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은이) | 정철수 (옮긴이) | 갑인공방 (갑인미디어) | 2005-06-20 | 원제 Martin & Malcolm & America (1992년)
이 책은 지금은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다.
몇 년 전, 집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가 재고도서 정리한다는 글을 보고 값이 싸다는 이유로 몇 권 집어온 책 중에 섞여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아마 맬컴 X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맬컴 X가 누군지 몰랐다. 마틴 루터 킹이야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워낙 유명한 연설이 있으니 암살당한 미국의 목사이자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흑인 지도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사실 난 맬컴 X보다는 말콤 X라는 표기에 더 익숙하고, 미국의 슈퍼히어로물의 악당 조연쯤 되는, 또는 스파이물 소설 속 등장인물쯤 되는 줄 알았다.
역시 우연한 기회에 중고로 구입한 책,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을 읽고, 그 책의 작가가 이 맬컴 X의 자서전을 집필하기 위해 인터뷰를 했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쿤타킨테로 유명한 뿌리라는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뿌리를 다 읽고 난 뒤, 이 책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묵직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미국 흑인 노예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은 여전히 흑백갈등이 벌어지는 나라이고,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음에도 그 갈등은 여전하다는 것, 그리고 트럼프라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뒤로 공공연하게 인종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만나게 된다.
사실 이 책은 쉽게 리뷰를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순히 책을 읽은 소감을 적는 것도 무언가 맞지 않는 것 같고,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려니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이 책의 주인공인 맬컴 X와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흑백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흑인 지도자들이고, 선택한 방법이 서로 극단적으로 달라서 더욱 비교가 된다.
맬컴 X는 무슬림 종교를 가졌고(나중에는 그마저 버렸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은 기독교 목사다. 역시 종교적으로도 서로 극단을 달린다.
마틴 루터 킹이 철저하게 미국 주류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무난한 입장을 견지하며 평화적인 갈등 해소에 노력을 했다면, 맬컴 X는 성장과정에서부터 종교, 흑인 해방을 위해 선택한 방법까지 미국 주류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
두 사람은 비슷한 방법으로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맬컴 X는 1965년, 마틴 루터 킹은 1968년 각각 암살당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생 딱 한 번 잠깐 마주쳤을 뿐, 단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특히 말년의 마틴 루터 킹은 맬컴 X를 상당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흑인 해방 운동의 방법이나 노선이 급격하게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만일 마틴 루터 킹이 그렇게 암살을 당해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오래도록 살아 있었다면 아마 그의 운동 방향은 맬컴 X를 많이 닮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책 말미에 흑인 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비교해서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당시,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적었고 여성인권을 말하는 목소리는 작았다고 한다. 흑인이 백인에게 당한 피해를 생각하는 만큼 여성이 남성에게 당하는 피해, 소수가 다수에게 당하는 피해에 대해 다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세상은 늘 가진 자, 강한 자에 의해 없는 자, 약한 자가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 어이없음을 얼마나 잘 해결하고 갈등을 없애느냐에 따라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 아닐까?
때가 때이니만큼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가 지금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켜고 모이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 권력을 가진 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침몰하도록 만들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참고 살 수 없어서 뛰쳐나온 것 아닌가 말이다.
공교롭게 뿌리라는 책을 읽고, 다시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을 읽었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어떤 책을 읽게 될지 모르겠다.
이 책과 함께 산 다른 두툼한 책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올 겨울에는 지금 눈에 띈 이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붉은 표지에 거칠게 쓰인 제목은 “미국의 거짓말”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들...
71P
마틴은 대다수의 백인이 흑인들이 백인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두려움’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종종 서로 미워한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한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소통할 수 없다. 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마틴은 평생에 걸쳐 이 말을 반복했다. 이 말은 마틴의 꿈의 토대가 되었던 통합주의 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가진 자들은 왜 그토록 악독할까? 나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거다. “그들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값싼 해결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181P
이것이 미국의 흑인이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당신이 흑인에게 “덤벼!”라고 말하면 그는 어느 누구라도 깨물 것입니다. 한국에 간다면 지구 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 당신이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미시시피로 돌아오자마자 흑인은 백인이 문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강간하는 것을 보아도 무릎을 덜덜거리며 구석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당신이 그곳에 서서 “덤벼!”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깨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예전에 읽었던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나라의 모든 장정들이 오랜 기간 다른 나라를 정벌하러 떠난 뒤, 남은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들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몇십 년인가 만에 귀향을 했는데, 노예들이 무기를 들고 덤비더란다. 아무리 싸워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귀향한 장정들이 갑자기 채찍을 들고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그렇게 당당하게 다가섰단다. 그때까지 힘써 싸우던 노예들은 채찍 앞에서 공포에 휩싸였고, 결국 옛 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단다.
- 어린 코끼리의 발목에 노란 밧줄을 묶어두면 나중에 그 밧줄을 충분히 끊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뒤에도 코끼리는 밧줄을 끊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던가?
436P
맬컴은 “못된 검둥이” 역할을 자임하면서 “재미없어도 웃고” “가렵지 않아도 긁는 것”을 거부했다.
-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 이게 노예의 삶이라는 말이다.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자유’의 기본이자 핵심이라는 건데, 지금 나는 자유로운가? 잘 모르겠다.
522P
미국의 우월성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 나라는 외계의 다른 행성들을 탐험하기 위해 우주선을 건조할 과학적, 기술적, 재정적 자원은 마련할 수 있지만, 가난한 시민들에게 음식이나 잠잘 곳을 제공할 수는 없는 나라다.
- 이건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강이란 강은 모조리 파헤치는 데에 몇 십조를 쏟아부을 수 있고, 국방선진화라는 명목으로 부정하게 나랏돈을 뒷주머니로 챙기는 종자들에게는 ‘생계형 비리’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줄 수는 있어도, 말도 안 되는 전기요금 폭탄을 없애는 건 안 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몇 백 명이 수장되는 사태가 벌어져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권력자들이 뻔뻔하게 미소 짓는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다. 2017년에는 좀 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