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술사입니다.

나를 위한 변명

by NoZam

“마술사입니다.”
이건 전혀 뜻밖의 대답이다. 마술사? TV에서 가끔 보곤 하는 그 마술사?
“정말요? 와! 마술사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데요?”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잘게 찢긴 냅킨은 도로 멀쩡하게 나타났고, 담배가 사라졌다가 내 팔꿈치에서 튀어나왔다. 이빨로 물어뜯은 고무줄이 다시 붙었고, 동료의 반지는 어느 새 내 귓구멍에서 빠져나왔다.

술을 마시던 우리는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마술사 맞군요. 대단하시네요.”
속으로는 그 모든 마술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난 봄, 회사에서는 새로 진행하게 될 프로젝트 때문에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청담동 구석 지하에 있는 호프집이었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무척 어색하게 들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술을 통째로 들이 부어도 취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덩치는 크고 배가 불룩 나온 데다가 덥수룩한 수염까지, 흔히 하는 말로 산적 두목같이 생겼다.
하긴 나도 거의 술을 마시지 않지만, 보는 사람마다 술 잘 마시게 생겼다는 말을 듣곤 하니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 날 이후 가끔 만나서 함께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결국 예산 문제로 접어야 했지만, 마술사와 나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알고 보니 대학 후배였고, 사는 동네가 비슷했으며, 말도 제법 잘 통했다.
몇 달 지나서 내가 새로운 일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마술사는 내게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짬짬이 간단한 마술을 몇 개 배웠다. 고무줄로도 재미있는 마술을 연출할 수 있게 됐고,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 손바닥에 도장을 꽝 찍을 수도 있게 됐다. 심지어 수많은 카드 속에서 상대방이 선택한 단 한 장만 내 손에 딱 붙어 따라오게 만들 수도 있다.

문득 궁금했다. 마술사는 도대체 어떻게 밥벌이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 마술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밥벌이가 제대로 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뭐로 먹고 사냐?”
“마술이요.”
“마술이 밥벌이가 돼?”
씁쓸하게 웃던 이 친구가 입을 열었다.
“별로 안 되죠.”
무대에 서서 화려한 마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밥벌이가 될 수 없단다. 그래서 마술을 써먹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단다.
몇 년 전부터는 영화판에서 일을 한단다.
“마술사가 영화에서 무슨 일을 해?”
“CG 없이 특수효과 낼 때 마술 기법을 사용한다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자신이 만든 방법을 이용해서 촬영을 진행하게 되면 CG로 효과를 내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비용도 많이 절감되기 때문에 할 만하다고 한다.

마술사라는 직업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자신을 소개할 때, “안녕하세요? 마술사입니다.” 이 말 한 마디가 갖는 힘은 꽤 크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잊지 않는다. 나중에 전화를 할 때 그 효과는 빛을 발한다.
“안녕하세요? 일전에 인사드렸던 마술사입니다.”

언젠가 늦은 밤, 퇴근길에 마술사를 만났다.
그 날, 나는 꽤 우울했다. 한동안 공을 들였던 일이 무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고, 벤처창업경진대회 2차 심사에서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사무실에서 만난 예의 없는 거래처 사장에게 “이혼하니 좋지? 당당하게 여자 꼬셔서 하룻밤 자도 뭐라 그럴 사람도 없잖아? 부럽네. 난 그러다 걸리면 죽음이야.” 따위의 소리나 들어야 했던, 말 그대로 똥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날이었다.

사실은 늘 겪는 일들이다. 열심히 하던 일은 늘 막판에 가서 뒤집어졌고, 수도 없이 만들었던 제안서는 항상 퇴짜를 맞았다. 이혼한 남자라는 꼬리표도 십 년째 따라다니고 있다. 그 날은 그 모두가 한꺼번에 터졌을 뿐, 따로 떼어놓고 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한 번 겪는 게 아니라는 게, 항상 그렇다는 게 더 힘 빠지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돌아보면 늘 그 자리,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후딱 시간이나 흘러갔으면 좋겠다. 십 년쯤? 이십 년쯤? 그때쯤이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 있을 것 같고, 되든 말든 마음 정리는 되어 있을 테니...

마술사가 툭 한 마디 건넨다.
“형. 맥주 한 잔 사드릴까요?”
“맥주? 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길모퉁이 편의점을 지나다가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간 마술사가 양 손에 캔 맥주와 땅콩을 들고 나오더니 내게 건넨다.
피식 웃으며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형.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일이야 다시 좋은 기회 잡으면 되는 거고, 예의 따위는 애초에 버리고 다니는 그런 인간 때문에 열 받으면 형만 손해예요.”
“그래, 알지. 아는데 그게 잘 안 되네.”

마술사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제법 굵직한 줄과 가위를 꺼낸다. 눈대중으로 서로 길이가 다르게 잘라서 줄 세 개를 만들며 말을 건넨다.
“오늘, 마술 행사 주최하는 문제 때문에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그런 자리에서는 원래 마술 몇 가지 보여주고 시작해야 해서 가져갔던 거예요.”

늦은 밤,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위에서 짤막한 마술 쇼가 펼쳐졌다.
빤히 보고 있는 눈앞에서 길이가 서로 다른 줄이 갑자기 똑같은 길이가 되었다가 도로 원래대로 돌아간다.
잘 묶은 매듭은 사라지고, 밧줄은 여전히 내 눈앞에서 흔들거린다.

“자! 오늘 마술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마술사는 가장 길게 자른 줄에서 가는 실 한 가닥을 뽑아낸다.
“이 줄은 아주 가는 실을 꼬아서 만든 거거든요. 이렇게 한 가닥만 뽑아서...”
양손으로 잡은 줄은 아무 이상이 없다. 멀쩡하다.
“자! 문제없죠? 잘 보셔야 합니다. 이런 걸 마이크로 매직이라고 하죠.”

마술사는 긴 실 가닥을 조금씩 끊어낸다.
“살다 보면 말이죠, 형님. 이렇게 일이 결단 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툭툭 끊어낸 실을 엄지와 검지로 잡더니 마구 문질러서 베베 꼬이게 만든다.
“게다가 이렇게 엉망으로 꼬이기도하죠.”
작게 돌돌 말린 실 뭉치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 잡는다. 그 손엔 아까 끊어 버려서 짧아진 실 한 가닥이 삐죽 나와 있었다.
“자. 이 실 한쪽 끝을 잡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당겨 보세요.”
서로 반대편 실 끝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짧은 실 가닥 중간에는 아까 끊어서 뭉쳐둔 실 뭉치가 걸려 있었다.
“사방이 막히고, 길은 끊기고, 모든 게 꼬여서 도저히 길이 없을 때...”
실을 당기는 대로 실 뭉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기적은 바로 그때 찾아온답니다.”
중간에 실이 엉켰는지 풀리지 않는다.
“잠시만요. 이렇게 여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마술사는 조심스레 뭉친 실을 살짝 잡아 당겼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천천히 해보는 겁니다.”
마침내 그의 손에서 실은 끊어진 곳도, 엉키고 꼬인 곳도 없이 길게 한 가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죠.”

한참 그 실을 쳐다보다가 말을 건넸다.
“마술사... 좋은 직업이구나.”
“이제 좀 마음이 풀리셨어요?”
“음... 그래. 그런데 이런 마술도 되냐?”
“뭔데요? 어떤 거요?”
“시간을... 한 십 년쯤만 빠르게 가게 할 수도 있냐? 나이를 십 년쯤만 더 먹으면 조금은 더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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