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출산 일기
눈을 뜨니 아직 캄캄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반. 임신한 이후로는 꼭 자다가 한두 번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깼으니 그러려니 했다. 시원하게 비우고 뒤처리를 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축축한 휴지를 보니 선홍빛이 뚜렷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흔히들 이슬이라고 부르는, 살짝 핏기가 어린 분비물이었다.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신호 중 하나이다. 출산 징후에 대해 읽을 때마다 나중에 내가 이슬인지 아닌지를 못 알아채면 어떻게 하나 늘 걱정했는데, 이건 여섯 살 조카가 봐도 알아볼 만큼 명백한 큐사인이었다. 조산사 선생님께 얼른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면 오늘 중으로 진통이 시작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며 상황을 계속 알려달라는 답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슬슬 아랫배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잠깐 아프다가 괜찮아지고, 그러다 잠시 후에 싸르르한 느낌이 다시 밀려왔다 사라졌다. 곧 출발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샤워를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를 만나러 가는데 목욕 재개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다 씻은 다음에는 몇 주 전부터 출동대기 중이던 출산 가방을 마저 챙겼다. 그동안 배는 점점 자주 더 강하게 아파져 왔다. 그럴수록 깊은숨을 쉬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상태라는 사실에 놀랄 정도로 나는 평온했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켰다. 이제는 업어가도 모르게 자고 있는 짝꿍을 깨울 때였다.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 짝꿍이 재빠르게 씻는 동안, 나는 집을 대충 정리해 놓고 조산사 선생님께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저 지금 출발합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한 시간 반 남짓한 거리였다. 자연주의 출산이 가능한 가장 가까운 병원이었다. 거리가 꽤 되다 보니 출산이 닥쳤을 때 차가 막히거나 눈이 많이 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곤 했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그 걱정이 무안하리만큼 캄캄하고 고요했다. 진통이 오면 파도에 몸을 맡기듯 조용히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러다 스르르 흘러가고 나면 다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정하지 못한 아기 이름도 고민하면서 쉬지 않고 달렸다. 아직은 생각보다 할 만하다 싶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병원에 도착했다. 곧 셋이 되어 나올 병원 앞에서 해맑게 웃는 둘만의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리는 분만실로 향했다.
출산 전에 미리 확인해 두었던 자연주의 분만실은 병실보다는 집에 더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 널찍한 방에는 병원 침대가 아닌 일반 침대가 있었고, 욕조와 짐볼 등 통증 완화를 위한 각종 시설과 기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나는 평소 입던 편안한 잠옷 원피스를 꺼내 입었고, 그 사이 짝꿍은 우리가 함께 쓴 출산계획서를 의료진이 잘 볼 수 있도록 분만실 문에다 붙였다. 그런 다음 집에서 싸 온 간식 꾸러미를 꺼냈다. 새벽 내내 깨어있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나는 방안을 걸어 다니면서 바나나와 두유 같은 것들을 쩝쩝거리다가 진통이 오면 잠시 짐볼 위에 엎드려 감통하기를 반복했다. 조산사 선생님이 종종 드나들며 상태를 확인했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은 나와 아기가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미리 저장해 온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놓고 우리는 아기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뒤로는 한동안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니, 시간이 뭉뚱그려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진통이 점점 강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동시에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창문을 가렸고 조명도 어둑어둑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도 가늠할 수 없었다. 진통은 점점 세져서 마침내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수준의 고통과 인내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졸고 있는 내가 참 신기하고도 웃긴다는 생각만 어렴풋이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산사 선생님이 힘주기 연습을 해보자고 했다. 최종 리허설이었다. 대변을 볼 때처럼 힘을 줘야 한다, 호흡은 길게 해야 한다, 그동안 수없이 머릿속에서 이미지트레이닝을 하며 준비했었는데, 고통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전에서는 역시나 내 맘처럼 쉽지 않았다. 밀려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진통은 점점 더 잦아지며 강해졌고, 무엇보다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조산사 선생님의 호출에 의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드디어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짝꿍의 손을 꼭 잡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내 몸에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짰다. 드라마에 익숙하게 나오는 출산 장면과는 달리 소리는 한 번도 지르지 않았다. 원래 무서운 놀이 기구를 타면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숨을 삼키는 쪽이기도 하지만, 자연주의 출산을 준비하면서 출산을 공포가 아닌 환희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덕분이었다. 최대한 차분하고 평온하게 아기를 맞이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소리 지를 힘까지 모아 아랫배로 내려보냈다. 드디어 아기 머리가 보인다는 짝꿍의 말에 ‘한 번만 더. 조금만 더. 우리 같이 힘을 내자, 아가야!’ 혼자서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면서, 들이쉰 숨을 꾹 참고 있는 힘껏 밀어냈다.
미끄덩. 갑자기 무언가 크고 따뜻한 덩어리가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애앵’하는 가녀린 외마디 소리와 함께 아기가 내 뱃속이 아닌 배 위로 찾아왔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너무 작고 빨개서 손을 대기에도 조심스러운 아기를 끌어안는 순간, 조금 전까지 죽을 만큼 아팠다는 사실은 싹 잊고 그저 무사히 나와준 아기가 너무 신기하고 대견했다.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내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원래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감성 충만 울보인데, 그래서 아기가 태어날 때도 엄청나게 울 거로 생각했었는데, 정작 이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에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저 얼떨떨했고, 동시에 안도했다. 역시나 예상과 실제는 여러모로 달랐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간단하게 몸을 닦은 후 아기는 내 배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직 뛰고 있는 탯줄을 만져보라는 조산사 선생님의 말에 손을 아래로 뻗었더니 맥이 뛰고 있는 땡땡한 고무관 같은 것이 만져졌다. 처음 느끼는 묘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탯줄로 연결된 아기와 살을 맞대고 우리 세 식구만의 시간에 한창 빠져 있는데, 조산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배에 힘을 줘보라고 했다. 다시 한번 뜨거운 미끄덩. 태반이 쑤욱 통째로 빠져나왔다. 뱃속의 아기를 감싸주던 검붉은색 주머니가 어찌나 신기하고 고맙던지, 아기와 나란히 놓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태반에 연결된 탯줄을 자르면서 아기는 마침내 홀로서기를 했다. 조금 더 자유로워진 아기는 아빠 배 위에서 살을 맞댄 채 캥거루 케어를 했고, 세상에 나와 처음 자기 힘으로 젖을 물었고, 그렇게 한참을 더 엄마 아빠와 함께 있다가 여러 기본 검사를 하러 이동했다. 우리가 원했던 대로 너무나 여유롭고 평온하고 온전한 첫 만남이었다. 엄마와 아기의 주체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한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경험이었다.
아기를 기다리던 38주는 영원 같았고, 진통의 시간은 억겁 같았는데, 출산의 순간은 찰나였다.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임신부에서 엄마로 진화하였다. 내 몸 상태를 기준으로 붙여졌던 임신부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이제 아기라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역할이자 정체성을 새로 부여받은 것이다. 내가 엄마라니. 나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자라날 한 생명을 책임지고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니. 뭉클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막연한 상상과 다짐뿐인데, 무엇을 예상하고 기대하든 다가올 실제와는 매우 다를 거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다만 자연주의 출산을 선택했던 임신부 노현정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 노현정도 세상의 이러쿵저러쿵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세 식구에게 소중한 가치를 좇아 굳건하게 나아가는 용기와 배짱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건강한 엄마, 엄마보다 더 건강한 아기, 그래서 따로 또 같이 행복한 엄마와 아들 사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