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4
1. 벨기에 맥주 ‘트라피스트’
지금까지 맥주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이라도 맥주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독일 맥주를 우선적으로 찾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점차 세계 각국의 맛있는 맥주들이 모두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보니 어느 특정한 나라의 맥주가 가장 맛있다는 인식은 이제는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독일 맥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여러 나라 맥주라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 한 나라에서 한 가지 맥주 정도 밖에는 수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벨기에 맥주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듯 가짓수가 꽤나 많다. 어쩌면 그 맥주가 벨기에 맥주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도 벨기에 맥주, 저기도 벨기에 맥주, 온통 질리도록 벨기에 산으로 가득하다. 벨기에 맥주를 제외한다면 간혹 미국산이나 독일산 정도가 명맥을 유지할 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나라 벨기에, 더구나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엄격한 나라에서, 그것도 가장 신성한 직을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해 술판(?)을 벌리고 있다니 내참 흥부가 기가 막혀라고 외쳐댈 판이다. 그런 분위기는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았던 공항에서부터 이미 시작이 되었던 게다. 그런데도 무심히 지나쳐 왔다는 생각이다.
여하튼,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출구로 가는 길목에 대부분 광고판이 즐비하다. 벨기에 브뤼셀 공항도 그랬다. 그런데 그 문구가 좀 유별나다. “취할 준비되셨나요?” 우리말로 하면 대충 그런 뜻인데 이건 뭐 대놓고 취할 준비를 하라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마치 술도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라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조금은 낯선 표현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브뤼셀 공항에서부터 취할 준비를 해야 입국을 시켜주는 모양이로군 이라고 생각하며 입국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아무도 여권을 보자고 하지도 않고 그냥 무사통과다. 싱겁게 아무 검사도 안 하니 오히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다. 어쩌면 어디 가서 취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를 일이다.(* 북유럽이나 중서부 유럽의 주요 공항을 거쳐 벨기에를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미 그곳 공항에서 까다로운 통관절차를 겪었을 것이기에 로컬로 연결되는 벨기에는 대부분 검사를 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진짜 벨기에를 느껴보자고 공항을 빠져나오며 다짐한다.
그런데 마치 술도가 같은 나라 벨기에지만 어디를 가면 그 많은 맥주를 모두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맥주는 거의 전 세계에서 만들고 있다. 그 종류만 해도 수만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맥주들을 한자리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환상적일 것이다. 맥덕은 말할 것도 없고 간혹 마시는 일반 맥주 애주가들 조차 혀가 꼬부러질 정도로 갖가지 맥주를 맛보려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델리리움 카페(Delirium Café)라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벨기에에서 양조되는 모든 맥주가 준비되어 있고 유럽의 유명 맥주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프리카, 남미 맥주 등 세계 각국의 맥주를 포함해 3162 종류의 맥주를 마련해 놓고 있다. 2004년도에는 브뤼셀 델리리움 카페에서 “2004 종류의 맥주” 시음이 가능하다고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참조: 델리리움 카페 홈페이지/ http://www.deliriumcafe.be/)
한 장소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기네스북에 등재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믿어야만 한다. 델리리움 카페 2,004 종류의 맥주들은 그 사이 14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맥주를 찾아 준비해 놓았다. 무려 3162 종류의 맥주를 말이다. 그사이에 그러니까 1158 종류의 맥주를 더 찾아서 준비해 놓았다. 자, 이제부터 그야말로 취할 준비되었다면 마음껏 골라서 마셔보자.
제대로 마시고 제대로 취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벨기에에서는 맥주에 관한 한 최고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유네스코가 2016년 벨기에 맥주 문화를 인류의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일 게다. “취할 준비되셨나요?” 문득 이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벨기에 여행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장난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벨기에 맥주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보도록 하자. 벨기에 맥주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에서 직접 생산하는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 두 번째는 레페 맥주처럼 수도원에서 맥주 제조기법을 전수받아 일반 양조장에서 제조하는 ‘수도원’(Abbaye, Abdij) 맥주’, 그리고 일반 양조장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해 제조하는 맥주가 있다.
수도원에서 직접 양조한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는 몇 가지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양조장이 수도원 안에 있어야 하며, 수도사가 직접 생산에 참여해야 하며, 맥주에서 얻은 판매 수익은 외부의 기관들이나 사회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전체 트라피스트 맥주의 가짓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현재 전 세계 12개 수도원만이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 자격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 그중 6개는 벨기에, 2개는 네덜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각각 한 가지씩 만들고 있다. 영국은 가장 최근에, 2018년도에 자격을 인정받았다.
벨기에 최초의 트라피스트 양조장 ‘베스트말레(Westmalle)’는 1836년 12월 10일 운영을 시작했다. 그 맥주는 물론 처음에 수도원 수사들 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흔히 "어둡고 달콤한 맛“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했다. 그 후 이 맥주는 처음으로 갈색 병에 넣어 시중에 그 모습을 선보인다. 이때가 1861년 6월 1일이었다. 그 후 벨기에 6군데의 수도원에서 벨기에 특유의 트라피스트 맥주가 양조되기 시작하면서 트라피스트 맥주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참고로,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가 인정하는 나라별 맥주들은 다음과 같다.
① 벨기에(6가지)
- Bières de Chimay(1863)
- Orval(1931)
- Brasserie de Rochefort(1595)
- Benedictusabdij Achelse Kluis(Achel)(1998)
- Westmalle(1836)
- Brouwerij Westvleteren(1838)
② 네덜란드(2가지)
- Zundert(2013)
- Brouwerij de Koningshoeven(La Trappe)(1884)
③ 오스트리아, Stift Engelszell수도원(Engelszell)(2012)
④ 이탈리아, 트레 폰타네 수도원(Birra Dei Monaci)(2015)
⑤ 미국, 매사추세츠 성 요셉 수도원(Spencer)(2013)
⑥ 영국, 마운트 세인트 버나드 수도원(Tynt)(2018)
* 프랑스에서 트라피스트 맥주 한 가지를 생산하지만 벨기에 시메이 수도원 양조장에서 OEM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정식 트라피스트 맥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 시메이 트라피스트 맥주
디낭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으니 본격적으로 왈롱 지역을 돌아다녀 보는데 벨기에 중부 왼쪽으로 반 고흐가 살았던 공업지역인 몽스(Mons)를 다녀오면서, 또는 가는 길에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 국경지대에 있는 시메이(Chimay)를 들르면 된다. 시메이에 시메이 맥주를 만드는 수도원 스쿠르몽(Scourmont)이 있다.
시메이 수도원 양조장은 1862년 시메이 마을에 있는 스쿠르몽 수도원 안에 설치된다. 그 후 시메이 맥주라는 이름으로 트라피스트 맥주를 제조한다. 시메이 맥주는 3가지인데 모두 에일 맥주이다. 시메이 맥주는 때때로 ‘시메이 골드’(Chimay Gold)라는 이름으로 수도사들을 위한 ‘파터스비어’(patersbier)를 생산하기도 한다. 이 맥주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만들고 있기 때문에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다른 모든 트라피스트 양조장과 마찬가지로, 맥주는 수도원의 재정 지원과 좋은 사용 목적으로만 판매된다. 양조장 사업은 수도원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해 맥주를 만들고 수익사업을 한다. 따라서 맥주 판매로 얻는 이익 대부분은 자선 단체나 지역 사회 개발에 사용한다고 한다. 시메이 맥주 판매 수익은 대략 연간 5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시메이 맥주가 인기를 얻으며 50% 이상 전 세계 해외 시장에 팔려나가기 때문이다.
시메이 맥주는 ‘Chimay Rouge’, ‘Chimay Bleue’, 그리고 ‘Chimay Blanche’의 세 가지 에일을 만들고 있는데, 시메이 레드가 7%. 시메이 블루, 9%. 이 맥주는 특히 저장 맥주로 유명하다. 3년간 저장한 채 두었다가 마시면 그 맛은 씁쓸하면서도 더욱 묵직한 맛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침침한 수도원 분위기를 닮은 듯하다. 그리고 시메이 트리플은 8%인데 이 맥주는 밝은 주황색을 띠며, 시메이 맥주 중 가장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시메이 골드로 알려진 ‘시메이 도레’(Chimay Dorée)는 약간 가벼운 4.8%로 레드와 매우 유사한 성분으로 양조되는데, 더 담백하고 은은한 맥주 맛을 느끼게 되는 맥주이다.
시메이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2007년부터 일반인들도 시메이 맥주 맛을 볼 수 있도록 수도원에서 직접 인근에 호스텔 ‘Auberge de Poteaupré’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맛볼 수 있게 했다. 이 호스텔에는 시메이 전용 맥주와 치즈 판매 코너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 판매되는 치즈들은 모두 4가지인데 수도원에서 직접 만든 것들이다. 역시 맥주는 치즈가 잘 어울린다는 무언의 말씀인듯하다.
나.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
이번에는 디낭에서 동남쪽으로 약 1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가면 룩셈부르크와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아르덴 숲 속에 오르발(Orval) 수도원에 닿는다. 이곳에 지금부터 약 1000년 전 시토회 수도사들이 들어와 숲 속 계곡을 개간하고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엄격한 지금은 그 당시 건물 유적과 함께 17세기에 증축된 수도원 건물이 남아있다.(* 시토회: 베네딕토 수도원 소속으로 프랑스 중동부 지역 시토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급자족을 모토로 생활하는 수도원)
수도원에는 설립 당시부터 물을 공급했던 연못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 연못에 오르발(Orval)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사연이 담겨있다. 이탈리아 투스카나(Tuscany) 지방의 마틸다(Mathilda) 백작부인이 남편을 잃은 후 현재의 벨기에 남쪽 오르발 수도원이 있는 지역을 방문한다. 그런데 그만 그녀의 결혼반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백작부인은 반지를 찾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계곡 물속에 있던 송어가 반지를 물고 물 위로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이곳은 진정 황금 계곡(Val d'Or-Golden Valley)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명칭을 “Val d'Or”에서 따와 오르발(Orval)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반지를 물고 있는 송어’가 오르발 수도원을 상징하는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오르발 수도원은 1070년경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13세기에 수도원이 화재로 정말 소실되고 만다. 그 후 수도원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재건축을 하면서 새로운 수도원 건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1793년 또다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대 간에 전투가 벌어지면서 또다시 파괴되는 불운을 겪는다. 1887년 수도원은 다행히 아렌느(Harenne) 가문이 인수하고 수도원 재정을 도맡아 다시 수도원으로 자리 잡도록 도움을 준다. 그 후 1926년부터 새 수도원을 건축하기 시작해 1948년 완성한다.
오르발 수도원은 현재 두 개의 트라피스트 맥주인 오르발(Orval)과 오르발 베르(Orval Vert)를 양조한다. 오르발 맥주의 역사는 1628년부터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직접 맥주와 포도주를 생산하면서 시작된다. 1931년에 이르면 현재의 양조장을 세우고 평신도들까지 나서서 오르발 수도원 재건을 위한 자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한다. 그 결과 드디어 오르발의 첫 번째 맥주가 1932년 5월 7일 오르발 수도원에 있는 양조장에서 제조되어 출하된다. 그런데 처음 제조된 맥주는 오늘날처럼 병을 사용하지 않고 커다란 맥주통에 저장된 채로 판매했다. 그 후 오르발은 유리로 된 목이 긴 병을 사용했는데 오르발 맥주는 벨기에에서 전국적으로 판매된 최초의 공식적인 트라피스트 맥주이다.
한편, 오르발 맥주는 독특한 오르발만의 유리잔을 디자인해 판매하는데 자세히 보면 성배를 그대로 빼어 닮은 형태이다. 성배로 마시는 오르발 트라피스트 맥주, 거기에 안주로 오르발 치즈를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오르발 맥주는 6.2%의 도수를 지니고 거품이 제법 많이 일어 다소 복잡하고 특이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매번 겪는 일이지만 그 어떤 맥주 맛과 향에 대한 설명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르발 맥주는 제법 날씬한 모양의 병에 담겨 출하된다. 오르발 맥주 역시 저장 맥주로서 배포되기 전 최소 4주 동안 15°C에서 숙성된다. 수도원이나 지역 카페에서 판매되는 맥주는 6개월 동안 숙성 후 판매되기도 한다. 맥주가 병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 풍미는 저장 맥주로서 손색이 없고 몇 년간 저장을 해도 그 맛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한 상자씩 사다가 쟁여놓고 특별한 날에 사용하면 좋을 듯!)
오르발 베르(Orval Vert)는 일명 ‘쁘띠 오르발’이라고 하며 4.5%로 낮은 도수의 맥주이다. 이 맥주는 수도원 인근 카페에서만 판매를 하는데, 트라피스트 맥주는 흔히 묵히는 게 낫다고 하여 묵혀서 마시는 경우가 많다. 오르발 인근 레스토랑에서 묵은 맥주를 맛볼 수 있는데 묵힌 맥주가 0.6유로 더 비싼 3.6유로에 판매하고 있다.
다. 로슈포르 트라피스트 맥주
로슈포르 트라피스트 맥주는 벨기에 로슈포르(Rochefort)의 생 레미 수도원(Abbey of Notre-Dame de Saint-Rémy)에서 양조한다. 이 수도원은 1230년 여자 수도원(수녀원)으로 건립되었다가 이후 남자 수도원으로 바뀌는데 1595년 양조장 설비를 갖추면서 맥주 양조를 시작해 현존하는 트라피스트 에일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수도원의 역사가 깊은 만큼 수난사 또한 남다르다. 16세기에 벌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17세기에 유럽에서 전개된 여러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등을 겪으며 수도원은 점점 피폐해 간다. 18세기 말에는 아예 수도원이 폐쇄되고 농장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다행히 19세기 말 또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를 양조하는 아헬(Achel) 수도원이 재정을 지원함으로써 재건된다. 이때 수도원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양조장 시설을 새로이 갖춘다. 그러나 최초 생산량은 매우 적어 주로 수도원과 수도원 인근에서만 소비된다. 그 후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맥주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로슈포르 수도원이 이곳에서 맥주를 만들게 된 계기는 수도원 재정에 도움이 될만한 거리를 찾다가 전해오는 맥주 제조 비법을 토대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맥주의 가장 기본인 물은 수도원 안쪽에 있는 우물물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맥주 맛이 제법 괜찮은 편이다.
로슈포르가 생산하는 트라피스트 맥주는 모두 3가지이다. 먼저, 로슈포르 6(빨간색 뚜껑, 7.5%). 로슈포르 6은 로슈포르 트라피스트 맥주 중 가장 오래된 맥주인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양조되었다. 현재는 연간 약 1 회 양조되며 로슈포르 전체 맥주 생산량의 약 1%를 차지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귀한 맛을 가진 듯하다.
두 번째는 로슈포르 8(녹색 뚜껑, 9.2%)은 엷은 황갈색이며 과일 향이 많이 난다. 이 품종은 로슈포르 맥주 생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원래 이 맥주는 새해 전야 때에만 양조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수도원은 1960년경에 이 맥주를 정기적으로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세 번째는 로슈포르 10(파란 뚜껑, 11.3%). 맥주 색깔은 다소 흑맥주처럼 짙은 갈색을 띤다. 짙은 맛과 향을 지닌 맥주가 수도원 골방의 침침한 분위기를 담은 듯하다.
로슈포르 맥주병에 쓰여 있는 숫자 6, 8, 10은 맥주 제조 후 6주, 8주, 10주가 지나면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알코올 도수는 각각 7.5%, 9.2%, 11.3%로 높은 편에 속한다. 이 중 로슈포르 10은 장기간 숙성할수록 더욱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로슈포르 맥주는 비법으로 전해오는 제조법으로 초창기 당시 양조하던 비법 그대로 양조하는데 현재 15명의 수도사들만 양조에 참여해 맥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수도원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고, 물량이 그리 많지 않아 로슈포르 맥주 맛을 보려면 직접 로슈포르 수도원 인근으로 반드시 가야 하는데 로슈포르 수도원에서 직영하는 레스토랑이나 기프트샵도 없다. 다행이라면 로슈포르 시내에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로슈포르 트라피스트 맥주를 맛볼 수 있다.
2. 수도원 맥주 레페
디낭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다리 근처에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 바로 그 건너편에 카페 레페(Leffe)가 있는데 이 카페는 디낭에서 레페 맥주를 대신해 손님들을 맞으며 레페 맥주를 비롯한 벨기에 유명 맥주들을 맛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다. 잠시 이곳에서 간단히 레페 맥주 한잔을 마시고 반가운 이름 ‘레페’에 대한 정보를 얻고 곧장 강 건너 언덕에 있는 레페 맥주 박물관으로 간다.
레페 맥주는 최근에 한국의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수입 맥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디낭이 레페의 고향이라는 걸 몰랐으니(필자가) 레페 카페가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레페 맥주의 고향 디낭, 지금은 디낭에서 직접 맥주를 양조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레페의 고향은 디낭임을 홍보하고, 레페 홍보용 레스토랑이 디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디낭의 수도원 자리는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레페 맥주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레페 맥주는 원래 1152년에 세워진 레페 수도원에서 1240년부터 수도원 내에서 직접 양조하던 맥주였다. 그러던 중 수도원은 1460년에 이르러 홍수로 대부분 파괴되고 1466년에는 인근에 발생한 불로 또다시 수도원에 설치된 시설물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700년대에 이르게 되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양조장이 또다시 파괴되기에 이른다. 그 후 양조장은 부서진 채로 몇백 년을 보낸 후 1902년이 되어서야 재건되기에 이른다.
그 후 1952년이 되자 레페 수도원은 플랑드르(벨기에 인근)에 본사를 둔 루트뵈(Lootvoet) 양조장과 파트너십을 맺고 그동안 수도원만 알던 레페 맥주 양조 비법을 제공한다. 그 대가로 레페 수도원은 로열티를 받고 루트뵈 양조장은 본격적으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레페 맥주는 수도원에서 만드는 맥주가 아니라 수도원의 비법을 가지고 일반 양조장에서 만드는 ‘수도원(Abbeay Abdij) 맥주’로 거듭나게 된다.
반면에 시중 맥주회사에 기술을 전수하지 않고 여전히 수도원에서만 제조하는 맥주는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그야말로 수도원에 가야만 직접 맛볼 수 있다. 현재 레페 맥주는 수도원 맥주이지만 트라피스트 맥주는 아니다.
그런데 이 양조장은 그 후 국제적인 유통망을 가진 맥주회사 ‘Interbrew’(현재는 AB InBev)에 넘어가게 되고 레페 맥주는 벨기에 인근 몽셀길버흐(Mont-Saint-Guibert) 양조장이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 양조된다. 현재는 모든 레페 브랜드는 루뱅(Leuven)의 스텔라 아루투아(Stella Artois) 양조장에서 만들고 있다.
아무튼, 레페 맥주의 특징은 상표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에서 제조하던 비법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기에 꽤나 유서 깊은 맥주임에 틀림없다. ‘레페’는 벨기에의 대표적인 수도원 레페의 레시피로 만든 맥주로 800년 이상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원료는 대부분 수도원 근처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용해 양조하는데 맛과 향이 독특해 인기가 많다. 레페 맥주의 미묘한 맛과 특히 높은 알코올 함량은 이곳 수도원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레페 맥주는 레페 블론드, 레페 브륀, 레페 라뒤세 등 10여 종류가 있는데 알코올 도수는 레페 루비가 5%로 가장 낮고 블론드 레페가 9%로 가장 높다. 그런데 이중 6.6% 짜리 레페 노엘(Leffe Noel)은 크리스마스 계절에만 판매하고 페레 쁘렝탕(Leffe Printemps)은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 맞추어 생산을 하고 있어 아무 때나 맛볼 수 있는 맥주가 아니다.
오늘날 벨기에에는 레페 맥주와 유사한 형태로 수도원에서 로열티를 받고 라이센스를 허락한 수도원 맥주들이 여럿 생산되고 있다. 특히 디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르시우스(Maredsous)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 외곽에 수도원과 수녀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만들던 마르시우스 맥주는 벨기에 맥주 공룡 ABI에게 맥주 제조 비법을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다. 이 맥주는 수도원 맥주로 레페만큼은 아니지만 인기가 많다.
그런데 어떤 맥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수도원 유적지나 유명 수도원 이름을 딴 수도원 맥주로 양조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흔하지는 않지만 수도원 맥주라는 상표가 붙었다고 다 똑같은 수도원 맥주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3. 벨기에 인베브(InBev) 맥주 회사
벨기에는 2016년 현재 ‘AB InBev’와 같은 국제적인 맥주회사와 각 지역에 산재한 일반 맥주 양조장을 포함해 대략 224개의 양조장이 있다. 맥주 또한 라거에서부터 앰버 에일 맥주, 램 맥주, 플랑드르 레드 에일, 신 갈색 에일 맥주, 강한 에일 등 그 종류가 그야말로 다양하다. 이중 벨기에에서 생산한 맥주의 60%는 외국으로 수출을 한다고 한다. 국제적인 맥주 거대기업 ‘AB InBev’(ABI, 우리에게는 스텔라 아루투아(Stella Artois), 호가든(Hoegaarden), 레페(Leffe) 등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가 생산한 맥주 브랜드들은 유럽 국가들 뿐 아니라 한국에도 수입되어 팔리고 있다.
앤호이저부시 인베브(Anheuser-Busch InBev, 약어: ABI)는 벨기에의 국제적인 맥주 양조 회사이다. ABI는 적극적인 인수합병 정책으로 15만 명 이상의 직원들이 24개국(2012년 기준)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적인 맥주 제조, 판매 기업으로 성장했다. 다른 막강한 경쟁사인 덴마크의 ‘Carlsberg’와 영국 ‘SAB Miller’, 그리고 네덜란드의 ‘Heineken’이 세계 맥주시장 점유율이 한자리 수, 또는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것에 비해 벨기에 ABI는 세계 맥주시장 점유율의 약 20% 정도(2014년 기준)를 차지함으로써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ABI 발전 과정을 보면 전략적인 경영을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게 된다. 2004년에 ‘Interbrew’라는 벨기에 맥주회사와 ‘Ambev’라는 브라질 맥주 회사가 합병하여 ‘InBev’가 된다. 그리고 2008년에는 미국 앤호이저부시와 합병해 앤호이저부시 인베브(ABI)가 된다. 앤호이저부시를 인수하여 ‘InBev’에서 ‘AB InBev’가 된 이유는 미국 시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국 맥주시장 점유율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버드와이저 회사 앤호이저부시와 합병하며 미국인들 애국심에 혹시나 판매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상호 앞에 AB를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AB InBev’는 2015년 현재 전 세계에서 200개가 넘는 맥주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잘 알려진 브랜드로는 버드와이저, 코로나, 스텔라, 호가든 등이 있다. 그런데 2004년에 ‘InBev’가 그동안 소유하던 한국에서 제조하던 ‘OB’ 맥주를 매각하고 10년 만인 2014년 또다시 ‘OB’와 ‘CASS'를 인수 합병한다. 현재 한국의 맥주 회사로 알려졌던 OB와 CASS도 ABI의 소유이다. 따라서 ’OB‘와 ’CASS‘는 한국의 브랜드가 아니라 단지 ABI가 지역별로 중점을 두고 제조 판매하는 거점 맥주 정도로 알고 마시면 될 것이다.(* 한국 맥주는 어디에!)
‘AB-InBev'라는 회사를 탄생시킨 상징적인 제품들이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다. 1708년, 세바스티안 아루투아(Sébastien Artois)라는 사람이 벨기에 루뱅이라는 도시에서 1366년에 설립된 'Den Hoorn’ 양조장'을 인수한다. 그런데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 제품의 상표를 자세히 보면 'ANNO 1366'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Den Hoorn‘ 양조장'이 처음 설립된 해를 의미한다.
양조장을 인수한 세바스티안 아루투아는 1717년 양조장 이름을 브라우베레이 아루투아(Brouwerij Artois)로 이름을 변경한다. 그러나 이후 이 이름으로 만든 맥주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 맥주가 현재의 이름으로 1926년에 다시 등장한다. 그것도 갑자기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특별판으로 스텔라 아루투아 맥주를 출시하면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다.
아무튼 새로운 맥주처럼 등장한 스텔라 아루투아는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생산을 늘리고 1년 내내 맥주 생산을 한다. 따라서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유럽 시장에서 제법 인기를 얻으며 수출까지 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자 잠시 후 브루어레이 아루투아(Brouwerij Artois) 양조장'은 벨기에의 다른 양조장인 '피에드프 브류어리‘(Piedboeuf Brewery)와 합병을 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인터브류’(Interbrew)가 탄생을 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인터브류' 합병의 역사가 시작되는 처음 단계이다.
그 후 2004년 브라질의 '암베브‘(AmBev)라는 회사와 통합을 함으로써 '인베브’(InBev)라는 회사로 재탄생을 한다. 이때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양조회사로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8년에 미국의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앤호이저 부쉬‘(Anheuser-Busch)와 통합을 한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에이비 인베브’(AB-InBev)라는 회사다. 이후 2015년 세계 시장에서 9.7% 점유율을 갖고 있는 세계 2위 업체인 영국의 '사브 밀러‘(SAB Miller)라는 회사를 인수하고 맥주 공룡인 세계 굴지의 맥주회사로 자리를 잡는다. 이제 세계는 맥주시장의 3분의 1을 ABI가 차지 함으로써 맥주 공룡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거대 공룡이 자라면 자랄수록 맥주 맛이 더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기존의 맥주들이 유통시장을 독점함으로써 맛과 상관없이 판매망을 장악함으로써 질 낮은 맥주를 마셔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이미 한국에서 ABI가 소유한 OB와 CASS 맥주가 한국 유통시장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의 소비자들이 그 폐해를 겪고 있지 않은가.
다행이라면 한국에서도 점차 수제 맥주, 소위 크래프트 맥주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어 기대를 갖게 한다. 소규모 양조 업체가 대형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조한 맥주를 분류하기 위해 ‘수공예’라는 뜻의 ‘크래프트’(craf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현재 미국에는 이런 소규모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4000개가 넘는다. 한국에서는 아직 크래프트 맥주가 많지는 않지만 제법 개성 있는 맥주들을 만드는 곳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런데 앤호이저-부시 인베브(ABI)가 이런 한국의 소규모 양조장들까지 거의 대부분 싹쓸이할 기세다. 잇달아 한국 맥주를 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계 최대 맥주 회사로 한국의 오비(OB) 맥주를 인수한 앤호이저-부시 인베브가 한국의 크래프트 맥주 회사 ‘더 핸드 앤 몰트’를 인수했다. ABI는 한국 오비맥주의 글로벌 본사다. 최근 해외 소규모 양조장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있는 ABI가 한국의 소규모 양조장까지 인수한 것을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맥주라는 제품의 가치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분명 엄청난 매력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어쩌면 취해야만 그 진가를 아는 게 바로 술, 그중에서도 맥주가 아닐까라고 중얼거려 본다. 그러니 벨기에 수도원 트라피스트 맥주가 아니더라도 아비(수도원) 맥주이든, 또는 일반 양조장 맥주이든 모두가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맛과 향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하나씩 가능한 모두 마시고 즐기는 일이다. 그러니 취할 준비는 꼭 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