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
1560년을 전후해 스페인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지역은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8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안트베르펜을 떠나 암스테르담과 하를렘으로 떠나갔다. 17세기에 이르게 되면 네덜란드 미술시장은 이제 남쪽의 '플랑드르'에서 북쪽의 '홀란드'로 그 중심지가 바뀌고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가 시작된 것이다.
1. 네덜란드 황금기
1-1 프란스 할스(Frans Hals)
1-2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I
1-2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II
1-3 얀 스테인(Jan Steen)
1-4 헤리트 다우(Gerrit Dou)
1-5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
2. 델프트 학파
2-1 카렐 파브리티우스(Carel Fabritius)
2-2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2-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I
2-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II
2-4 니콜라에스 마에스(Nicolaes Maes)
2-5 헤라르트 하우크헤스트(Gerard Houckgeest), 엠마누엘 더 비테(Emanuel de Witte)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대략 17세기에 걸친 시기, 즉 네덜란드 독립을 위한 80년 전쟁(1568~1648) 후반기와 그 이후를 그린 시기이다. 당시 새로운 네덜란드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국가였으며 유럽의 무역, 과학, 예술을 주도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대적 배경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동인도 회사 설립, 그리고 해상 무역의 번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난 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며 경제적 안정과 함께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특히,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 개척에 성공하고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지로 무역망을 확장한다. 동인도 회사는 해상 무역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Gouden Eeuw)'를 열게 된다.
한편,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안트베르펜이 봉쇄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해 오게 된다. 그러자 암스테르담은 급격히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유럽의 주요 도시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귀족 대신 시민 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는 공화정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다.
암스테르담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자 국제 경제와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자리 잡는다. 이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는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끌게 된다.
황금시대를 맞이한 네덜란드는 이제 국제 경제와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자리 잡는다. 1602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로 동서양 무역권을 장악한다.
해양 강국의 막강한 위상은 당시 자료의 수치로도 알 수 있다. 1634년 네덜란드 상선은 2만 4천 여 대로 당시 유럽 전체 상선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경제 성장의 황금기를 맞이한 네덜란드는 엄청난 번영을 누리면서 무역, 군사, 과학, 예술 등에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해상 무역을 통해 급부상한 네덜란드는 해상 패권을 두고 영국과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심지어 네덜란드는 세 차례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배경에 도사린 뼈저린 실패와 성공의 과정들은 결국 네덜란드 만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를 않고 영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절대적으로 숙명적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Nicolaes Pietersz Berchem, 1 ) Allegory on the Expansion of the City of Amsterdam(ca.1663)
2) 부분 확대: 1662년 암스테르담의 도시경계가 확장되어 암스테르담 운하가 완성된다. 화가 베르헴은 암스테르담을 찬미하는 화려한 우화로 이 순간을 기념했다. 부분 확대한 곳의 "암스테르담의 처녀", 즉 스테덴마그드가 도시건축가 다니엘 스탈파르트의 '암스테르담 도시설계도'를 유피테르트와 유노가 이끄는 올림포스신들에게 보여주고 풍요의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네덜란드의 회화 역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그동안 80년 전쟁의 여파로 인한 격변과 대규모 인구 이동, 과거의 군주제와 가톨릭과 문화와의 급격한 단절로 네덜란드 미술은 혁신적인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며 새로운 미술환경을 형성하게 된다.
16세기 초엽 네덜란드는 아직 15세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던 얀 반 에이크와 같은 뛰어난 거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격동의 시대를 소위 ‘풍속화’라는 장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페테르 브뤼헬 같은 화가가 출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존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옛날 방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알프스 북쪽의 독일과 영국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쪽의 미술가들이 어떤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것인가라는 기술적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데 반해 북쪽의 미술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회화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생겨난 문제였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당시 네덜란드 남쪽지방 플랑드르의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한 의미는 단순히 외형적 상징물에 국한 하지 않았다.
1577년 스페인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패하고 물러가자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들은 평화롭게 공존을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1578년 5월 29일 가톨릭 미사가 진행중이던 하를렘에 있는 성 바보 성당(St. Bavo Church)에 개신교 군인들이 무력을 앞세우고 진입해 사제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의 공격시각이 정오에 벌어졌기에 '하를렘 정오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평화롭던 하를렘은 물론 네덜란드 전역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우상숭배 논쟁이 극렬하게 전개된다.(* '성 바보 성당'은 그후 개신교 교회로 자리잡는다. 하를렘 박물관 전시자료 중에서 발췌)
이러한 상황에서 플랑드르의 화가들이 그들에게 커다란 수입원인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화가들에게 유일한 수입원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를 그리는 정도였다.
교회 미술은 이제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고, 어떤 종류의 종교 관련 조각 작품도 거의 제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미술시장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즉, "일상생활의 풍경"이나 풍속화, 그리고 다른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전통 회화장르였던 종교화와 역사화가 서서히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자 대신에 농민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과 자연풍경, 도시풍경, 그리고 해양풍경 등을 그림 풍경화와 꽃을 그린 정물화 등 수많은 장르가 세분화되어 발전해 나간다. 이들 장르가 발전하게 된 것은 결국 17세기 네덜란드 정치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해 나간 화가들의 영향이 결정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는 장르의 개별화를 통해 다양화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회화장르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는 1620년대 후반부터 1672년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까지 약 50여 년 간이 네덜란드 황금시대 회화의 절정기라고 하겠다.
1) Pieter Brueghel de Oude, The Peasant Wedding(1566–69)
2) Samuel van Hoogstraten, Man at a Window(1653)
3) Salomon van Ruisdael, View of Deventer Seen from the North-West(1657)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크게 4가지 분야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초상화와 풍경화, 그리고 생활모습과 전문분야(genre)의 그림들(앞에서 풍속화라고 했던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풍경화의 경우에도 예전처럼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보다는 사람이 사라진 자연풍경만을 표현하고 채색도 거의 단순한 색감으로 변해갔다.
더구나 그림을 사려는 구매자가 늘어나게 되자 그림 제작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호이엔(Goyen) 같은 화가는, 갈색 계통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고 빠른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물감이 바로 갈색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색 위주의 그림으로 가능한 정감 있는 그림을 만들어 내려는 화가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시간을 절약하고 가격을 낮추게 되어 수요 공급의 원칙에 부합할 수 있게 된다. 호이엔이 그린 강가 풍경은 간결하고 소박한 그림 속에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런 그림을 소위 ‘픽쳐레스큐’(pictureresque)라고 불렀다.
이처럼 이 시기 화가들은 대부분 초상화나 풍경화, 정물화 등에 집중하고 화가들은 관련 장르에 해당되는 작품들을 그려나간다. 이들 장르와 소재는 당대 서양회화에서 새로 등장한 것으로서, 후대의 회화 발전 양상에 있어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의 화풍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가 16세기 중반부터 시작한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기점으로 시민군과 특히 상인계층이 부상하면서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빛내줄 방법으로 초상화가 필요해졌다. 시민사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로 개인 초상화나 집단초상화를 원했다. 더구나 지역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지역의 위원회나 지방자치 단체의 위원들이 회의실이나 모임 장소에 집단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런 고객들의 취향을 그려내는 화가들은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가장 발전을 이룬 네덜란드 바로크 회화의 특징적 주제 중 하나는 대규모 집단 초상화, 특히 렘브란트 반 레인의 <야경>과 같은 시민과 민병대 길드를 대상으로 한 초상화였다. 이러한 상황은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의 또 다른 특징으로, 그림의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이라는 점과도 연관이 있었다.
주로 일반 시민들 가정에서 장식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그림들은 대부분 그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회가 발전하면서 여러 시민단체들이 흡사 단체사진을 찍듯 단체초상화를 그려 자신들의 권세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욕구를 채울 수 있기 위해서는 대형 단체 초상화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당시 세계 최강자로 군림하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부와 번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제작된다.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의 대표작 ‘직물제조업자 길드 이사들’(1662)이 그것이다.
1661년경 렘브란트는 직물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단체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고 1662년 이 그림을 완성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초상화의 주요 고객이었지만 네덜란드는 해상무역과 금융거래로 큰돈을 번 상인들이 건물이나 집을 장식하려는 용도로 초상화를 주문했다.
1) 렘브란트 판 레인, 직물제조업자 길드 이사들(1662)
2) Jan Victors, 고아원 급식소의 고아들(1659/60)
3) Gijsbert Claesz van Campen, 가족 초상화(ca.1620)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수많은 단체 초상화가 여러 민간단체들의 회원들을 그린 '단체 초상화'가 마치 단체사진처럼 제작된다. 당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화가들 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이외에 거주하는 인기 있는 화가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단체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 단체 초상화를 그렸을 것이다.
여러 도시들이 주제별로 독특한 스타일과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막대한 부로 인해 가장 큰 예술시장 중심지였다. 그러나 점차 하를렘과 위트레흐트, 그리고 라이덴 같은 도시 역시 문화 도시로 자리를 잡아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덜란드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남쪽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지역과 독일 출신 예술가들이 점점 더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1568년 스페인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지역은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80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도시 안트베르펜을 떠나 암스테르담과 하를렘으로 떠나갔다. 17세기에 이르게 되면 네덜란드 미술시장은 이제 플랑드르(남쪽의 현재 벨기에 지방)에서 홀란드(네덜란드 북쪽지방)로 그 중심지가 바뀌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이외의 지역에서 화가로서 별다른 수입 없이 지내며 경제적 고통을 받던 화가들이 이제는 거의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면 최소한 초상화 주문을 받아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제외한 델프트 학파의 화가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가 전개되면서 안트베르펜에서 홀란드의 중심도시 하를렘으로 초상화의 대가 프란스 할스가 이주해 온다. 그리고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렘브란트가 이주해 온다. 두 사람은 각기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대를 뛰어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델프트 풍속화의 거장으로 자리하게 되는 렘브란트의 제자 헤리트 다우, 카렐 파브리티우스, 니콜라에스 마에스 등과 델프트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이 시간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빛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화가들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낸 화가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 Geritt Dou, The Moneylender(1664),
2) Nicolaes Maes, 바느질하는 젊은 여인(1655)
3) Jan Steen, The Dancing Couple(1663)
Frans Hals(ca. 1583–1666), portraits, schutterstukken, regent groups, genre pieces
Hendrick Avercamp(1585–1634), landscapes with snow
Hendrick Terbruggen(1588–1629),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Willem Claeszoon Heda(1594–1680), still lifes
Jan van Goyen(1596–1656), landscapes
Pieter Jansz Saenredam(1597–1665), church interiors, cityscapes
Salomon van Ruysdael(ca. 1600–1670), landscapes
Adriaen Brouwer(ca. 1605–1638), genre pieces (inns)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portraits, schutterstukken, regent groups, genre pieces (figures)
Jan Lievens(1607–1674),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portraits
Adriaen van Ostade(1610–1684), genre scenes of peasant life
Willem van de Velde, the elder(ca. 1611–1693), seascapes
Bartholomeus van der Helst(1613–1670), portraits, schutterstukken, regent groups
Gerrit Dou(1613-1675), genre pieces (inns, family scenes), He was a student of Rembrandt.
Jan Both(1615–1652), Italian landscapes
Govert Flinck(1615–1660),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portraits, schutterstukken
Ferdinand Bol(1616–1680),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Emanuel de Witte(ca. 1617–1692), church interiors
Gerard Terborch(1617–1681), portraits, genre pieces (family scenes)
Philips Wouwermans(1619–1668), landscapes
Aelbert Cuyp(1620–1691), Italian and Dutch landscapes
Carel Fabritius(1622–1654), historical and biblical paintings, genre pieces (figures), He was a student of Rembrandt.
Paulus Potter(1625–1654), animals in landscapes
Jan Steen(1626–1679), genre pieces (inns, family scenes),
Jacob Isaakszoon van Ruisdael (c. 1628–1682)
Gabriel Metsu(1629–1667), genre pieces (family scenes)
Pieter de Hooch(1629–1683), genre pieces (family scenes)
Johannes Vermeer(1632–1675), cityscapes, genre pieces (family scenes)
Nicolaes Maes(1634–1693), portraits, genre pieces (family scenes, figures), He was a student of Rembrandt.
Meindert Hobbema (1638–1709), landscapes
※ For a more comprehensive listing, see the List of Dutch painters.
※ 이 시기 네덜란드인들 중간 이름이 'szoon'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의 아들'을 의미한다.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레인처럼 'sz.'로 쓰는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