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라시 다이스케의 팬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작품은 완벽하게 영상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래디컬한 팬심의 발현따위가 아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만화라는 매체일 때에야 그 힘이 완벽하게 유지되는 작품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마녀>를 볼펜만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있다. 이후의 작품인 <사루>는 볼펜과 펜을 동시에 사용해 그렸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의 작품인 <리틀 포레스트>는 펜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세 개의 작품은 작화면에서 동일한 느낌을 준다. 나는 그의 작화를 규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그가 하나의 작품을 볼펜만으로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그의 작화 방식 그 자체가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볼펜 하나로 만든 작화'로 대변될 수 있는 그의 작화적 특징은 <리틀 포레스트>에도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밑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선이 컷 안을 촘촘하게 채워나간다. 스크린 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작화에는 빈틈이 없어보인다. 때로는 인물 작화를 날리듯 그리지만, 그 마저도 비어보이지 않는다. 이가라시의 작화는 선으로 만들어진 생화같은 느낌이다. 구불구불대며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선은 사람들이 바라는 깔끔함은 없지만, 도리어 개별의 작화에 강력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특히 그가 사람을 그릴때 보다 동물을 그릴때, 혹은 식물을 그릴 때 그런 느낌은 더욱 도드라진다. 그래, 이가라시의 작화는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 더욱 정확하다.
나는 2000년대 이후의 이가리시의 작품들을 생태주의 판타지로 구분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살아있는 듯한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구불구불한 선, 톤을 배제해 면이 명징히 구분되지 않는 그의 작화는 배경과 인물을 떨어뜨려놓지 않는다. 그가 인간을 그리든, 아니면 인간이 만든 무언가를 그리든 그의 그림 내에서는 모두 자연의 일부로 변모해버리고 만다. 애당초 이가라시의 선은 자연을 그리기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이 아닌 '무언가'를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연의 일부로 포섭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력 넘치는, 인간의 존재마저 압도할 정도의 자연은 작품 내에서도 여러가지 면모를 지닌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마녀>에서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다. 이 작품 내에서 모든 마녀는 샤머니스트의 성질을 가진다. 그들은 현대의 인간들은 알 수 없는 본질적인 지식, 강렬한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부린다. 결국 보통의 인간들은 그들에 공포심을 느끼지만, 그 강력한 힘에 매료되기도 한다. 이가라시가 이 '마녀'들을 샤먼으로 설정한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그가 표현하는 가장 거대한 힘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반면, <리틀 포레스트>는 전혀 다른 자연의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의 자연은 매우 온화한 힘이다. 인간은 그들을 일정량 통제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얻지만, 이러한 과정을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가라시의 세계 내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이미 압도적인 작화의 힘으로 자연의 존재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그 힘을 나눠갖는 것 뿐이며, 그를 위해서는 그 생태 안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제목은 아마도 배경이 되는 마을 이름인 코모리(小森)를 영문으로 바꾼 것이다. 다만 굳이 그 뜻을 풀이하자면, 이는 이치코가 하나의 '작은 숲'안에서 끝없이 자신을 찾기 위해 노동하는 이야기라는 뜻이 될 것이다. 여기서의 '작은 숲'은 단순히 농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숲은 하나의 순환생태다. 무언가가 버려지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그것이 다시 다른 것에게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치코가 작은 숲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순환생태의 한 부분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치코는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을 '먹는다'. 하지만 먹은 그 힘을 이용해 또다시 자신의 작은 숲을 '가꾼다'. 이치코가 숲 생태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이야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이치코가 밭에 있을 때, 논에 있을 때, 목조 집 안에 있을 때, 숲에 있을 때 이가라시의 작화는 이치코를 완전히 그 일부처럼 묘사한다.
그러니까 <리틀 포레스트>는 아마도 있는 그대로 영상화 할 수 없다. 이 작품이 생태주의적 판타지를 구축하는 방식에는 작화가 너무 많은 부분을 책임진다. 그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려는 구불구불한 선이, 자연의 무엇과 이치코를 함께 담을 때에야 <리틀 포레스트>는 완성된다. 그것을 제거하고 오직 이야기만 취한다면 이 작품은 귀농 판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생태주의 판타지의 면모를 버려야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그것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그렇기에 우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화 되었다. 모리 준이치는 이가라시의 원작을 계절별로 4조각 내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부제를 붙여 완성했다. 극장에는 <여름>과 <가을>을 묶어 1부로, <겨울>과 <봄>을 묶어 2부로 상영했다. 하지만 각각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심지어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후에야 다음 편이 등장하는 정도다.
일단, 이 작품은 어째서인지 한국에 '힐링 무비'로 알려져있다. 귀농을 선택한 한 여성이 열심히 일하고, 아주 맛있는 밥을 먹는 예쁜 장면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모리 준이치는 이 작품을 일종의 힐링 무비로 만들어낼 생각은 없어보인다. 도리어 모리 준이치는 이가라시가 원작에 담아둔 생태주의 판타지의 면모를 정확히 읽고 있다. 그는 이치코가 4계절을 거쳐서 결국 코모리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4개의 계절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이가라시의 원작은 적당히 계절감을 느끼게는 했지만 뚜렷하게 계절을 분절시켜놓지 않았다. 물론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겨울에 시작해 겨울에 끝나는 이야기라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계절색이 애매한 에피소드들이 명확한 계절감을 주지 않으므로 그 진행이 확실한 1년을 그리고 있는지 모호하게 느껴진다. 모리 준이치는 이가라시가 그린 에피소드들을 계절에 맞춰서 4개의 단위로 확실히 나눠놨다. 그 과정에서 이가라시가 초반에 그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뒤쪽으로 미루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리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가 계절을 기준으로 나뉜다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실리적인 이유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영화 촬영이란 결국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조건은 크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모리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프로덕션을 극복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선택할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원작의 이야기들을 모두 담기 위해서 계절마다 촬영을 감행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단순히 실리적인 이유에서라면 원작 에피소드의 순서를 굳이 뒤섞어서 여름-가을-겨울-봄이라는 루트를 만들 필요도 없다.
만약 이 선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모리가 생태주의 판타지인 원작을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이 부과하는 정확한 싸이클인 '계절'이 순환생태를 표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며 인간이 그 안에 뛰어듦으로써 자연의 일부로 기능한다는 의미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매우 효과적이다. 다른 매체와 달리 가장 '시간'이라는 개념을 중시해 사용하는 영화에게 있어서, 순환적 시간을 보여주는 것 보다 더 순환생태를 효과적으로 묘사할 방법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원작의 강력한 작화라는 힘을 이용할 수 없다면 자연의 순환과 그 변동하는 힘을, 그것을 그대로 촬영한 '시간을 담는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훌륭한 대치다.
그를 위해 영화에는 현장에서 취득한 수많은 인서트들이 들어가 있다. 극의 진행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 논의 위를 날아가거나 나무 위에 앉은 동물을 촬영한 영상을 끼워넣는 것이다. 그 시간에서만 취득할 수 있는 푸티지, 그것이 바로 스크린 안에 자연을 정확히 묘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모리 준이치가 보이고 싶어한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원작의 에너지를 그대로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이다. 물론 만화에서만 가능한 영역을 영화 언어로 번역하는 형태로.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에서 정말 눈에 띄는 것은 마지막 카구라 연무 장면이다. 원작에서도 몇 페이지에 걸쳐서 묘사되고 있지만, 영화 쪽이 훨씬 더 공을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연무 장면 중간 중간에 지나온 시간에 대한 인서트를 끼워넣어 놓기도 했다. 카구라는 일본의 국교나 다름없는 신토(神道)의 의식으로, 신께 제사를 올리기 위한 가무를 말한다. 농촌에서의 카구라는 당연히 샤머니즘적인 의식이 강할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의 카구라 연무 장면이 더욱 강렬한 이유는, 4시간에 가까운 플레이 타임 동안 자연의 순환계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의 카구라는 실제로 겪어 온 자연에 대한 진짜 제의(祭儀)가 될 수 밖에 없다. 삽입된 인서트들은 이에 대한 자연의 화답처럼도 보인다.
모리 준이치는 원작이 가진 코드를 살리는 것을 목표로 달려온 것 처럼 보인다. 여러면에서 유머가 존재했던 원작보다도 태도가 훨씬 진중하다. 그것은 아마도, 실물의 시간을 옮겨야 하는 영화이기에 생겨난 태도일 것이다. 간장 고사리편에 나오는 노인들의 인터뷰는 연출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진짜 인터뷰처럼 보인다.(물론 그 내용은 원작과 동일하기에 완전히 연출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모리 준이치는 실재화한 자연의 힘과 마주했던 것이며, 그의 2부작 <리틀 포레스트>는 그것을 원작의 서사에 첨언한 형태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영화를 도시인이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큰 사치처럼도 느껴질 정도다.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에 관한 인터뷰에서, 모리 준이치의 영화를 다시 구성하기 보다는 원작을 다른 형태로 각색했음을 여러번 밝혔다. 물론 몇가지 면들, 예를 들어 모리 준이치가 구현하지 않은 원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점 등에서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에서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를 완벽하게 지워낼 수는 없다.
애당초 4개의 계절로 작품을 쪼개고 있는 쪽은 이가라시가 아니라 모리 쪽이다.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가 그 방식을 따르고 있는 한, 그 영향력을 받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가 기대고 있는 것은 한국의 관객들이 일본판을 소비한 방식 그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 모리 준이치는 <리틀 포레스트>를 일종의 '힐링 무비'로 만들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도시의 청년들에게 일종의 회복의 재료로 사용된 이유에는 영화 외적인 인과가 있다. 각박한 도시의 청년들에게 일말의 숨통처럼 작용한 셈이다. 그리고 임순례의 영화는 이 인과관계에 철저하게 기대고 있다. 모리 준이치와 달리 임순례는 이 영화를 확실한 '힐링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를테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다. 원작의 이치코에게는 명확한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적 부담을 안고는 있지만 어떤 경위로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혜원은 다르다. 교육 공무원을 꿈꿨던 그는 도시에서의 생활에서 커다란 부담을 안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배경과 동기는 인터넷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청년 세대'라는 모델에서 카피된 것이 자명하다. 임순례는 이 캐릭터에 관객들을 투영하려고 애쓴다. 정확히는 투영된 그들이 영화라는 도피처에 잠시 떠나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설정이 이치코와 혜원 간의 어떠한 괴리를 발생시킨다면, 그것은 혜원에게는 마치 애당초부터 '돌아갈 곳'이 있어보인다는 것이다. 이치코에게는 현재 마주하는 자연이 모든 것 처럼 보이지만, 혜원에게 있어서는 잠시 머물렀다 가는 힐링 베드처럼 여겨진다.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의 강도높은 노동과 대비될 정도로 간소화된 노동 역시 그런 이미지를 강화한다.
덕분에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의 그것을 원작으로 삼고있는 것 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도리어 이 작품은 <삼시세끼>나 <효리네 민박>의 극장판같은 느낌을 준다. 당장 눈앞의 노동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치코와 달리, 혜원은 해당 노동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도시에서 얽어 온 실타래에만 온 신경이 다 집중되어 있다. 그의 노동은 그 타래를 풀어내는 상쾌한 체험을 전달하기 위한 요소처럼만 보일 뿐이다. 목적을 달성하면 본래 자신이 있던 장소로 편하게 돌아갈 수 있는 사람처럼.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생태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도시인들이 농촌에 가지고 있는 힐링 베드의 판타지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영화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영화가 하나의 일탈이라면, 달콤한 일탈을 제공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자연은 너무나 힘이 없어보인다. 인간의 재충전이라는 대주제를 위해서 저 멀리 뒤쪽으로 힘없이 비켜 서 있는 느낌을 준다. 태풍을 일으켜 농작물을 쓸어가는 위력을 보인다 해도, 그것이 결국 청년의 내적 성장이라는 귀결로 이루어진다. 마치 거대한 위력마저도 재충전을 위해 봉사한 것 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는 청년들의 회복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것에 눈을 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을까 하는 애처로움도 함께 든다. 자연 그 자체를 마주하는 일 보다 우리 안에 얽혀있는 무언가를 푸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건,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더 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환하는 생태 내에서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일만을 바라본다. 우리는 모두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직 생태에 뛰어들기엔, 우리에게는 잃을 게 너무 많기 때문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