 확실한 사건 이상의 어떠한 '비정형적' 감정이 촉발될 때가 있다. 이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기에 온건히 작가 개인이 가진 시각적 결과 이외에는 완전한 결정화가 불가능하다. 만화는 이러한 때에 그에 합당하게 기능하는 셈이다.


회고 만화의 근간의 성취는 틸리 월든의 <스피닝>이다. 이 작품은 피겨 스케이팅과 싱크로나이즈 스케이팅을 배우던 월든의 어린시절을 그린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목적처럼 스케이팅을 '수행하는' 시간과, 어머니 그리고 학교의 누군가들과 불화하는 시간,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시간이 중층처럼 쌓여나간다. 틸리에게 있어 이 세계는 불합리하고 자신의 형상은 뚜렷하지 않다. 대회를 위한 숙소를 혼자 사용하던 틸리은 숙소 복도를 걷는 장면은 이러한 심상을 직접적으로 대변한다. 구불구불한 무늬가 가득한 복도를 걷던 틸리는 이내 희고 깔끔한 바닥을 밟게 되지만, 그 곳에서 자판기를 통해 투영되는 자신의 모습은 (자판기의 물품들로 인해) 사방으로 파편화된 형상이다. 스케이팅이 정말 싫지만 대회에서의 성적을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처럼, 틸리에게 있어 <스피닝>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만들어진 덩어리같은 것이다. 틸리 월든은 이 책의 소개문에 '이 책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느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쓴다. 말하자면 <스피닝>을 통해 감각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경험을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다. 이 작품은 2018년 아이즈너상의 실화 기반 부문을 수상했다.


저널리즘 만화

만화에서의 재현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만화는 언제나 사건의 사후, 이미지를 통해 재현된다. 불가역적인 것을 넘어서 비동시적이다. 물론, 그림이 아닌 사진을 직접 사용하는 포토 로망(Photo Roman)이라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적히는 말, 효과음, 만화적 동작에 대한 추가적 표현 등은 결국 사후적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만화와 진실이라는 테마는 언제나 의심의 재판대 위에 오를 수 밖에 없다. '만화는 진실할 수 있는가?' 보수적인 시각에서 이는 가능한 전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독일인은 고양이가 아니고 유대인은 쥐가 아니기 때문에 <쥐>는 진실될 수 없다는 태도다. 이것은 어찌보면 그래픽 저널리즘(Graphic Journalism)이 직면하는 영원한 숙제가 될 수 있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1년 발간된 <지금, 만화> 13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화는 교실이라는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