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즈라이트의 강제적 코옵 게임들에 관해
비디오 게임 메커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럴싸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드슨 소프트의 1983년 작 「바이너리 월드」를 떠올리곤 한다. 이 게임의 메커닉은 1인에 의한 비대칭성의 동시조작을 그 중심에 둔다. 게임의 스테이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스테이지의 상단에만 협소하게 연결된 통로가 보인다. 플레이는 좌우의 두 캐릭터(패미컴 판이라면 펭귄)을 동시에 조작하는데, 양자는 Y축의 움직임은 공유하지만 X축의 움직임은 반대로 적용된다. 한쪽의 펭귄은 플레이어의 조작계 그대로 움직이지만, 반대쪽의 펭귄은 역전된 X축의 움직임을 가진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흐트러진 두 조작계에 적응해가며 두 펭귄을 골인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한다. 두 캐릭터는 연인이라는 설정이며, 플레이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게임의 메커닉은 명백히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그 불편한 조작계로 체험시키고 있다.
「바이너리 랜드」는 1인 플레이 게임이지만 이 게임을 통해서 코옵 플레이라는 독특한 수용자성의 면모를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코옵 플레이, 그러니까 '두 플레이어의 협업'이라는 개념에는 양자간의 어긋남과 불응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코옵 플레이의 핵심은 둘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그 맥락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아케이드용 코옵 플레이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파이어 트럭」 역시 전열차와 후열차를 각자 움직여 목적지까지 간다는 '어긋남'의 감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플레이의 쾌감은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간섭해 해결 불가능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전제한다. 두 플레이어의 놀라운 협응이 혼돈을 정지시킬 때에 쾌감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코옵 플레이의 메커닉, 아니 그보다는 코옵 플레이를 발생시키는 전제는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따라가며 점차 변화해왔다. 그 미묘한 변화는 둘의 ‘차이’를 얼마나 벌려놓는지의 문제와 관계된다. 예를 들어 닌텐도의 「마리오 브라더스」나 타이토의 「버블 보블」, 테크노스 재팬의 「더블 드래곤」 같은 아케이드 코옵의 대명사같은 게임들은 차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좁혀놓는다. 이들이 언제나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는 양자(1플레이어와 2플레이어)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가 붙는다. 형제 또는 쌍둥이라는 설정은 그 동질성을 구태여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코옵 플레이는 협력성이라는 목표지향은 작동하고 있었을지언정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오직 상황적 문제로만 제기되었다. 「마리오 브라더스」의 경우, 뒤집어진 적을 쳐내려는 찰나에 다른 플레이어가 그 적을 되돌려놓아 어이없게 사망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이 때에 둘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란 '나'라는 플레이어 역시 작동시킬 수 있는 수행성의 가능태로서 존재한다. 즉 이 사건들의 통제 불가능성은 '나'의 대행된 몸을 통해서 유추하거나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다. 이런 전제를 경유하자면, 이 때 코옵 플레이의 대상인 두번째 플레이어, 이른바 '너'는 구태여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존재하기에 흥미로워지는 국면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게임을 올바르게 돌파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되는 면도 있었던 셈이다. 이 형태의 '너'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차이는 오히려 그것의 필요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것 아닐까? '내'가 돌파할 수 없는 것을 '너'라서 돌파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의 방식만으로는 유추와 재현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주는 방법으로서의 '너'를 마주시키는 것이 변화의 명제였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는 기능이 같지만 특수 공격에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서유항마록」 정도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로 하여금 '캐릭터를 통해 어떠한 해결법을 제시하겠다'라는 차이의 문제가 드러난다. 캡콤의 「파이널 파이트」 까지 온다면, '숙련된 내가 더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를 선택해 너를 보조하겠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다름의 방식이 도래한다. 캡콤은 이런 탐구의 선지자이며 선구자다. 이 방식의 극한을 아케이드라는 공간에서 체험시킨 것이 바로 「던전즈 & 드래곤즈 : 섀도우 오버 미스타라」(이하 「SOM」)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클래스는 서로 다른 조작, 기능, 해법, 필요를 지닌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클레릭에게는 치료를 요구하고, 특정한 무기나 아이템은 다른 이의 기능을 위해 양보한다. 상자를 여는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템의 다이내믹함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결정과 연결된다. 이 때 중요한 건 플레이에 그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티에 클레릭이 없다면 치료 마법을 요구할 수 없다. 매직 유저가 없다면 광역 마법을 통해 적을 일소하거나 보스를 빠르게 다운 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SOM」은 함께 플레이하는 타인의 존재가 소통의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체험을 준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근간이 여기에서부터였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은 아닐 수 있다.
동질성과 차이의 문제를 지나치면 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필요성의 문제다. 차이의 발생과 필요성의 발생은 온건히 맞물리지 않는다. 클레릭이 있다면 치료를 요구할 수 있지만, 치료 마법은 게임 플레이의 충분 조건은 되더라도 필요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더 뛰어나면, 숙련되어 있다면, 적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안전한 루트를 알고 있다면 '너'의 도움을 구태여 받을 이유는 없다. (물론 있는데 구태여 만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너'가 다르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되었다. 하지만 '너'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근원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너'는 여전히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 없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너'를 지우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교롭게도 비디오 게임이 기술 기반의 매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비디오 게임은 포커를, 바둑을, 보드게임을 혼자서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의 연산 처리 능력은, 때로 '너'의 필요성을 지우기 위해 동원된다. TT 게임즈의 레고 게임 시리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샘플이다. 이 시리즈에는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한 사람이 플랫폼을 만들어준 사이에 점프해 넘어가기' 같은 협력 기반의 퍼즐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태여 인간인 '너'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홀로 플레이하는 나에게는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할 AI 서포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버튼을 함께 눌러주고, 내가 점프하는 동안에 플랫폼의 형성을 유지시켜 준다. 그러고보면 「SOM」에도 여러개의 발판 스위치를 눌러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긴 하지만, 그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을 대신할' 갑옷상像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이에 더해 적 캐릭터를 이용해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물론 비디오 게임이 꼭 '너'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가부터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이미 ‘네’가 존재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너’와 ‘나’를 어떻게 관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더 논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전까지 말한 두 가지 명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첫째, 차이를 가질 것 그리고 둘째, 상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 중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서 '너'를 요구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전제를 수렴한다면, 이 안에는 ‘나’와 ‘너’라는 관계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즉, 1플레이어인 ‘나’에게 있어서 ‘너’는 무관계한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너’는 필요한 협력의 존재로서 바로 ‘나의 플레이’라는 세계에 초대되어야 한다. 즉 ‘나’와 ‘너’가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사건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은 두 종류의 근원어, ‘나-너’와 ‘나-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부버는 ‘나-너’라는 근원어는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그것’의 근원어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이는 사뭇 운명적이다. 이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는 내가 대상을 관찰, 계측, 수량화, 가치 매김 등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지칭한다. 부버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형상과 흐름은 ‘나-그것’을 향해 가는 결정론을 지니기에, ‘나-너’에 대한 지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부버의 논의가 가진 거대함을 비디오 게임의 코옵 플레이에 적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의 규정은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게임의 수량화된 세계를 감각하는 우리의 체계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나-너’라는 관계, 대상을 ‘그것’이 아닌 더 본질의 무언가로 감각하고 존치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