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 원제 historiai (BC 440년)
헤로도토스 (지은이) | 천병희 (옮긴이) | 도서출판 숲 | 2009-02-10 |
2012년 9월...
심산스쿨에서 명로진 작가가 진행하는 고전반 강의를 들었다.
깊이 있게 고전 한 권을 파고드는 강의는 아니고, 열 권 남짓한 고전을 읽고 매 주 토요일에 모여서 토론과 함께 진행되는 내용이었다.
당시 필독 리스트를 보면...
논어 / 맹자 / 장자 / 도덕경 / 사기열전 / 열국지 / 그리스 로마 신화 / 역사 /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의 국가
이 중 가장 긴 분량의 책은 열국지였다. 자그마치 열 권 짜리 장편이었으니...
그다음으로 많은 분량이 아마 헤로도토스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나마 열국지는 삼국지처럼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여서 읽을 만했지만 이 역사라는 책은 진짜 지루했다.
게다가 천병희 번역본은 등장인물, 지명을 기존에 익숙한 표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런 식이다.
디오니소스는 디오뉘소스, 스파르타는 스파르테, 스키타이는 스퀴타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책을 읽으면서 생소하게 느껴지다 보니 책 읽는 속도가 꽤 더뎠다. 익숙한 표기 방식이면 그나마 나을 텐데,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나중에야 ‘아! 이렇게 표기한 거구나.’라고 알게 되다 보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한 권으로 된 책의 전체 분량이 대략 천 페이지쯤 된다. 물론 뒤에 주석, 참고문헌까지 포함한 양이긴 하지만 말이다.
난 책을 읽을 때, 가능한 한 참고문헌, 찾아보기까지 다 읽는 편이라 더 오래 걸린 것 같다.
처음 책장을 펼친 게 작년 11월, 그런데 이틀 전인 2월 14일에야 책을 다 읽고 정리까지 끝냈으니...
두어 달 전, 이만교 작가의 저자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이만교 작가가 자신의 독서법을 소개했는데 나와 비슷했다.
책을 읽을 때 꼭 필기구를 손에 들고 읽고,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내용은 다 읽고 난 후에 워드로 정리를 한다고 했다. 내가 몇 년째 책을 읽는 방법이 그렇다.
이 책은 워낙 분량이 많고 생소한 지명, 인명, 신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밑줄 그을 내용도 많다.
워드프로세서에서 정리를 끝내고 보니 정리한 내용만 55페이지에 달한다. 젠장...
헤로도토스는 BC 484~BC 425년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다. 키케로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절반 가까이 읽을 때까지도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술된 역사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책을 선택하고 나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거나 하지 않고 그냥 읽는다. 이 책 역시 그렇게 시작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간중간 흥미로운 부분들이 그나마 책장 넘기는 걸 도와주었다.
가령, 초반에 등장하는 뤼디아의 왕 칸다올레스가 자기 부인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자신의 부하 귀게스에게 부인의 알몸을 훔쳐보게 했다가 자존심 상한 아내와 귀게스의 합작으로 암살을 당했다는 이야기, 앗쉬리아에서는 결혼을 위해 처녀 경매를 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처녀는 당연히 가장 높은 값을 부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렇게 쌓은 돈은 나중에 가장 못생긴 처녀의 몸값으로 사용되어 가난한 남자에게 지참금으로 사용된다는 이야기, 스퀴타이족 남자들이 다른 나라를 정벌해서 28년간 통치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 사이 남아있던 여자들은 노예와 동거하여 아이를 낳고 살았고, 돌아온 남자들은 노예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나중에 창과 칼이 아니라 채찍을 휘두르며 노예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
부모가 죽으면 정성스럽게 시신을 요리하여 먹는 관습을 가진 부족의 이야기, 가장 잘 생기고 키가 큰 남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나라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걸 실감 나게 하는 이야기들이 수북하다.
징검다리 건너듯 소개되는 내용이 그나마 책장 넘기는 내 손가락을 붙잡아 준 것 같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헤로도토스라는 저자 한 사람의 일관된 시각으로 저술한 이 책은 단순하게 페르시아 전쟁만이 아니라 그 주변부에 해당하는 내용까지 아주 세세하게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계속 산으로 갔다 돌아오길 반복한다. 페르시아에 가담한 부족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그들의 풍속, 남녀관계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다 보니 꽤나 정신 사납다.
이 책을 읽다가 다시 본 영화가 있다.
연예인 하하가 맨날 외치던 ‘스파르~타!’ 바로 그 영화 300이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 때 그리스 연합군의 총지휘를 맡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 정예병 300명을 뽑아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킨다는 내용.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보았는데, ‘역사’에서 대략적인 흐름을 읽고 다시 보니 꽤 흥미롭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 배경이 없더라도, 그 피가 튀고 목이 잘리는 장면만으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는데, 책을 읽고 보는 영화에서는 다양한 부분에 눈길이 간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이 영화에서는 꽤나 해학적으로 그려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 두툼한 책을 다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큰 성취감을 느낀다.
이 책을 다 읽고...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병희 번역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가장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분량이 많은 책을 읽으니, 리뷰도 길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