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자아 사이
늦은 오후, 어김없이 유아차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생애 첫 감기에 걸려서 콧물이 주르륵 흐르는 아기를 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이럴수록 맑은 공기를 쐐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큰 찻길을 건너고, 하교하는 아이들로 왁자지껄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아담한 동네 도서관을 지나 공원에 다다랐다.
여느 때처럼 유아차에 아기를 태운 채 산책로를 돌다가, 문득 오후 햇살 내리쬐는 금빛 잔디밭이 아주 포근해 보였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좀 서늘해졌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잠시 아기를 내려줘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유아차를 탄 지도 거의 30분이 되었으니 안 그래도 활발한 유자가 좀이 쑤실 만도 했다. 그 순간, 이 공원을 산책하며 볼일을 보는 수많은 강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어린 시절 뉴스에선가 책에선가 들어본 ‘쯔쯔가무시병’이라는 단어도 번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걷지 못하고 뭐든 입에다 넣는 유자를 보니 망설여졌다.
너른 풀밭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그때, 문득 지난봄에 놀러 왔던 독일 친구네 가족이 생각났다. 9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여행 온 친구는 ‘코리안 바비큐’가 먹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함께 고깃집에 갔다. 아기 의자에 앉아서 이유식을 다 먹고 난 친구의 아기는 지루한 듯 몸부림을 쳤고, 내 친구는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를 식당 바닥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마룻바닥도 아닌 우리가 신발을 신고 다니는, 그냥 맨바닥이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를 보더니 친구가 익숙한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유럽 아기잖아. 그냥 이렇게 둬도 괜찮아! 우린 원래 그래.”
안 그래도 한국 지하철이며 식당에서 아이를 바닥에 내려둘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고 했다. 내 친구는 한국어를 조금 이해할 수 있는데, 한 번은 자기를 혼낸 것이 분명한 어떤 할머니도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아기를 바닥에 두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아기에게는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건강한 일이며, 자연스럽게 면역력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했다.
맞는 말 같았다. 아기를 아기 의자에 앉히거나 유아차에 태우는 것도 사실 어른들 편의상 혹은 필요에 따라 하게 되는 일이지, 마음껏 움직이며 탐색하고 싶은 아기에게는 그리 편하고 기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고깃집 바닥은 좀 너무 하드코어가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아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과보호하지 않는 육아 철학은 평소 내가 막연하게 그리던 방향에서 한참 앞서가 있었다. 충격적이고도 마음에 들었다.
고깃집 바닥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싶은 생각을 하며 아기를 잔디밭에다 내려놓았다. 낯선 촉감 때문인지 어리둥절하던 유자는 잔디를 몇 번 만지작대더니 이내 히죽 웃으면서 잔디를 뜯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가닥 입에 집어넣어 보더니 더 신이 났는지 갑자기 앞으로 마구 기어가기 시작했다. 유아차에 앉아 있을 때는 가만히만 있길래 졸린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예상보다 훨씬 좋아하는 모습이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돌진하는 아기를 따라간 곳에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노란 꽃송이 옆 하얀 민들레 씨앗을 움켜쥐려는 듯 손을 뻗는 아기보다 내가 더 빠르게 다가가서 입바람을 후 불었다. 하얀 민들레 씨앗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기 얼굴 앞에서 민들레 씨앗을 한 번 더 후 날려 보냈다. 유자가 갑자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후후’ 거리는 엄마가 재밌는 건지, 날아가는 하얀 물체가 재밌는 건지, 민들레 씨앗을 서너 개쯤 다 불어 없앨 때까지 아기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는 아기를 따라다니다 보니 늙은 엄마인 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잠시 아기를 데리고 벤치에 앉았다. 하지만 이미 흥분상태가 된 아기는 쉴 기색이 없었다. 이번에는 벤치 뒤에 곧게 뻗은 나무 둥치를 만지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느낌이 나쁘지 않은지 그 작은 손으로 연신 통통 치며 또 까르르했다. 나무 껍데기에 긁히거나 손톱에 뭐가 박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또 먼저 올라왔지만, 그래서 못 하게 하기보다는 내가 눈을 떼지 않고 더 잘 지켜보자 싶었다.
잔디, 민들레, 나무와 실컷 논 아기는 그제야 졸린지 하품하기 시작했다. 마침, 아까보다 해는 낮아지고 바람은 더 차가워져서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임을 알려 왔다. 성공적이었던 잔디밭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기는 내 생각보다 자연을 즐기는 방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도시보다 자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출산 전부터 아기도 자연과 함께 자랐으면 좋겠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막상 낳고 보니 작고 연약한 아기를 그저 안전하고 건강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게다가 아직 말도 못 하고 움직임도 자유롭지 않다 보니, 자연에 데려가더라도 본의 아니게 유아차나 아기띠 정도의 거리감을 늘 두게 되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잡고 걷기 시작하면서 호기심이 한층 왕성해졌으니, 아기와 더 자주 밖으로 나가야겠다. 추우면 추운 대로 찬 바람을 쐬고 더우면 더운 대로 뜨거운 햇볕과 씨름하면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 좋겠다. 사실 그러려면 내가 많이 내려놓아야 함을 깨달았다. ‘혹시나’ 싶은 강아지 대소변이나 쯔쯔가무시병보다는 ‘역시나’ 아기를 즐겁게 해주는 잔디와 민들레를 더 먼저, 더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땅바닥에 함께 철퍼덕 앉는 것도 개의치 않아야 하고, 아기 바지의 무릎이 거뭇거뭇해져서 때가 빠지지 않더라도 괜찮아야 한다. 물론 아기에게 위험하거나 해로운 것들은 없는지 살핀다거나 놀고 나서는 꼼꼼하게 닦아주는 철저함은 필요하겠지만, 그건 내가 이미 잘하고 있는 일들이니 이제는 마음 내려놓기를 더 연습해야겠다.
이렇게 나의 다음 과제가 정해졌다. 생명을 생명답게 억압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키워내기. 아이가 자라는 단계 단계마다 업그레이드된 과제가 등장한다더니, 참 쉽지 않다. 하긴, 귀한 사람 하나가 만들어져가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울쏘냐.
*이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 및 동명의 다음채널에도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