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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Aug 16. 2022

우주(Space)-선(Ship)에 대한 단상


"우주, 최후의 개척지. 이것은 우주선 엔터프라이즈의 기록이다. 새로운 생명과 문명을 찾아 인류가 가본 적 없는 세계를 향해, 그들은 끝없는 임무에 나선다."
- TV 시리즈 <스타 트렉>(1966) 인트로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유동의 장소들이다. 이 장소 내부에서 인물들의 육체는 자연스레 어디론가 옮겨진다. 이러한 움직임, 공간 자체의 운동은 영화라는 운동성의 직유로 인지된다. <이탈리아 여행>의 인트로에서 부부가 탄 자동차가 어떠한 장애물에 얽혀 덜그럭 거릴 때 우리는 영화적 사건 역시 그에 부합하는 불편함과 마주하리라는 예언을 받는다. 로라 멀비가 말했듯 영화의 불가역적 운동은 암전이라는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암전을 미지라는 개념으로 정리했을 때, 모든 영화적 공간의 운동은 이에 합당한다.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는 영화적 ‘탑승물(Vehicle)’들은 그 은유를 싣고 미지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이로써 영화에서의 자동차는, 열차는, 배는, 비행기는 기대와 공포를 동시에 유발시키는 독특한 공간으로 작동한다.


때문에 우리는 압바스 카이로스타미의 혹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자동차가 내달릴 때 어떠한 긴장감을 갖는다. 인물들이 방에 틀어박혀 세계에 대해 논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어떠한 긴장이다. 이 운동은 세계를 횡단할 것이라는 기대, 그 목적지가 다른 세계일 것이라는 기대, 영화가 두 세계의 진자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는 기대와 부합한다. 혹은 영화에서 열차가 내달릴때, 이를테면 <설국열차>가 열차 전체를 무대로 사용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도 모르게 중도 하차에 대한 욕망과 그 부재에 대한 공포로 긴장을 만든다. 열차라는 공간이 세계를 꿰뚫고 달리는 광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 공간이 언제 멈추는 가에 대한 질문을 표층까지 끌어당긴다. 마지막으로 <타이타닉>을 볼 때 우리는 이 계급적으로 물질화한 가상의 세계가 언제야 무너져내릴지만을 기대하게 된다. 배는 오직 침몰하던가, 목적지에 닿던가 둘 중 하나에 도달해야 한다. 물론 <타이타닉>은 그 결과가 정해진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배라고 한다면, 우리는 선내(船內)라는 세계가 무너질지(침몰할지), 영속될지(도달할지)에 관해서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게된다.


그렇다면 또 다른 하나의 세계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다. 작은 점들만이 간간히 빛나는 이 어둠의 세계를 뚫고 새하얀 선체(船體)가 프레임을 가로지를 때, 그 뒤 예견되었다는 듯이 십여명의 사람들이 온갖 기계로 도배된 공간에서 진지한 얼굴을 하며 등장할 때, 우리는 어떠한 긴장과 마주하게 될까. 애당초 암전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이 친밀함따윈 없는 형태의 ‘탑승물(Vehicle)’ 역시 다른 이동 공간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암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실재하지 않는 영화적 공간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Space, No-Space

우리는 우주선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마주하기 이전에 항상 우주라는 공간을 마주하게된다. 이는 일정량 공식과도 같다. 만약 우리가 기계와 몰딩으로 가득한 새하얀 공간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이것을 우주선이라 상상하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큰 역할은 우주선에게 운동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오직 우주를 가로지르는 선체의 운동을 먼저 보여줬을 때에야 비로소 우주선은 ‘움직이는 공간’으로 화한다. 때문에 우주선의 선원들은 우주선에 있는 것과 동시에 우주에 있는 이중적 육체들이다. 덧붙여 우주의 관점에서 유동하는 존재들이지만 우주선의 관점에서 고정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도 다시 한번 이중성을 가진다. 때문에 이 환경은 지구 위에서 촬영되는 그 어떤 영화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수한 세계적 경험을 부여한다. 선내의 사건들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동시에 어두컴컴한 세계를 내달리고 있는 도중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는 어떠한 공간인가. 우리는 스크린을 수놓는 우주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보는가. 오몽은 ‘영상은 2차원적이고 한정되어 있다는 영화 영상의 물질적 두 가지 특성은 영화적 표현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된다.’(「영화 미학」, 동문선)고 운을 뗀 뒤, 영화적 공간을 만드는 기재 중 하나로 심도의 기법을 거론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2차원에 한정된 스크린의 표면을 양감을 가진 공간으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투시 원근법의 작용에 전적으로 기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원근법의 성립은 일정량 자연 세계의 결과물과 같다. 오몽이 계속해서 ‘사실상 영화 카메라는 '광학'에 의존하지 않고 외눈의 원근법에 따라 영상을 얻어낼 수 있었던(...) '어두운 방'을 의미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지하는 것 처럼, 영화에서의 공간감이란 특별한 장치를 경유한 결과가 아니라 직접적 세계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하게 얻어지는 것인 셈이다. 즉 대상에 이미 공간감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재현적 자연성과 우리가 원근감을 가진 대상을 지켜봄으로써 비로소 ‘공간이다’라고 납득하는 인지적 자연성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문제는 우주는 이 공간성에 대해 끝없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주는 결코, 그 자체로 어떠한 원근법을 작동시키지 않는다. 망원경에서 쏘아낸 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나는 우주의 사진을 보라. 그 곳에서 어떠한 원근이 느껴지는가? 우주라는 공간의 특수성 중 하나는 바로 원근감의 부재다. 만약 그 위에 행성이나 항성같은 천체가 얹혀진대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 천체들은 지나치게 거대해서, 그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저 검은 먹으로 칠해 구분해놓은 구획처럼 보일 뿐 그 형체 자체는 납작한 종잇장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는 2차원의 평면에 펼쳐진 우주의 형체를 본대도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공간감을 인지할 수 없다. 영화적 우주란 대체로 광학적 재현보다는 카메라 옵스큐라적 재현이 되는데(진짜로 우주를 촬영해 만든 우주 영화를 본 일이 있는가?) 그 충실한 재현이란 철저하게 공간성의 소멸로 연결된다.


게다가 우주는 또 다른 상실을 가진 세계다. 우주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력을 잃어버린 장소이다. 중력은 영화에 있어 생각보다 큰 문제다. 카메라는 무엇을 지지하고 서 있는가. 쇼트의 레벨과 앵글이란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 만들어지는가? 그 많은 영화들이 철칙처럼 중심에 두는 그 인물들은 무엇에 귀속되어 있는가? 많은 영화의 법칙들이란 결코 중력을 거슬러 완성될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없는 세계, 딛을 바닥이 없는 세계에서 가상선의 법칙이란 무용할 뿐이다. 우주를 부여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갈려있는 인물들 사이의 쇼트-리버스 쇼트를 상상해보라. 부유하는 카메라에게 있어서 트래킹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영화가 우주에 오르는 순간, 그곳은 개념적 상실의 장소로 돌변한다.


<그래비티> (2013)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이 개념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지다. 그의 끝없는 롱테이크는 단순한 미학적 움직임을 넘어서 인류의 무능력에 대한 직접적 현현에 가깝다. 그의 카메라는 아름답기 위해 부유한다기 보다 ‘도저히 어찌해야할지 몰라’ 부유하는 것 처럼 보인다. 어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무엇을 중심으로 인물을 찍어나가야 하는지, 중력이 없다면 답을 가질 수 없다. 답이 없는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그저 끝도 없이 떠다니는 것 뿐이다. 그래서인지 스톤(산드라 블록)이 우주선이나 우주 스테이션에 들어가면 카메라는 기준이 될 바닥을 찾았다는 듯 미묘하게 활기를 띈다. 이 안정감은 스톤의 생사에 대한 우리의 안위의 결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었던 카메라가 되찾은 안정감이 그대로 전이되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비티>는 3D로 봐야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간감이 실종된 세계를 끝없이 지켜보는 건 고통스럽고 불안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종종 보이는 스톤의 시점 쇼트는 3D 기술을 통해 눈 앞에 존재할 우주복의 유리를 하나의 층위로 재현해 이 세계가 공간감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는 우주라는 세계를 포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쿠아론의 작업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우주를 대하는 영화 언어의 불능성이다. 우주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현존의 영화 언어가 ‘아직’ 우주라는 세계 안에서 올바르게 작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주가 영화 언어보다 먼저 발생했기 때문이며, 우리는 아직 우주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능성을 상상하고 직면했던 쿠아론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바로 그 몸부림 자체에서 나온다. 결국 그것을 공간화하여 스크린에 투사할 수 없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우주(Space)란 영화적 비공간(Non-space)이다. 우주의 불안은 어쩌면 이 아이러니로부터 탄생한다.


세계, 움직이지 않는

그래서 우주선은 인류에게 그리고 인류의 영화에게 마지막 보루가 된다. 새까만 프레임 내부로 우주선이 들어오는 순간, 원근감은 즉시적으로 작동한다. 카메라가 그 외피를 뚫고 들어가면 하나의 기준-바닥-을 삼아 생활하는 인간들을 포착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오프닝 텍스트를 떠올려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프레임의 중앙을 향해 텍스트들이 ‘바닥’을 이루며 원근감을 만든다. <스타워즈>의 목적은 불안의 조장이 아니다. 이 텍스트의 바닥은 불안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처방제와 같다. 그에 응답하듯, 텍스트의 행렬이 끝나고 카메라가 어디론가 운동하면 그 곳에는 하나의 우주선이 등장하고, 즉시 그 내부의 모습을 비춘다. 이어지는 대부분의 시간은 우주가 아니라 어딘가 중력이 존재하는 행성의 표면을 돌아다닌다. <스타워즈>는 우주의 불안으로부터 쫓기듯 우리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스타워즈 : 제국의 역습> (1980)


우주선이란 우주의 한복판에 존재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만들어놓은, 빌려온 행성의 안정감일 뿐이다. 우주라는 비공간을 영화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중력의 세계로부터 빌려온 공간, 그것이 바로 우주선이라는 영화적 공간의 근저다. 때문에 우주선은 철저하게 한정적 공간이 될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연극의 무대와 같으며, 우주라는 비공간에서 단일하게 공간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다. 연극이 특별한 경우에 한해 무대의 밖을 공간으로 상정할 수 있듯 우주선 역시 우주선의 표면 혹은 원근을 확인할 수 있는 일부를 프레임 내에 드러낼 때에만 비로소 바깥 세계를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주선은 무한한 자유 따위와 연결되지 않는다. 우주선은 완전히 폐쇄된 공간=사회로만 기능한다. 물론 이 한정성은 ‘그곳만을 배경으로 삼는다’로 단순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주선의 안과 밖은, 반복해서 말하자면 지금 보여지는 곳이 공간이냐 비공간이냐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선의 차폐란 어딘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을 전제한 일시적 차폐가 결코 아니다. 그 누구라도 우주선의 밖에 나가는 순간, 그는 공간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 이 사실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이는 역시 스탠리 큐브릭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이 내던져짐의 불안을 지속적으로 이용해 우리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큐브릭은 디스커버리 호에 탑승한 승무원들을 원근을 상실한 쇼트와 원근이 회복되는 쇼트에 교차적으로 배치한다. 이 일련의 시퀀스는 점멸하는 불안 그 자체다.


그렇기에 우주의 유랑-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불안의 유랑이다. 문제는 이 불안이 본질적으로 끝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우주선의 서사적 목적은 목적지로의 도달임이 자명하지만, 우주선이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동하는 공간이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우리는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을 이동하는 공간이라 규정하는가. 그것은 외부와 연결된 투명한 면=창을 통해 들어오는 변화를 통해 인지될 뿐, 실제 피사물이 움직이고 있는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화에서 자동차가 움직이고 있다고 인지되는 이유는 창 밖의 영상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기 영화들의 자동차 씬을 떠올려보라.) 그런데 우주선의 창 밖에는 단일한 검은 세계 뿐이다. 반짝이는 빛이 옆을 스쳐지나갈 터이지만, 세계가 움직이는지 빛이 움직이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감각하지 못한다. 때로 <스타워즈>의 하이퍼 드라이브때 발생하는 엄청난 빛의 사선들이나 곡예 비행의 무대가 되는 소행성군 따위를 통해 그 움직임을 가시화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은 도리어 그 시각화를 위한 절실한 트릭에 불과하다. 우주선은 이러한 필요를 마주할 때에만 적극적으로 그 몸을 흔들어댈 뿐이다. 


설령 영화의 막바지에 우주선이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있어 우주선의 움직임이란 인지가 불가능한 어떠한 흔들림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선의 정박은 결국 결과론적으로 도출될 뿐인 편집적 환상이지 않은가. 또한 그것이 실제로 움직여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이 발생했는가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비공간의 내부에 비치된 일시적 공간이자 폐쇄된 세계, 목적지는 설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이 공간은 자연스럽게 인류에게 허용된 완결 세계, 즉 지구 그 자체로 화한다. 그래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잠시 발에 치이는 작은 쥐들과 <에이리언>에서 승무원의 배를 뚫고 사라진 유생(幼生)은 그 존재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우주선이 인류의 완결 세계인 한, 그러한 불순물의 등장은 오염의 유발이자 동시에 침략으로 이해된다. 우주선 어딘가를 재빠르게 기어다니는 외계 유생의 존재는 <우주 전쟁>에서 도심을 걸어다니는 외계 로봇의 존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침식의 결과가 곧 지옥의 탄생이라고 설파하는 <이벤트 호라이즌>은 그런 면에서 정확한 지점을 짚은 셈이다.


그래서 침식-침략을 다루는 우주선 영화들은 인류 중심의 유사 프로파간다다. 그 침략자들은 왜 예외없이 모두 끔찍한 외모와 흉물스러운 식성을 가진다. 우연히 우주선의 내부로 틈입한 생물은 왜 인간의 생살을 원하는가? 이 영화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우주선의 내부에 그 무엇도 들어오도록 허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십중팔구 우리와 영토를 둘러싼 게임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암흑의 비공간에 부여된 한줌의 공간은 오직 인류의 것이어야만 한다.


미래, 역행하는

때문에 우주선 영화가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주장은 역설적인 오류다. 우주선이라는 공간은 역행 세계의 표상이다. 우주선의 한켠,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순간 영화는 부족 세계의 환상을 그린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자리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권리는 근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원시적 세계에는 집단구성원들이 명확히 구성된 현장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때문에 이탈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별 구성원에게 수행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이 바로 전근대적 공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주선 영화의 특징은 개별의 인물들에게 ‘전문성’이라는 미명하에 곧잘 확연히 구분되는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군속의 조사단이라는 설정의 <스타트렉> 함교 승무원들이나 초거대 기업의 대형 화물선이라는 설정을 가진 <에이리언>의 노스트로모호 승무원들, 우주 쓰레기 인양이 목적인 <승리호>의 주인공들에게 어떠한 역할이 배분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채굴, 운송, 전투가 아닌 이민선을 배경으로 하는 모튼 틸덤의 <패신저스>조차 두 남녀에게 전통적 부부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점은 흥미롭다. 영화의 말미, 오로라(제니퍼 로렌스)의 선택이 스톡홀름 신드롬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부족 사회의 환상을 가진 채 각자 역할로 회귀하도록 결정되어 있으며, 그에 도달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 맹목적 사랑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교적 ‘외계의 존재’에 대해 관대한 마블 스튜디오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마저 그 집합을 유사 가족의 형태로 만들려 하는 데에서  부족적 세계관으로의 회귀가 읽혀진다. 공교롭게도 1편의 그루트(빈 디젤)로부터 다시 태어난 작은 그루트는 점차 성장해 청소년기를 거치고, 모든 승무원들이 그의 손윗사람-부모, 형제-과도 같은 역할을 자처해 상징적인 가족형태를 이룬다. 물론 이들이 각자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 대안가족의 형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최종적으로 이 영화가 이끄는 것은 무엇보다 가족애의 단단한 결속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선체-이자 공동체적 테두리- 내부의 인간들의 결속은 생물학적 연결보다 더 강력해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영화의 2편에서 주인공 피터 퀼(크리스 프랫)은 최종적으로 친아버지인 에고(커트 러셀)와의 연결을 끊어내는데, 이 플롯은 퀼이 한때  ‘같은 배’를 탔었던 욘두(마이클 루커)와 가족애를 회복하는 플롯과 병렬로 배치된다. 그런 점에서 퀼의 친아버지 에고의 본질이 괴물적 존재라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개념적으로 우주선에 침입한, 그리고 곧 우주 공간에 버려져야 하는 무차별한 침략자와 동일하다. 우주선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은 이 폐쇄된 완전 세계는 혈연보다 부족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한다는 점이다. 우주선은 혈연이 안정적 생장을 확신하는 시대보다 더 이른, 공동체가 그러한 안정성을 앞지르는 세계를 형성한다. 우주선이 과학기술의 집합체일지는 몰라도 우주라는 공간에 놓인 순간, 순식간에 역행된 사회구조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아이러니의 집합이 된다.


<아바타> (2009)


결국 우주선(Spaceship)은 우주-선(Space-Ship)이다. 배라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기능은 제국주의적 환상으로 유발된 침략의지의 발현이다. <스타트렉>의 인트로는 우주를 ‘최후의 개척지(Last Frontier)’라 부르며 이 사실을 공고히한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기본적으로 웨스턴의 변형이라는 사실과 우주선이 우주-선인 것, 그리고 폐쇄적이며 고립된 전근대적 세계인 것과는 명백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제임스 캐머런은 <아바타>를 수정주의 웨스턴으로 만들기 위해 우주-선의 여정과 도착을 과감히 삭제한다. 캐머런에게 있어 <아바타>의 사건은 행위의 결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결과 우주선과 판도라는 대립쌍으로 설정된다. 캐머런은 수많은 우주선에서 벌어졌던 일을 판도라에서 똑같이 재현시킨 것과 다름없다. 판도라 역시 오염원(지구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비공간(우주)으로 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아바타>는 수술용 실리콘 장갑처럼 깔끔하게 뒤집어 볼 수 있는 영화다. 이를테면, 판도라로 향하는 우주선에 나비족이 침입했다고 가정한 뒤 영화를 재설계할 수 있다. 나비족은 오염원으로 규정되고, 인류는 필사적으로 나비족과 공간 점유를 위해 투쟁하며, 최종적으로 나비족은 비공간으로 밀려나 사라졌을 것이다. 캐머런의 규정에선 공고한 자기 방어는 침략 의지의 역전과도 같다. 우주선이 강경한 부족 사회의 폐쇄성을 이끌어내는 한정된 공간-세계이기 때문에, 그 사회가 다른 사회와 접촉하면 도리어 강력한 오염성을 보이게 된다. 기실 우주선의 승무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도착한 세계가 그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스타트렉>의 각 에피소드가 가진 무시무시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주, 그리고 미래

결국 이 투쟁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우주라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그러니까 우주를 비공간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인류(그리고 영화 언어)의 한계가 도사린다. 정확히 인류의 공포는 우주선 내부의 오염이 아니라 우주선이라는 완전 세계의 소멸에서 나온다. 우주선을 잃게되었을 때 마주할 비공간의 공포를 견뎌낼 수가 없기에 우주선이라는 공간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것 뿐이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를 통해 지구 인류를 ‘중력에 영혼이 사로잡힌 사람들’이라 부르며 조소한다. 토미노는 중력이라는 한계로부터 이탈해 우주라는 세계에 적응하는 인류의 탄생에 대해 반복적으로 꿈꾼다. 그의 작품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이론에 의하면 우주에 적응한 인간은 감각의 벽을 허물고 타인과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의 가능 여부와 별개로,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어떠한 다음 단계를 상상하게 한다는 전제가 매우 흥미롭다.

사실상 토미노의 이론이 아서 C. 클라크로부터 왔음을 감안하자면 결국 그가 상상하는 인류의 ‘다음 단계’라는 상상은 다시금 큐브릭으로 연결된다. 우주와 영화의 관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을 경유하지 않을 수는 없다. 큐브릭이 우리에게 던진 이미지, ‘초월적 인간’ 스타 차일드는 비공간 우주에 적응해 완전히 다시 태어날 미래에 대한 가장 진취적인 환영이다. 스타 차일드의 강렬함은 그 평면성에 있다. 태양의 강렬한 빛에 의해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음영이 드리우지만 그 형상은 바로 옆에 떠다니는 지구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 비현실적인 환영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현실성이 없어 울퉁불퉁한 굴곡을 가졌다기 보다 희고 검은 표면을 가진 평면의 존재처럼 보인다. 스타 차일드는 우주라는 비공간, 하지만 영화적 공간의 본질, 그러니까 프레임이 ‘근본적으로 평면’이라는 사실에 적극적으로 새겨진다. 스타 차일드는 현존 세계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우주라는 다음 세계에 뛰어드는 존재이기에 작금의 인류, 그리고 영화의 다음 단계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한계라는 것은 당연히 우주선이라는 공고한 폐쇄성을 말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파트에서 더욱이 흥미로운 부분은 스타 차일드 탄생 직전의 이미지이다. 인류를 진화로 이끄는 모노리스가 노쇠한 데이비드에게 보이는 환영은 침대가 놓인 사방이 막힌 방으로 이는 큐브릭이 보여주는 가장 마지막 ‘공간’이다. 완벽한 원근감을 통해 그 형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이 방-공간은 이후 이어질 새카만 우주-비공간과 전적으로 대비된다. 어쩌면 모노리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공간을 통해 그것이 실종되는 세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방은 인류의 마지막 우주선이 되며, 금방이라도 숨을 떨굴지도 모르는 노인의 방으로 묘사된다. 이는 공고한 표백의 세계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려 한 인류의 마지막 모습이며, 공간과 중력이라는 환영을 극복해야 하는 영화 세계에 대한 촉구의 메시지이다.


<아니아라>(2018)


해리 마틴슨의 우주 대서사시를 원작으로 삼는 휴고 릴리아, 펠라 카게르만의 <아니아라> 역시 우주를 떠돌다 소멸하는 인류를 그린다.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없어 끝없이 우주를 표류하는 이민선 아니아라 호의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결국 인류가 우주선이라는 환경에서 완전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섬뜩한 예언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니아라>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불능을 인정하는 참패의 영화다. 아니아라 호 내부에서 사람들은 지구의 환경을 재현해 볼 수 있는 ‘미마’라는 장치에 중독되기 시작하며, 미마가 작동을 멈추자 극도의 무기력과 혼란에 빠진다. 우주선은 비실재의 공간이며 영화에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환영적 세계다. 우리는 그 환영 내부에서 실재하는 세계를 환영처럼 쫓는 이상한 존재들을 본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다. <아니아라>는 우리가 아무리 긴 시간을 보내도 우리는 과거의 환영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는 결정론적 예언이다. 그런 면에서 우주 공간에 지구 자연의 환영을 쏴 향수를 채우겠다는 그 발상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극단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 사는가? 미래를 살며 과거를 찾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가?


우리는 미래를 그린다는 전제에 대해 다시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미래를 그린다는 건 반짝반짝한 표면의 하이테크 기계를 그리는 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중력을 넘고, 부족 세계의 환영을 깨는 것이야말로 진짜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일 수 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밀레니엄 팔콘 호를 다시 찾은 한 솔로는 츄바카에게 이렇게 외친다. “츄이, 집이야!” 하지만 조지프 캠벨의 정리처럼 진짜 여정(Odyssey)은 소명에 응해 집을 뛰쳐나갈 때 발생한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집’이 안정과 역행이 아닌 모험과 진취의 공간이 되기를.


※ 본 원고는 2022 씨네21 비평 공모에 제출되었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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