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페르메르와 안토니 반 레벤후크의 대화
17세기 미술은 여전히 선과 악, 근면과 철저함 뿐 아니라 사랑과 은밀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못다 한 이야기가 과연 무엇일지 찾아보는 재미가 흥미를 더욱 유발하게 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인 안토니 판 레벤후크(Antoni van Leeuwenhoek: 1632-1723), 이 두 사람은 같은 해 델프트에서 태어나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페르메이르는 화가로서, 레벤후크는 미생물연구를 하는 과학자로서 성장한다.
이 두 사람이 델프트에서 대화형식을 빌어 페이메이르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전시가 마련되었다. 이 특별전에서는 두 사람이 <만약에...?>라는 주제어를 가지고 그들만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벌어진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예술과 과학의 대가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살던 고향마을 델프트를 영원의 도시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만약에...?>라는 주제어를 갖고 전개되는 페르메이르와 레벤후크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살던 17세기의 델프트 생활상을 경험할 수 있는 언어적 시각적 탐험이기도 하다.
두 작가는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레벤후크와 페르메이르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으며 델프트와 암스테르담에서 자주 마주쳤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실제로 페르메이르가 사망한 후 안토니 판 레벤후크는 페르메이르가 사용하던 개인 소장품과 작품들에 대한 소개와 감정을 도맡아 처리했기에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형식의 이야기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그와 관련된 페이메이르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도록 하자.
페르메이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울트라마린’이다. 그는 이 색을 자주 사용했다. 짙은 파란색 안료, 울트라마린은 준보석인 청금석이라는 광물에서 축출하는데 ‘울트라마린’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바다 너머에서 온...’을 의미한다. 이 광물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지역에서 채굴된다. 울트라마린은 희귀성과 채굴의 어려움 때문에 매우 비싼 안료였는데 당시에는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그림 중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대표적 그림은 1663년에 그린 <편지를 읽는 여인>과 1665년에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리고 1660-1661년경에 그린 <델프트 풍경>과 1658-1661년경에 그린 <우유 따르는 하녀>, 그리고 1662-1668년 경에 그린 <회화의 우화> 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대표적인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보티첼리의 <성모 마리아>가 있다. 푸른색은 워낙 고가이다 보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입고 있는 의상에 청금석을 사용해 고귀함과 우아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귀한 청금석을 사용하는 경우는 주로 성모 마리아에게만 사용해 푸른색이 들어간 그림은 대부분 성모 마리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페르메르가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는데 그토록 많은 양의 청금석 안료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는 가난했는지, 그가 어떻게 이 비싼 물감을 얻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페르메이르의 전체 작품 중 풍경을 그린 작품은 단 두 작품, 즉 <골목 풍경: 1657>과 <델프트 풍경: 1660>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델프트 풍경>을 그릴 때 페르메이르는 아타나시우스 키르커(Athanasius Kircher)가 1646년에 개발한 대형 휴대용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다. <델프트 풍경>이라는 작품이 사진처럼 델프트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신의 기술적 도움이 따랐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채롭다고 하겠다.
<델프트 풍경> 작품은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 후위스(Mauritshuis)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데, <델프트 풍경>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전시된 공간에서 서로 마주 보고 걸려 있다.
델프트를 그린 또 다른 작품으로 페르메이르의 <델프트 풍경: 1660>과 함께 요하네스 피터스(Johannes Peeters)가 그린 <델프트 풍경: 1674>도 있다. 피터스가 그린 그림은 북쪽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판화로 제작한 델프트 풍경도 2점이 있다. 페르메이르 작품과 비슷한 구도의 판화들로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과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그림의 수준은 금방 빛과 색채라는 관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거의 비슷한 구도임에도 역시 그림의 구성적 측면에서 볼 때도 페르메이르가 누군가와 함께 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그림은 그의 가족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다름 아닌 그림 속에 아이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페르메이르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델프트를 산책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는 점이다.
델프트는 1602년에 설립된 동인도 회사의 6군데 중 한 곳이었는데, 델프트항(Delfshaven)을 통해 바다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의 여러 전진기지와 마찬가지로 활용도가 높은 도시였다. 이 회사는 동양과 활발한 무역을 했기에 중국산 도자기를 비롯한 진기한 물품들을 수입하여 네덜란드 부유층에게 공급하는 일을 했기에 델프트는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부유한 도시였다.
도시의 부는 화가들에게도 경제적 소득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당시 화가나 조각가 등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협동조합 길드에 소속되어 활동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델프트의 성 루카 길드(St. Luke Guild)에는 1610년에서 1650년 사이에 50여 명의 화가와 도예가들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길드가 중요했던 이유는, 네덜란드 황금기 시절에 거의 대부분의 생산과 판매, 유통과정 등을 길드가 좌우했기 때문에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배제될 정도였기에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길드 가입은 거의 필수적인 의무사항처럼 여겨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화가인 페르메이르 역시 길드에 가입해야만 했는데, 문제는 페르메이르가 그의 가난한 경제 사정으로 가입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페르메이르는 그렇게 들어가고자 했던 길드의 입장료를 마련하지 못해 처음 가입 시 길드 가입비 6 길더 중 1.5 길더만 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페르메아르가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25세가 되어야 길드가입을 할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인 20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성인으로 인정을 해 주어 길드 가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델프트의 북동쪽에 도시를 관통하는 게르베그 강이 흐르는데 그 인근에 네덜란드 공화국의 무기고인 화약탑(Wapenkamer)이 건설된다. 그런데 1654년 10월 12일 이 화약탑이 폭발하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진다. “끔찍한 폭력이 하늘의 창공을 갈라놓고 땅 표면이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델프트는 지진이 난 듯 흔들렸고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화약고에서 화약 40t이 폭발한 것이다. 화약은 도시의 거의 절반을 파괴하고. 100명 이상의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뿐만 아니라 1,000명 이상의 시민들을 부상자로 만들어 버렸다.
마우리츠후위스 미술관에 걸린 <황금방울새>의 작가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 1622-1654), 당시 그는 32살의 전도유망한 화가이자 렘브란드의 수제자로 델프트 길드 소속이었는데, 델프트 폭발사고로 사망한다. 그러나 파브리티우스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던 페르메이르의 친구 레벤후크는 다행히 죽음을 면한다.
델프트에 있는 파브리티우스의 스튜디오는 물론 그가 그린 대부분의 작품들 까지 거의 남지 않고 화약고 폭발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단지 그가 죽던 해에 그린 3점의 작품 중 하나인 <황금방울새>만이 살아남아 영원 속을 날고 있다. 파브리티우스의 작품은 그가 살던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페르메이르를 비롯한 동시대 젊은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델프트 루크 길드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소속되어 있던 이들은 파브리티우스가 그린 밝은 햇빛에 비치는 창백하고 닳은 벽을 표현한 것을 페르메이르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표현해 내면서 밝은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르메이르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평평한 표면에 ‘실제’ 공간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먼저, 그는 지평선을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한 지점, 즉 사라지는 지점을 취한다. 창문이나 벽, 풍경 등 시선 방향과 일치하도록 모든 선을 그 지점에서 수렴되도록 한다.
페르메이르는 ‘대각선’ 관점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작품 속에 사라지는 점을 하나가 아닌 두 개를 설정하고 특별한 공간 효과를 제공하는 타일바닥을 만들어 낸다. 타일의 이음새를 계속 이어가다 보면 그림에서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지금 시대와는 다르게 페르메이르가 살던 시대에는 원근법을 ‘원근법 과학’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원근법은 당시에 중요한 과학적 사실로서 그림을 그릴 때 간과해서 안 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처럼 당시 중요한 원근법을 잘 사용하려면 벽과 그림틀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했기에 페르메이르와 동시대 화가들은 이러한 투시력을 돕기 위해 실과 분필을 사용했다고 한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떤 그림에는 바로 이러한 원근법을 나타내기 위한 기술로서, 끈을 고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캔버스 특정의 위치에 핀을 꼽아서 실을 연결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흔적으로 화판에 작은 구멍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들어, <우유따르는 하녀> 그림에서 하녀의 머리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머리 위에 자세히 보면 핀을 꼽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의 신체 비율과 각도를 정하기 위해 실로 직선을 긋고 그 안에 하녀의 신체를 그려넣은 것이라고 할 수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집과 바깥세상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 듯했다. 바깥세상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무역과 해적처럼 해상 탈취로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세계로 향한 네덜란드인의 세계관은 네덜란드인들의 가정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계지도일 것이다.
단순히 벽장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지도, 항해지도의 내용은 그 자체가 탐험심을 자극하고 세계로 진출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자극하는 매체 구실을 했을 것이다. 한편, 지도를 제작하고 그리는 사람들은 당시에 화가로 대접을 받았는데, 요안 블라우와 피터 구스와 같은 화가들은 당시에 벽지도를 그리는 거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러한 세계지도는 페르메이르 작품 속 벽면을 채우고 장식하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페이메이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드넓은 세계로 향하는 그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대 화가들은 동일한 주제와 재료를 사용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빛, 구도, 색채, 입체적인 효과, 그리고 이야기 전개방식 등이 독보적이다, 이런 독창성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특별한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화가는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페르메이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파악하기 쉽지가 않다. 작가는 장면을 연출하고 편집하여 우리가 어느 정도 단서를 얻을 수 있도록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17세기 미술은 여전히 선과 악, 근면과 철저함 뿐 아니라 사랑과 은밀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못다 한 이야기가 과연 무엇일지 찾아보는 재미가 흥미를 더욱 유발하게 한다. 예를 들어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가 은밀한 에로티시즘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인가 라는 궁금증 말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의 귀에 걸린 진주귀걸이는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크다. 저리도 큰 진주라면 가격이 엄청났을 터인데 당시에 가난했던 페르메이르가 과연 돈이 어디서 나서, 아님 누구한테 어디서 빌려와 소녀의 귀에 걸게 했던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페르메이르 캔버스에는 빛이 충만하다. 밝고, 걸러지고, 부드럽고 반사되고 빛나고 매끄럽기까지 하다. 그가 그리는 빛의 율동은 항상 똑같지는 않지만 그가 보여주는 빛은 언제나 밝고 언제나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 속 장면들을 가만히 눈을 감고 보았던 그림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빛이 그려내는 장면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페르메이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빛이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하겠다.
어쩌면 페르메이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의 그림들은 그동안 렘브란트가 보여주었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빛을 활용한다. 명암의 강력한 대비, 그리고 빛이 쏟아져 내릴듯한 강렬함으로 빛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대상들은 온통 빛으로 휘감겨 한 편의 빛나는 드라마를 연출해 낸다. 예를 들어, 그가 그리는 여인들은 대부분 밝은 배경에 있을지라도 여인의 얼굴은 빛보다 더욱 빛이 난다. 빛이 빛을 덮었다고나 할까...
페르메이르 그림들 상당수는 사랑을 주제로 한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은밀한 척 하지만 거의 노골적인 사랑을 하는 장면들이 쉽게 드러나 있다. 그림 속 사랑의 상징은 더더욱 사랑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림 속 사랑의 상징을 찾아내고 이를 이해하는 일이 페르메이르의 사랑을 이해하는 첩경일지 모르겠다.
페르메이르에게 자연은 이상적인 장소이다. 그래서인지 풍경은 볼수록 사랑을 암시하는 듯하다. 특히 그가 보여주는 악기 역시 사랑을 상징한다. 그 예로 <류트를 연주하는 여인>에서 그녀의 표정과 배경에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남성이 사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다른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놓여있든 연주를 하고 있든 간에 묘한 공명을 하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듯하다. 더욱이 배경으로 보이는 벽에 걸린 큐피드 그림은 사랑과 로맨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그림들에서 사랑과 로맨스를 표현하기 위해 큐피드는 다른 모습으로, 즉 악기나 류트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페르메이르의 그림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류트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악기들 역시 그러한 사랑과 로맨스를 상징하는 또 다른 장치였음을 느끼게 한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어 한다. 이는 예전이나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7세기 작가들은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엠블럼을 사용했다. 그림이 있는 글, 즉 엠블럼은 그리스어로 “모자이크 장식”을 의미하는데, 엠블럼은 명확하고 간결한 모토가 담긴 그림이었다. 엠블럼은 종종 도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선과 악을 강조했다. 또한 종종 사랑과 관련이 있기도 했다.
당대 화가들처럼 페르메이르도 엠블럼을 사용했다. 그의 타블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그림의 의미를 보여주는 몇 가지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수공예품을 만드는 여성은 가정의 가치를, 남성과 함께 술을 마시는 여성은 여성의 미덕 결여를 상징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달콤하거나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도 있을 것이다.
한 여인이 편지를 받는다. 그림에는 연애편지임을 암시하는 여러 단서가 있다. 즉 사물의 상징성 말이다. 악기는 관능적인 사랑을, 슬리퍼는 불륜을, 빗자루는 미혼동거를 상징하며 벽에 걸린 그림들도 사랑의 상징을 담고 있다. 이런 사랑은 이룰 수 없는 것일 게다. 만일 풍경화에서 한 남자가 모래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면 그녀에게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이 그렇게 외로운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사랑의 행위와 관련해 “유혹”이라는 주제는 매력적이고 인기 있는 주제일 것이다. 특히 도덕적 상징은 페르메이르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담고 있다. 유혹은 종종 술과 음악을 통해 얻어진다. 와인 한잔은 간혹 유혹의 한 단계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드라마에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거실 같은 곳에서 두 남녀가 와인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담소를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면 이때 와인 한잔은 엠블렘으로서 유혹의 가장 우선적 단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술 한잔의 상징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페르메이르 작품을 보면서 우리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이미지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델프트에 있는 페르메이르가 태어난 집 근처에는 페르메이르 기념관이 있다. 페르메이르가 살던 당시 성 루카 길드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 기념관에는 페르메이르의 작품 37점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물론 전부 가품이기는 하지만 거의 진품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들 37점의 작품들을 주제별로 살펴보면, 고전적이거나 우화적이고 성서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 5점, 도시 풍경을 담은 작품 2점, 여성을 다룬 작품 4점, 그리고 주택 실내를 담은 26점의 작품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2점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진품 논의가 일고 있었지만 2023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페르메이르의 전 세계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네덜란드 레이크스 국립박물관측은 가품 논란이 있었던 작품 모두를 검사결과 진품으로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를 한다.
페르메이르가 생전에 그린 작품들은 대략 40점에서 60점의 작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37점의 작품 수는 그의 생애에 그린 작품으로는 지나치게 적은 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을 걸고 진품이라는 추측성 작품들이 여기저기서 출현하기도 한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작품들 대부분은 여인들을 그렸다. 그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고가의 진주귀걸이나 목걸이 등을 걸치고 있고 그녀들이 입고 있는 의상 역시 상대적으로 고가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통해 당시 네덜란드 사회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생활상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그림에는 여러 악기가 등장한다. 이 악기들 역시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이 다루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적지 않은 그림 속 여주인공들이 연주를 하거나 악기와 함께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그림 속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지를 쓰거나, 뜨개질을 하고 있고, 또는 연주를 하고 있는 등 대부분 예술적 활동을 대부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페르메이르의 생활수준을 느끼게 되는 가장 결정적 요소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수준에 얼마큼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를 아는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원근법을 특징지으며 실내를 보여주는 특징적 문양이 바로 가톨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둑판 문양이라고 하겠다.
한편 그의 그림에는 종종 지도나 다른 화가의 그림이 액자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페르메이르의 아버지가 미술상이었던 시절에 판매했던 물건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종교적인 그림이나 액자가 배경에 등장하는 것은 페르메이르가 처갓집에 살던 시기 장모 마리아 틴스가 수집해 처갓집에 걸어둔 여러 그림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특징적 상황들을 보면서 페르메이르의 당시 경제상황이 과연 배가 고팠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단순한 기우일까? 11명의 아이들과 큰돈을 벌기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 그림을 일 년에 한두 편만 그리면서 과연 그의 그림 속 내용과 견주어 보면 도저히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생활상을 느끼게 되면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기만 한다.
여하튼 이러한 특징들 분석을 통해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물론 페르메이르라는 화가의 존재 자체에 좀 더 친근하게 닦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페르메이르와 레벤후크의 대화형식의 특별전]에서 소개한 자료와 [델프트 페르메이르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