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익숙해진다는 것​

나를 위한 변명

by NoZam

지난 봄, 타던 차를 없앴다. 일부러 없앤 건 아니고, 고장이 났는데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이 그 차를 팔아도 안 되는 수준이라 폐차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차를 팔고 나서 다시 살까 생각을 했는데 지금으로써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새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 수입이 말도 못할 정도로 불안정한 데다가 모아둔 돈도 이런 저런 이유로 거덜이 나 버린 상황이니 별 수 없다.

차를 없애고 나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께서 외출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대형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고, 교통편이 불편한 동네에 갈 일이 생기면 한숨부터 나왔다.
지난달에는 부산으로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난생처음 KTX를 타 봤다. 부산역에서 내려서 목적지까지 가는 건 또 얼마나 피곤하던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땡빚을 내서라도 차를 사야지, 이거 원...”

벌써 8개월째 차 없이 지나가고 있다.
내가 처음 내 차를 산 게 아마 94년이었을 거다. 친구 녀석이 끌고 다니던 프라이드 구형,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고물을 오십만 원 주고 가져와서는 털털 거리며 끌고 다녔다. 그 후로 20년 넘게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꽤 익숙했었나 보다.

차 없이 생활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싶다. 교통카드에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신경 쓰고, 외출할 때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게 불편하기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응이 어렵지 않다.
물론 요즘도 종종 이렇게 중얼거리기는 한다.
“땡빚을 내서라도... 젠장.”

오래전 TV에서 신년특집으로 했던 ‘습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사람은 갖고 있는 습관을 버리거나 새로운 습관을 갖기 위해서 무척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무심코 해오던 걸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변하고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생각만큼 오래 걸리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60여 일이라고 한다. 아마 66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신청을 받고 몇 명을 선정해서 실험을 진행했다.
담배를 끊고 싶은 직장인, 방 정리를 못하는 여대생 정도가 기억난다.
방법은 간단하다.
해야 할 일을 적는다. 구체적으로, 시간까지 정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해야 할 일 목록을 두고 제대로 했는지 점검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그렇게 매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점검했고 꾸준히 실행에 옮겼다. 물론 감시의 눈, 카메라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두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정한 대로 했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예정했던 기간이 지나고 실험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제작진들은 불시에 실험 참가자를 찾아갔다. 금연을 목표로 한 직장인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방안에 먼지가 테니스공만 한 크기로 굴러다니고 침대에서 책상까지 오솔길이 나있던 여대생의 방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해오던 걸 멈추는 게 어색하다고...

익숙해진다는 것.
그건 어쩌면 이런 걸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것. 내가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 것이 되는 것.

아이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마음이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제로 무척 힘 들기도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비참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냥 살아라 한다. 눈물 나게 슬프고 아픈데 그러려니 살라고 한다.
심지어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냥 웃고 넘기며 살아가라 한다.
그게 삶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고 밤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면 여섯 살배기 딸아이와 전쟁 같은 하루를 치러내고, 아이를 꼭 안고 이부자리에 들면서 그렇게 살아졌다.
겨울을 넘기고 부모님과 함께 살림을 합치고 아이는 친구들과 헤어져서 낯선 동네에서 새로운 유치원에 가고...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갔다.

문득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으며 다시 보니 고등학교에 가야 한단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힘들고 아프고 괴롭다던 나는 여전히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젠 이혼한 남자라는 수군거림도 무심하게 흘려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만큼 그런 말에 익숙해졌다는 말이겠고, 그런 말이 더 이상 내 발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지 못할 정도로 그저 그런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혼자 차려 먹는 끼니.
딸아이의 진학 고민.
집 청소하기.
말 그대로 이젠 익숙하다.
할 만하고, 제법 그럴듯하게 잘 해낸다. 여유 있게...

문득 궁금하다.
익숙해졌을까? 그 사람도...
혼자 자는 잠.
혼자 사는 집.
혼자 먹는 밥.
혼자 하는 그 모든 것들...

그 사람도 이젠 익숙해졌을까?
내가 지워진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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