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사피엔스 (Sex, Time & Power) - 레너드 쉴레인 / 강수아
어느 날, 차 작가가 내게 물었다.
“형은 왜 책 리뷰를 그렇게 열심히 쓰는 건데?”
뭐, 별 이유야 있겠는가?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리도 하고, 이렇게 리뷰라고 적어두면 나중에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헛갈리는 일은 없을 테니 쓰는 거지...
내가 리뷰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자 차 작가는 갑자기 이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안 읽었다고 하자, 아마도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젠가 읽어보겠다고 맘먹고 있다가 다른 책 몇 권 살 일이 있어서 같이 주문했다.
사실, 차 작가의 권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다른 책들과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재미있게 읽으면서 ‘아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책이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참 많은 고생을 했겠다. 어쩌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일 수도 있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가 했을 고생이 엄청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작가의 노고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작가는 열심히 의과 공부를 하던 시절, 우연하게 접한 의문에 대하여 지도교수마저 명확하게 답변을 하지 못하자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뛰어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사 노릇까지 집어치우고 이 책에 매달렸다는 것은 아니고, 의사로서 다양한 임상사례를 접하고 짬짬이 관련 자료를 뒤지며 이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에서 여성을 구분 짓기 위해 지나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포유류의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종의 암컷은 왜 그렇게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화해왔는지 궁금해한다.
사실 나는 여자에 참 무지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면서 내가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 봤자 얼마 되지 않는 수준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Sex, Time & Power이다. 이 세 단어가 갖는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저자가 이 두툼한 책의 제목으로 이런 단어들을 선택한 것에 공감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계속 의문을 품는 것은 인간 여성이 치르는 월경에 관한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암, 수’ 구별이 가능한 어떤 종도 인간 여성만큼 거창하고 눈에 띄는 월경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오직 인간 여성만이 이토록 요란하게 월경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여성이 그토록 많은 양의 월경혈을 내보내는 것은 몸에서 많은 양의 철분이 손실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그로 인해 후각이 예민한 맹수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
진화론은 결국 적자생존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때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들은 진화과정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멀쩡히 여성에게 벌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 여성에게, 또는 인간에게 무언가 유리한 측면이 있기에 그렇다는 가설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선 여성은 몸에서 그토록 많이 빠져나가는 철분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철분은 채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인간 여성은 자신에게 필요한 철분, 특히 육류에서 얻어지는 철분을 남자에게 요구하기 시작했고 인간 남성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사냥의 목적이 자신이 먹기 위함이 아닌 경우는 없다고 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노획물을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부족에게 가지고 돌아가서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유일한 종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남성은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자신만을 위해서 지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번 돈을 정작 자신은 구경도 못하고 아내의 손으로 넘어가기도 하지 않는가?
이야기는 계속 발전해나간다.
여성의 월경은 달의 주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인간 여성이 월경의 주기와 달과의 상관관계를 알게 되면서 인간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꽤 흥미롭다.
남자가 포경수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증표로 할례를 한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신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가장 우스꽝스러운 계약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종교에서는 여성을 금기시하거나 반대로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애초에 여성이 월경과 달의 관계를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남성보다 먼저 깨달았고 이것은 당연히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류의 모든 종교의 시작은 바로 여성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인간 여성만이 모든 포유류의 암컷 중에서 배란 기간을 알지 못하는 종이라고 한다. 다른 포유류 암컷은 배란 기간이 되면 스스로 적극적인 짝짓기에 나서고 적극적으로 수컷을 유혹하며 심지어는 여러 마리의 수컷과 차례로 짝짓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 여성은 스스로도 자신의 배란 기간을 알지 못한다. 이유는 자신마저 완벽하게 속여야 남성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여성은 배란과 관계없이 짝짓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무기로 남성에게 자신과 아이의 안전을 위해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남성 중에서 대머리, 왼손잡이, 동성애자가 비슷한 비율(12:1 정도의 비율)로 항상 나타나며 이 또한 인류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성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비율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서 특정한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남자가 갖게 되는 부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성이 그토록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인류가 사냥을 해서 살아야 할 만큼 영향력이 막강했다면 왜 인류 역사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부속되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며 심지어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예속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한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결론에 섣부르게 아니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저자의 이런 주장이 정말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저의 설명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대지의 어머니, 붉은 여왕과 같은 단어를 선택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를 가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독자에게 ‘당신이 창조자라고 가정하자.’는 말과 함께 진화 단계의 일들을 마치 조물주가 계획하고 그대로 실천해서 인간의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가정을 많이 사용한다.
물론 이 책의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게 하려는 배려와 함께 그 오래된 진화 기간 동안의 일들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무언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내게 정말 큰 충격을 준 것은 이런 내용이다.
인간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언어이며, 그중에서도 가정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동물도 현재라는 시간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가정법을 이용하여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다른 다양한 요소들과 결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이든 관계없이 가정법(만약 ~하다면 / If ~ then)에 해당하는 표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