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드래기 <거울아 거울아>
“게이에 대한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A major fact about being gay is that it doesn’t show.”(바바라 해머 외(1999), 《호모, 이반, 펑크》, 큰사람)
리처드 다이어는 자신의 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게이를 재현하는 데 따르는 몇 가지 문제Seen to Be Believed: Some Problems in the Representation of Gay People as Typical》를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리처드 다이어의 이 급진적인 에세이는 호모섹슈얼리티를 포함한 성적 지향이 근본적으로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의도적 전형화typification의 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가진다. 이러한 의도적 전형화가 하나의 스테레오타이프를 형성할 것을 경계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견해일 수 있다. 다이어는 전형성이라는 기호화된 맥락을 통해 호모섹슈얼이 사회의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전면적 가시화할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이는 이 글이 쓰여진 1983년의 시대정신을 통한 현상적 주장일 것이다. 요컨데 재현은 철저하게 시대의 맥락과 호소로부터 극단적으로 멀어질 수는 없다.
다이어의 주장이 전 세대의 주요한 맥락이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던진 전제인 ‘섹슈얼리티의 비가시성’은 충분히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섹슈얼리티의 재현이란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몇년 사이 몇 비디오 게임 제작사들이 자신들의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이 호모섹슈얼임을 천명한 사실이 있다. 이 때 이러한 움직임에 반하는 이들이 구사한 문구 중 하나는 제작사들이 해당 캐릭터를 ‘호모섹슈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가 가진 특성을 고려하자면 이는 매우 놀라운 주장이 된다 . 비록 그 캐릭터들이 실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규정되지 않은 섹슈얼리티가 태생적으로 헤테로섹슈얼이었을 리는 없다. 이 인물들의 섹슈얼리티는 발표되지 않은 것 뿐이지 자연스럽게 헤테로섹슈얼로 태어나 규정의 순간에 호모섹슈얼로 변모된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재현된 몸이란 섹슈얼리티의 정치적 투쟁의 장이며 이는 섹슈얼리티의 비가시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정치적 다수는 비가시된 부분을 멋대로 공란으로 인지한 뒤, 그 부분을 자신의 정치성으로 쉽게 채우고 마는 것이다. 다이어의 전형적 가시에 대한 요구는 이러한 정치적 투쟁에 대한 무장의 요청과도 같다.
하지만 과장된 재현의 방법론은 그러한 재현 결과를 납작하게 만들기도 하기에 위험하다. 결국 인정해야 하는 현실은 그것이 결국 비가시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면된 과제는 비가시된 속성을 어떻게 가시화하느냐 보다는, 비가시라는 전제를 껴안은 상태로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재현하느냐에 달려있을 수도 있다.
다드래기의 <거울아 거울아> 3부인 ‘장주원편’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하반신마비 장애를 가진 해운과 주원이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의 휠체어를 쳐다보는 주원을 향해 해운은 “음성입니다. 제 다리는 선천적으로…”라는 도치된 대사를 던진다. 이 대사는 어떤 방식으로도 정확히 읽히지 않는다. 마침 이 장면은 HIV 보균자와 섹스를 한 주원이 자신의 HIV 보균 여부를 알기 위해 해운의 클리닉에 방문한 참이다. 때문에 여기서 ‘음성입니다’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한번에 읽히지 않는다. 이 4개의 칸과 이어지는 다른 칸들을 훑어본 뒤에야 이 대사가 정확히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해운의 위트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장면 뿐만이 아니다. <거울아 거울아>는 때때로 해석을 요하는 암호같은 장면들을 사용한다. 2부 ‘정시안편’의 ‘치약 청소’에서는, 치약으로 낙서를 닦는 호수를 향해 시안은 “치약 쓰면 되는 거 어떻게 알았어?”라는 질문을 건낸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한참 유보되지만, 군대라는 공통 경험을 가진 이들은 이 대사를 통해 호수가 거쳐온 삶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그 외에도 이 만화의 정보는 끝없이 부정확함을 전면화하거나, 맥락을 뒤로 유보하여 독자들을 일시적 혼란에 빠트린다. 때문에 <거울아 거울아>는 가시화라는 조건으로부터 끝없이 이탈해 모호한 해석의 세계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다만 이는 어떠한 작품들처럼 내적 의미를 발굴해내거나, 모호함의 공백을 통해 해석을 도출하는 방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의 공백들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대부분 인물의 사고, 현상, 감정, 과거같은 개인화된 맥락의 결정들이다. 즉 다드래기의 수사는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의도된 연막이며, <거울아 거울아>는 필사적으로 가시화라는 현상으로부터 도주한다.
<거울아 거울아>의 형식적 특이점은 또한, 이러한 비가시된 정보를 4칸 만화를 기반으로 한 특징적인 형식으로 꼼꼼히 담아넣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만화를 단순히 4칸 만화로 정리하는 것은 조금 곤란한다. <거울아 거울아>는 담지하는 에피소드에 따라 사용하는 칸을 5칸 이상으로 늘리거나 칸의 배치를 변형시킨다. 또한 4개의 칸으로 하나의 정확한 기승전결을 만들기보다는 4개를 기준으로 설정된 에피소드들을 연속화하여 긴 호흡의 드라마를 형성한다. 결국 <거울아 거울아>는 전형적인 4칸 꽁트라기보다는 고정된 프레임과 호흡을 통해 매우 균일한 호흡으로 작성된 드라마에 가깝다.
이러한 프레임의 배치는 통상적인 만화적 호흡과 시간성을 근본적으로 배제한다. 칸의 크기, 형태, 칸새의 조정 같은 보편적 언어의 상실을 통해 <거울아 거울아>는 만화적 시간성으로부터 이탈해 표준적인 시간성을 요청하게 된다. 물론 개별 칸이 가지는 시간의 차이가 있는 한, 만화는 결코 표준적인 시간을 가질 수는 없다. 때문이 이는 실제 시간성의 획득보다는 작가적 요청이 된다. 하지만 이 요청은 어떤 면에서 충분히 기능한다. 이를테면, 이러한 칸의 연쇄는 어떤 방식으로든 스펙터클의 발생을 최대한 억제한다.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2년 발간된 <지금, 만화> 15호 혹은 만화규장각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