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김낙호는 《한국현대만화사》에서 90년대 한국 만화를 ‘체질변환’이라 정리한다. 한국 만화사라는 관점으로 보면 90년대는 단절의 시기다. ‘드래곤볼 쇼크’는 한국 만화에 주간 만화 잡지와 일본 만화 문법을 안치시켰다. 이 현상에 이유를 말하는 건 쉽지 않다. 70년대 발휘되기 시작한 만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 해적판 만화의 범람, 게임/아니메 세대라는 90년대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한 파격적인 인선 등 복잡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6~70년대 한국 만화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90년대의 신진 작가들에게 한국 만화의 역사는 단절되어 있었다. 이는 아카이빙의 부재가 만든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도제 시스템을 통해 젊은 작가들에게 DNA를 뿌리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소년 챔프》의 파격적인 신인들은 도제 문화를 우회했고, DNA의 전달은 차단된다. 그들의 유전적 자산은〈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위시로 하는 일본의 대표적 소년 만화들 그리고 80년대를 기점으로 급성장한 일본 비디오 게임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차라리 데즈카 오사무와 시라토 산페이, 나가이 고로 타고 올라가는 흐름일지도 모른다.
이 시기 한국 활극·액션 만화는 6~70년대와 달리 액션의 세트 피스를 전반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이 경향은 스포콘(스포츠 근성) 만화를 뿌리로 삼는 배틀 만화, 〈드래곤볼〉같은 작품들이 가지는 특징의 유용이다. 하나의 전투가 시작되면 배틀 필드가 만화의 전체를 지배하고, 주요한 드라마는 대결의 내부에서 전개되거나 해소된다. 〈협객 붉은매〉는 이 경향성의 극단으로 대대붕과의 전투가 몇 권이나 이어진 것으로 독자들에게 원성을 살 정도였다. 오히려 1965년의 스포츠 만화, 박기정의 〈도전자〉등은 시합에서의 합의 교환보다 교차편집된 드라마를 통해 시합의 감정적 맥락을 강조했다. 90년대의 경향은 80년대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등과도 달랐다. 방학기 역시 격투씬에 디테일한 내레이션을 삽입해 엑스터시보다는 감정적 해설에 더 공을 들였다. 하짐나 90년대 한국 활극·액션 만화는 힘의 충돌을 드라마의 중심에 넣었으며, 소위 ‘필살기’가 교차하는 장면들이 도드라졌다. 〈다이어트 고고〉의 패왕 중력파, 〈8용신 전설〉의 뇌격장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특성은 한국 만화에 강하게 드리운 멜로 드라마 양식과의 차별점을 낳았다. 배리 랭포드는 《영화 장르》에서 멜로 드라마 양식을 “선정적인 사건이 가득한 파란만장 서사, 강렬한 무대 요소와 강력한 정서적 태도, 노골적으로 일그러진 인물들 속에 구현된 도덕적 절대성들 간의 적나라하고 단순화된 대립 등”으로 정의한다. 오명천의 〈창〉 과 그 휴예인 황재와 이재학의 무협만화들은 복수극 서사를 통해 멜로 드라마를 실행했다. 물론 90년대 활극·액션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인하·김낙호가 지적했듯 만화의 중심이 서사에서 캐릭터로 옮겨가며 드라마의 균형이 달라진 탓이다. 이 시기 한국 만화에 큰 영향을 끼친 두 만화가 명시된 드라마보다 운동성에 더 공을 들인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였다는 영향도 고려해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90년대에 일본 만화의 특징이 안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성의 부재라는, 거대한 공동(空洞)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만화는 시대의 강력한 정동에는 부합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데에는 일정량 실패하고 있었다. 아카이빙의 부재는 역사와의 연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급격히 성장하는 시장엔 내부를 채울 공통의 형식이 없었다. 허영만 화실 출신인 김준범이 ‘연고 서열을 깨고 파격적인 데뷔’(《한국현대만화사》)를 했다는 서술은 당대에 대해 두 가지를 인증한다. 당시에도 화실에선 ‘연고 서열’이 중시되었다는 점, 또 하나는 90년대가 그러한 전통성을 깨야 할 정도로 인력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연이은 ‘비화실 출신’ 작가들의 범람까지 본다면 당시 한국 만화가 당대 독자들의 기호, 시장의 성장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드래곤볼 쇼크’는 한국 만화의 부재 상태에 대한 처방적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난 장르의 발생을 일으킨 이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극도로 빠르게 소진된다. 도서 대여점의 발생뿐만 아니라, 형식적 차용의 한계지점이 드러난 탓이기도 하다. 일시 부흥했던 일본 장르 만화의 차용은 90년대 말기에는 점차 힘을 잃고 특정한 장르로 급격히 그 문을 좁힌다.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에서 100만부 신화를 만들어냈던 〈진짜 사나이〉와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영향으로 학원 액션 만화가 필두에 섰다. 이후에도 학원 액션 만화의 신화인 〈짱〉을 비롯해 〈니나잘해〉, 〈삐따기〉, 〈럭키짱〉이 대여점에 즐비하게 늘어선다. 한편 무협 만화 역시 그 지속성을 갖춘다. 90년대 이후를 관통한 2대 무협 만화인 〈열혈강호〉와 〈용비불패〉가 좁고 긴 통로로서 한국 무협 만화의 계보를 지탱해갔다. 물론 90년대에 수용된 일본 장르 만화의 형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새로운 계보 내부에 일본 만화의 형식은 녹아든다. 무협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연쇄된 배틀로 서사를 유지해나간 〈열혈강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시기 수용된 일본 만화의 장르적 형식은 한국 만화에 무난히 안치된다.
90년대라는 거대한 해체와 재구성, 쇠락의 시기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드래곤볼 쇼크’의 만화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공동에 들어선 장르가 학원 액션과 무협이라는 점이다. 학원 액션은 〈비바 블루스〉등 일본 양키 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장르지만, 그 뿌리가 일본의 야쿠자 장르인 임협(任侠) 영화의 영향권이라는 점에서 협의 연장성상에 있다. 즉 이 두 장르는 모두 협(俠) 장르라는 점이다. 힘과 운동, 격투와 충돌의 만화가 끝나자 이들이 나타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후략)
※본 원고의 전문은 2023년 발간된 <지금, 만화> 29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