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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학파 6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와 엠마누엘 더 비테

by 박종수


하우크헤스트와 엠마뉴엘 더 비테, 이들은 네덜란드 황금기에 델프트에 있는 유서 깊은 교회 건축물의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내고, 건축적 특징을 회화로 완성해 낸 화가들이다.



1.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Gerard Houckgeest, 1600–1661), 그는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의 중추적 인물로 교회 내부와 르네상스 건축의 비전을 탁월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우크헤스트는 특히 교회 내부를 혁신적인 원근법과 빛을 통해 성스러운 공간의 웅장함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


헤이그에서 태어난 하우크헤스트는 바로톨로메 판 바센(Bartholomeus van Bassen)의 지도 아래 기량을 갈고닦으며 당시 영향력 있는 델프트 길드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의 델프트에서의 노력들은 그의 예술적 궤적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Bartholomeus van Bassen, Renaissance Interior with Banqueters(1618-20)

(* 바로톨로메 판 바센(Bartholomeus van Bassen: 1590~1652)은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네덜란드 미술사 연구소에 따르면, 그는 1613년에 델프트 성 루카 길드의 회원이 된다. 그 후 1622년 그는 헤이그로 이사하고 헤이그의 도시 건축가로 활동을 한다. 1624년에는 헤이그 성 루카 길드의 회원이 되고 후에 성 루카 길드의 수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렌지 공 프리드리히 헨리의 ‘여름궁전’과 ‘시청’ 복원 작업 등을 하고, 1649년부터는 신 교회(Nieuwe Kerk) 건설 등에 참여하는 등 적지 않은 건축 작업에 참여한다.)



하우크헤스트는 주로 델프트(1625–1649)에서 활동을 했는데 나중에는 다른 지역, 특히 베르겐옵줌(Bergen op Zoom: 1652–1669)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도 그의 존재를 과시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창작 활동을 위한 노력일 뿐 아니라 예술 교류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거장들과의 협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우크헤스트가 실제 교회 내부를 묘사한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델프트 신교회에 있는 오렌지공 빌럼 1세의 무덤이 있는 곳, 1651>이다. 그의 대형 패널 그림은 델프트 최초의 건축물 그림이었음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델프트에서 그는 혁신적인 대각선 원근법으로 델프트의 아우데 교회(구 교회)와 신교회 6점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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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Houckgeest, 1) Ambulatory of the New Church in Delft(ca.1651), 2) 구교회내부(1654) 3) 구교회 내부(1651)


한편, 그는 델프트의 유력한 가문 출신인 헬레나 반 콤스트리엔과 결혼을 한다. 이후 아내의 협조로 하우크헤스트의 작품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에마누엘 더 비테와 함께 하우크헤스트는 델프트 미술계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더 비테와 더불어 하우크헤스트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축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우크헤스트는 전통적인 세로 또는 가로 시점과는 달리 비스듬한 각도에서 장면을 그려냈으며, 이를 통해 작품에 자연스러운 느낌을 부여한다.


하우크헤스트는 높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내고, 델프트에 있는 두 유서 깊은 교회의 엄숙한 건축적 특징을 활용한다. 그의 시선은 전경의 거대한 기둥과 벽기둥에 가려져 있어, 관람객은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원근법을 활용한 회화적 시도라고 하겠다.


하우크헤스트는 이 처럼 교회 내부와 원근법의 활용을 전문으로 했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중앙 기둥에 색색의 점들을 드리우는 모습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녹색으로 채색한 17세기 풍습의 커튼으로 그림을 빛과 먼지로부터 보호했던 관습을 묘사한 장면은 재치 있는 환상적 장치임을 알게 해 준다.


그의 건축에 대한 양식적 진화는 극적인 명암법과 섬세하고 꼼꼼한 디테일, 그리고 영적인 웅장함을 전달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 회화의 광범위한 경향을 반영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우크헤스트의 접근 방식은 신성한 공간, 특히 교회의 본질을 숨 막힐 듯한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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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Houckgest, 1) 교회내부(1644) 나무에 오일, 2) 교회 내부(1610-1645), 동판화


이상화된 표현을 선호했던 많은 동시대 화가들과 달리, 하우크헤스트는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설교단과 같은 요소들을 통합하여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건축 구조물을 정밀하게 재현해 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그가 그린 건축물의 실내 구조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신학적 신념을 반영하고 신의 은총에 대한 묵상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하우크헤스트는 교회 내부뿐 아니라 르네상스 건물 묘사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르네상스 건축은 그가 인본주의적 이상과 건축적 웅장함을 탐구할 수 있게 해 준 장르였다. 그의 작품 ‘아케이드를 통해 본 풍경’은 이러한 매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인 고전적인 디자인의 우아함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크 양식이 그의 팔레트와 구성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기법이기도 하다.


두 작품 모두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디테일은 하우크헤스트의 원근법과 계조 표현에 대한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들은 그의 작품을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관람객에게 몰입감 넘치는 경험을 하게 만들고 있다.


하우크헤스트는 처음에는 상상 속 교회 내부와 화려한 르네상스 건물 (그림 1)을 어두운 갈색과 붉은색으로 그리는 데 주력했는데, 이는 델프트에서 그가 그린 혁명적 작품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우크헤스트의 갑작스러운 변화 이유는 미술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린 초기 작품들과 델프트에서 그린 작품들 사이의 양식적 차이가 너무 커 그의 양식이 외부 영향 없이 변화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동시대의 여러 화가들, 예를 들면 델프트 학파의 여러 화가들인 카렐 파브리티우스나 니콜라에스 마에스, 그리고 에마누엘 더 비테 등의 작품은 모두 하우크헤스트가 그리는 작품들에 대해 새로운 양식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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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Houckgest, 1) 바닷가 궁전 앞의 구애장면(1643), 2) 교회 내부 장식과 사람들(1654)


하우크헤스트의 유산은 단순히 그의 작품 완성도를 의미하기보다 네덜란드 황금기에 델프트를 예술 혁신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의 작품들이 헤이그 마우리츠후위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미래 세대가 그의 비전에 담긴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지적인 깊이를 감상할 수 있다.



2. 엠마누엘 더 비테


엠마누엘 더 비테(Emanuel de Witte: ca.1617-1691/1692), 그는 1617년경 네덜란드 알크마르에서 태어났다. 교사의 아들인 그는 어린 시절에 교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기하학을 배웠다. 1636년까지 더 비테는 알크마르의 화가 길드에 등록되어 있었고 1639년과 1640년에는 로테르담에서 활동한 기록들이 여러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런데 더 비테는 1641년 자신의 딸 쟈케민트헨(Jaquemyntgen)을 낳은 후 가족들과 함께 델프트로 이주를 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델프트 성 루카 길드에 가입을 하고 정물화가 에버르트 판 엘스트(Evert van Aelst, 1602–1657)에게 그림을 배운다. 그 후 1641년경부터 1650년경까지 델프트에서 화가로서 활동을 한다.

에버르트 판 엘스트, 꽃 정물화(1650)

(* 에버르트 판 엘스트는 1602년 델프트에서 태어나 1657년 2월 19일 델프트에서 사망한 네덜란드 정물화가이다. 에버르트 판 엘스트는 빌렘 판 엘스트(Willem van Aelst)의 삼촌이자 스승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사냥감, 물고기, 꽃병 등의 정물화로 유명했다. 이태리에서 공부한 에버르트 판 엘스트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델프트에 정착하고 직업적으로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유명세를 누리기도 한다. 에마뉴엘 더 비테와 그의 조카 빌렘(Willem), 그리고 야콥 데니스(Jacob Denys)가 엘스트의 제자였다.)


더 비테의 초기 작품은 초상화, 역사화, 신화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헤리트 다우(Gerrit Dou)와 우트레흐트(Utrecht) 학파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차츰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와 카렐 파브리티우스, 그리고 피터르 더 호흐를 비롯한 델프트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풍속화 등에 관심을 갖고 일상생활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처음에 역사화가와 초상화가가 되기를 열망했던 더 비테, 그러나 1650년경 갑자기 그는 예술적 진로를 바꾸어 역사적인 델프트의 두 유서 깊은 기념물 아우데(Oude: old) 교회와 신교회(Nieuwe Kerk)의 실내를 클로즈업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더 비테는 이제 건축 그림, 특히 교회 내부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


엠마누엘 더 비테, 델프트 구교회(Oude Kerk) 내부(1651)

더 비테는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Gerard Houckgeest)와 함께 델프트에서 이 장르의 주요 화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그의 초기 그림은 하우크헤스트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곧 자신만의 스타일과 기법을 개발하여 더 비트 특유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린다.


더 비테와 하우크헤스트가 델프트 교회들을 왜 그토록 여러 번 그리고 건축물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의 의도가 단순히 델프트와 오렌지 가문과의 긴밀한 관계를 미화하는 것이었다면(빌렘 2세는 신교회의 웅장한 무덤에 묻혔다), 두 예술가 모두 빛의 유희, 거대한 건축적 요소, 그리고 이 기념물들을 방문한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반응에 매료되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더 비테를 제외하고는 건축물 사이로 스며드는 빛, 특히 벽과 거대한 기둥, 그리고 장식적인 보도의 표면 위로 섬세하게 펼쳐지는 햇빛을 이처럼 우아하게 묘사할 수 있는 교회건축 화가는 거의 없을 듯하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강렬한 자연스러움 때문에 비평가들은 더 비테의 장면들이 어느 정도 직접적인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엠마뉴엘 더 비테의 교회 그림 접근 방식은 하우크헤스트보다 더 직관적이다. 그의 비공식적인 구성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전통에서 벗어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예술 분야 중 하나인 선형 원근법의 기법보다는 형태와 색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통해 공간과 부피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자들은 교회 외부에 서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회의 거대한 건축적 특징들 속에 거의 물리적으로 녹아든 듯한 느낌을 받는다. 초기 교회 내부 묘사에서 처럼 공허한 원근법을 통해 교회 내부를 바라보는 것이다. 더 비테가 묘사한 주변 환경의 무형적인 특징들은 마치 페르메이르가 활용한 광학적 접근 방식, 즉 카메라 옵스큐라의 활용을 예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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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de Witte, 1) 암스테르담의 신 교회 내부(1657), 2) 신 교회 제단(1660), 3) 암스테르담의 포르투칼 회당 내부(1680)


델프트 학파의 모든 화가들 중에서 더 비테와 페르메이르는 그림의 평면적 배치에 가장 주의를 기울인 화가들이었다. 그들 작품이 보여주는 환상적 효과는 멀리서 볼 때 가장 효과적이다. 가까이서 보면 기묘하게도 평면적으로 보인다. 두 화가에게 빛은 자연 세계의 공간, 부피, 질감의 환상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캔버스 표면에 추상적인 형태와 패턴을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흥미로운 요소이다.


더 비테의 팔레트는 은빛이 도는 투명한 회색으로 제한되었고, 가끔 부드러운 녹색이나 밝은 빨간색으로 강조되었다. 개별적인 건축적 특징의 정의는 항상 안정적이지만, 신중하게 조절된 색조의 인접한 부분들 윤곽은 서로 부드럽게 어우러져 돌과 회칠한 벽의 다양한 각도에서 반사되는 빛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의 붓놀림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성공한 많은 예술가들의 판매 전략인 세세한 디테일을 피했는데, 이는 이미지의 전체적인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의 회화적 접근 방식은 명암 대비보다는 색조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우크헤스트의 조형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1652년, 더 비테는 델프트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그는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낸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 더 비테는 교회 내부를 묘사하는 데 더욱 집중했고, 암스테르담의 오래된 교회들을 거의 모든 구석구석을 찾아 그렸다. 특히 ‘교회당의 내부를 포함한 도시 건축물’을 그리면서 새로운 건축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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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de Witte, 1) 구교회내부(1654), 2) 구교회 내부(ca1654), 3) 구교회 내부(1655)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그는 아우데 케르크(오래된 교회)의 내부, 특히 웅장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놀라운 효과에 깊은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30점이 넘는 작품들을 그린다. 다른 많은 예술가들도 ‘아우데 케르크’의 내부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누구도 그토록 극적인 빛과 색채 효과, 그리고 그처럼 일화적인 매력으로 그림을 재현하지 못했다.


1652년 겨울, 더 비테가 시도한 델프트. 빛의 효과에 대한 그의 탐구는 네덜란드 건축 회화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비테 이전의 네덜란드에서는 대부분 원근법을 통한 건축 묘사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더 비테 등장 이후 그동안의 엄격한 선형 원근법의 요건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더 비테의 건축물에 대한 도형들은 건축학적인 디자인의 의미보다는 분명 그림의 한 유형으로서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더 비테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실제 교회내부를 그리기보다는 순전히 상상으로 교회내부를 재배치해 그리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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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de Witte, 1) 암스테르담 거래소 안뜰(1653), 2) 버지날 연주하는 여인과 방 내부1660-67), 3) 신 교회내부(1668)


한편,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 암스테르담의 주요 교회의 많은 내부 풍경(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 회당 내부, 1680)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와 대조적인 시장 풍경, 그리고 한두 명의 인물이 있는 가정 내부 풍속화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질적 수준의 불균등하고 가변적인 품질은 그의 불안정한 생활로 인한 히스테리적 성격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는 해석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들은 더 비테가 말년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적지 않은 빚을 지게 되자 심리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암스테르담에서의 그의 삶은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때로는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 더구나 그의 아내 헤르예 아렌츠(Geerje Arents)가 암스테르담으로 온 지 3년이 지난 1655년에 사망을 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더 비테에게는 심리적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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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de Witte, 1) 피터르 더 그래프 가족 초상화(1678), 2) 암스테르담의 오래된 어시장(ca.1660), 3) 암스테르담 어시장(1679)


한편, 더 비테는 아내가 죽은 후 23세의 고아 리스베스 판 데르 플라스(Lysbeth van der Plas)를 만나 재혼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더 비테가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더 비테 가족의 생활을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그녀는 전처소생 딸에게 못된 새엄마로 지낸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1659년 12월, 더 비테 부부가 이웃의 신고로 절도 혐의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의 재혼한 아내와 딸이 절도 혐의로 체포되자 더 비테는 암스테르담 공증인이자 미술상인 요리스 더 빌스(Joris de Wijs)에게 더 비트가 소유한 모든 작품을 포기하고 대신에 숙식과 800 길더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후 계약노동자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더 비테는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계약서를 파기해 버린다. 또다시 더 비테는 미술상에게 고소를 당하고 계약노동자로 일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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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nuel de Witte, 1) 포구 풍경(16775), 2) 아드리아나 판 휴스텐과 그녀의 딸(1662), 3) 가금류 판매자(ca.1670-75)


여러 후원자가 그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안정되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그는 어느새 도박에 빠져 사람들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이 언제나 그에게 걸림돌로 작용을 했다. 결국 그는 거주지 임대료 문제로 집주인과 논쟁을 하게 되고 더 비테는 1692년 새해가 밝아 오는 어느 날 아침 암스테르담 운하 다리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만 목을 맨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는 다리 아래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 그날은 날이 너무 춥고 운하까지 얼어붙었기 때문에 그의 사체는 11주 후가 지나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비테의 탁월한 구도 감각과 빛의 활용은 강렬한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그의 주된 관심사는 “건축물 그 자체라기보다 공간 그 자체, 즉 빛, 색채, 규모, 그리고 분위기였다”라고 하는 평이 중론이다. 따라서 세심하게 배치된 빛은 "넓지만 동시에 보호받는 공간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그의 고된 삶과 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발작 탓인지 그의 후기 작품들은 질적으로 고르지 않지만,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품들 중 하나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Bartholomeus van Bassen, Interior of the Cunerakerk Rhenen(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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