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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Sep 23. 2017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

토미노 요시유키 <무적초인 잠보트 3>

    토미노 요시유키가 일본 아니메사(史), 특히 거대로봇물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만들었음을 부정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도 대다수는 1980년작인 <기동전사 건담>이 거대로봇물이라는 장르를 분화시킨 젓 족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기동전사 건담>은 직접적인 장르 분화의 가장 가시적인 작품이지만, 분화의 시발점은 그보다 3년 앞선 <무적초인 잠보트 3>(이하 <잠보트 3>)에서 시작되었다 보는 편이 타당하다.


    <잠보트 3>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작품의 후반부에 몰려있다. 대개는 작품 중반부터 시작되는 '인간 폭탄'과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우주에 올라간 카이조그를 쫓아 올라간 후 발생하는 처절한 전투를 <잠보트 3>의 특징으로 꼽는다. 하지만 <잠보트 3>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거대로봇 아니메사에 커다란 반향을 남긴 에피소드는 한참 이른 제 5화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으로 봐야한다.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의 큰 이야기는 간단하다. 피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기 위해 잠보 에이스로 출동한 진 캇페이는 그 장소에서 과거의 친구였던 코즈키와 마찰을 빚는다. 그 와중에 카이조그의 메카 부스트가 일본을 습격하자 잠 불과 잠 베이스가 출격, 잠보트 3로 합체하여 메카부스트를 무찌른다. 여기까지는 거대로봇 아니메의 흔한 에피소드 중 하나 일 뿐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잠보트 3와 메카부스트와의 결전 중 수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잃는다는 점이다.


    메카부스트와 잠보트 3의 결전은 총 25분(노래와 크레딧 포함)의 플레이 타임 중 절반인 13분 정도부터 시작되어 20분 정도에서 끝을 맺는다. 그 7분 중 절반을 넘는 약 4분이 현재 짚고 넘어갈 항만에서의 전투이다. 항만에서의 전투가 시작되는 14분부터 잠보트 3가 물속에서 부상해 메카 부스트와 대치하는 19분까지는 기존의 영웅 서사로 일관되던 거대로봇 아니메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도록 연출되어 있다.



    이 5분은 약 60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중 잠보트 혹은 메카 부스트의 전투를 묘사한 쇼트는 불과 20 정도다. 그 20개의 쇼트 중에서 두 개 잠보트 3(그리고 파일럿들)와 메카부스트를 '기존의 거대로봇 아니메 방식(컨벤션)'으로 조망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봇 아니메의 보편적 형태로 담져겨 있는 쇼트는 7할도 채 안 되는 8 뿐이다. 남은 쇼트들은 모두 둘의 싸움에 휘말려 든 피난민과 코즈키 일가의 이야기들로 담겨 있다.


    잠보트 3와 메카 부스트가 담겨져 있으나 거대로봇 컨벤션으로 직조되지 않은 2개의 쇼트가 이 일련의 시퀀스의 핵심이다. 이 두 개의 쇼트에서 거대로봇들은 근경의 피난민들을 걸친 채로 원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액션이 묘사되기 보다는 '거대한 두개의 거체가 대치하고 있는' 형상만을 담는다. 이 쇼트들에서 주체는 당연히 두대의 거대로봇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피난민들이다. 피난민들이 주체화되면서 배경에 존재하는 거대로봇들은 주체성을 잃는데, 단순한 오브젝트가 아니라 주체로써의 피난민에게 고난을 던지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 두 개의 쇼트은 각각 그 쇼트가 등장한 이후 실질적인 재난 -화재와 해일-의 쇼트로 연결된다. 단순한 불안의 상징물이 아니라 실질적인 재난 그 자체인 셈이다.



    남은 40개의 쇼트들에서 가장 많은 클로즈업을 가져가는 인물은 코즈키로써 그는 두 번의 재난이 일어나는 동안 동생과 어머니를 잃게 된다. 이 5분간의 전투 시퀀스는 명백히 피난민들에게, 그리고 피난민의 중심인물인 코즈키에게 이입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60개의 쇼트는 철저하게 관객의 심리로부터 잠보트 3라는 '영웅'을 분리시키고, 그의 행위로부터 피해를 입는 인물에게 동일시하도록 유도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만은 잠보트 3는 재난을 일으키는 괴물 그 자체로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거대로봇물에 있어서는 일대의 사건이다. 거대로봇물은 일본 아니메사의 시작부터 함께한 일본과 아니메의 독보적인 장르이지만, 그 근저의 본질은 영웅 서사였다. 대개의 주인공은 상실을 겪고 상실의 대가로 '거대로봇'이라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되며, 작품의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는 마치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대치하기 위해 존재했다는 듯 지나치게 가시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거대로봇이 적의 거대로봇과 육체적으로 부딪히는 모든 시퀀스는 영웅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시련에 대항하는 장면을 의도해 왔으며, 설령 주변의 사건들을 묘사하더라도 언제나 카메라는 거대로봇(과 파일럿)을 주체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거대로봇 아니메에 드라마를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그러한 경향이 최초로 깨어진 것이 바로 이 <잠보트 3>의 5화인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였던 것이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무크지 [토미노 요시유키 전작업](키네마준보 편집부, 1999)의 인터뷰에서 창작자가 전쟁을 다룰 때의 자세에 대해 논하며 '<잠보트 3>에서는 이전의 거대로봇 아니메가 다루지 못한 것을 다루고 싶었다.'라고 발언했다. 이 시퀀스가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들에게 포커스를 두지 않고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의식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1943년생인 토미노 감독은 태평양 전쟁의 말미에 태어났기에 실질적으로 전쟁을 겪지 않았던 '전후 세대'였다. 다만 그의 역사는 아마도 전쟁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 그리고 전후의 복구와 이민이라는 혼란의 시기와 함께 했을 것이다. 토미노는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더불어 그 사건을 겪어온 사람들로부터 '전쟁'이라는 커다란 이벤트를 체험해왔고, 자신이 TV에서 보아온 것들이 겪어온 전쟁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느껴왔을 것이다. <잠보트 3>, 특히 제 5화는 타자에 의해 직조된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당사자가 쌓아 올린 철저한 체현으로 봐야 옳다.


    장르론에서는 장르가 맹아기(혹은 발아기)에서 태동하여 동일 장르의 작품이 난립하는 고전기 그리고 기존의 장르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수정기를 거쳐 기존의 법칙들을 풍자의 용도로 쓰는 패러디기로 이동한다고 한다. 특히 수정기에서 수정된 요소들이 또 다른 분파를 만들면 그것이 새로운 맹아기가 되기도 해, 이렇게 장르가 분화되어간다. 수정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장르의 컨벤션과 아이콘들에 대한 정치적 재해석이다. 수정주의 웨스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랠프 낼슨 감독의 <솔져 블루>(1970)는 기존의 웨스턴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불공정성 - 원주민을 야만스러운 적으로 묘사하고 그들을 죽이는 기병대를 정의롭게 묘사하는 것 - 에 반발해 기병대가 원주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삽입했다. 이러한 재해석 덕분에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재해석되며, 영웅신화를 이탈한 다양한 웨스턴 장르가 분화되는 계기를 낳았다.


    <잠보트 3> 역시 기존 거대로봇 아니메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성, 즉 전쟁담론에 대한 재해석을 보인 작품으로 해석해야 한다. 거대한 세력과의 마찰을 단순히 이원화하여 그 중 '우리 편'만을 영웅화하는 담론 그 자체를 정면에서 부정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캇페이가 전쟁이라는 것에 뛰어드는 태도의 변화나 전쟁을 하나의 유희로밖에 여기지 않는 킬러 더 붓쳐의 태도, 궁극적으로 '지구인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기 때문에 이타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철저히 타자화된 마더 돌 8호의 태도 등 이 작품이 전쟁이라는 일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기존 로봇 아니메의 모든 컨벤션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장르적 분화와 재해석의 가장 중요한 기점은 설정과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제 5화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가 기존의 거대로봇 아니메가 가지고 있던 연출적 한계를 완벽하게 깨트렸기에 <잠보트 3>가 로봇 아니메라는 장르 전체를 뒤흔든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본작의 제작 당시, 토미노 감독은 자신과 함께하는 스태프들 그리고 스폰서인 완구업체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험 없이 전쟁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를 만든다면, '꼭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한다.'라는 아픔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無経験に戦争を舞台にするのなら「本当はこういう話作らなくちゃいけないんだよ.」という痛みをわからなければいけない.)" 그리고 그 후 <잠보트 3>를 만들면서 얻은 교훈들을 통해 완벽한 수정장르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을 완성해낸다. <잠보트 3>는 단순히 '동심파괴'나 '인간폭탄이 나오고 모두 다 죽는 미친 만화'로만 해석되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철저하고 집요한 작가적 성찰과 함께 하나의 장르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기동전사 건담>이 거대로봇 아니메를 뒤바꾼 작품으로 거론된다면, 그것의 앞 길을 닦아낸 <무적초인 잠보트 3> 역시 그와 같은 반열에 꼭 올라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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