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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의 물리학 - 김범준

by NoZam

세상 물정의 물리학

- 복잡한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계물리학의 아름다움

김범준 (지은이) | 동아시아 | 201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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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 책을 몇 권 살 때 함께 산 책이다.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저자 스스로도 본문에서 이야기하듯, 물리학이라는 학문과 세상 물정이라는 단어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결국 책 제목의 승리라고나 할까?


이 책의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읽어봤다. 첫 번째 눈에 띈 건 출생 연도. 나랑 동갑이네. 그런데 뭐 이렇게 찬란한 경력을 갖고 있지? 일단 저자가 물리학자라는 사실은 인정.


본문을 펼쳐 들었다.

이 책에서 내가 처음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은 이렇다.

[대충대충 ‘무늬만’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상명하복의 계층 구조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특정 조직 내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상명하복식 구조, 아래의 의견을 위로 전달할 수 있는 구조 등 다양한 경우를 상정해서 어떤 경우가 가장 합리적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물리학이 단지 학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물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속뜻을 알겠군.”


두 번째 장에서는 더 심각하다.

[집단적인 공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옳은 정보의 투명한 공개다. 정보의 공개가 공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공개가 공황을 만든다.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대중이 어리석을 수도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금배지를 달아도 되겠다 싶다.


‘세장 물정’이라는 네 글자가 갖는 의미를 물리학자가 하나씩 풀어서 설명하는 재미가 제법 그럴듯하다.


책 중간쯤에서는 이런 문장을 만났다.

[잣대 없는 연결망의 줏대 없는 구성원들이여, 이제 친구가 리트윗 한 이야기도 쉽게 믿지 말길 바란다. 염치없는 국정원 직원이 퍼뜨린 소문일 수 있다. 아니면 트위터의 그 친구가 진짜 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이 분은 분명 이런 소릴 들을 만하다.

“물리학자라더니 알고 보니 빨갱이네?”


어린 학생들에게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사를 간혹 본다. 그에 대해서도 저자는 한마디 던진다.

[한자를 몰라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학생의 잘못이 아니라 그 어려운 용어를 쓰자고 고집하는 나 같은 과학자들 잘못이다.]


저자는 그냥 우리가 막연하게 갖고 있는 선입견 속의 물리학자는 분명 아닌 모양이다. 그는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에 대해서도 짧게 소개한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쪽이 내 심장과 가까우니까”라고 말했다.]

어릴 적 보이스카웃 대원이었다. 보이스카웃은 왼손으로 악수를 한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심장과 심장이 직접 맞닿는 것이라고...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를 휩쓰는 ‘빨갱이 광풍’에 대해서도 물리학자다운 한마디를 던진다.

[아무 곳에나 선을 긋고 너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묻고, 사람들에게 ‘오른쪽’이라는 대답을 암묵적으로 강요해서 깨지는 대칭성은, 자발적이지 않은 강제된 대칭점 깨짐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깨진 대칭성으로 사회는 과거로 회귀한다.]

물리학자가 한마디 하셨다. 우리 사회는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이 만일 조금 더 일찍,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왔다면, 나는 아마 심각하게 대학을 물리학과로 진학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있다. “최종 이론의 꿈”이라는 책인데, 스티브 와인버그라는 미국의 물리학자가 쓴 무척 어려운 에세이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물리학 이야기 중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이 등장했다. 내가 이 “최종 이론의 꿈”을 기억하는 건 바로 이 이름 때문인데,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이름이 이 책에 소개된 것이다. 그것도 저자의 친한 동료이자, 자신의 연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쳤고, 만일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함께 연구했을 내용으로 자신은 노벨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 이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물리학에 관심을 갖기는 했었다. 하지만 어렴풋한 관심 수준이었을 뿐이어서 물리학에 관한 다른 책이나 자료를 뒤져보지는 않았다.

그냥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오래된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 물정의 물리학”은 “최종 이론의 꿈”처럼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물리학 소개서쯤 될까? 더불어 “물리학은 연구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최종 이론의 꿈”을 읽고 쓴 리뷰에서 난 “물리학자도 멋진 에세이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었다. 그리고 그건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과연 물리학자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책을 쓰고, 그것이 팔린다? 별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이 책, “세상 물정의 물리학”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외국의 서적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번역한 것보다 백배쯤 나은 물리학 이야기!”

많은 학문 분야에서 이런 책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며칠 전, 중간고사 때문에 시험공부를 하던 중3 딸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빠. 다른 과목은 모르겠는데 수학은 진짜 하기 싫어. 도대체 수업 시간 외에는 절대 써먹을 일 없는 이런 과목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떤 수학자가 내 딸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길 바란다. 딱 이 책 “세상 물정의 물리학”정도로...


이 책에서 내 관심을 확 잡아 끈 문장이 있다.

[신경세포의 활동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즉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뇌는 전체 에너지의 70%에 달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보다 빈둥대는 베짱이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말이 되는 건가? 적어도 인간의 뇌에서만큼은?

이런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더 격렬하게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단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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