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
“Wenn man Frans Hals sieht, bekommt man Lust zum Malen, wenn man Rembrandt sieht, möchte man es aufgeben.”("프란스 할스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만, 렘브란트를 보면 그림을 포기하고 싶어 진다.") -Max Liebermann -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1666), 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을까? 궁금증이 새록새록 돋는 그런 인물이다. 더구나 할스는 엄청난 고집쟁이로 소문이 나있었다고 하는데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꿈쩍 않고 할스 그가 있는 곳으로 와야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다니 말이다.
다소 괴팍하고 엄청 무뚝뚝할 것 같은 화가 프란스 할스, 그가 지닌 재능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인상주의 화가들까지 그를 칭송하며 모더니즘 선구자라고 했을까? 온통 프란스 할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궁금증뿐이다. 할스의 고집대로 할스를 만나러 그가 있는 하를렘으로 가보자.
프란스 할스(France Hals, 1582-1666), 그는 1582년 경 당시 스페인령이던 지금의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직물 상인 프랑수아 프란스 할스 판 메헬렌(Franchois Fransz Hals van Mechelen, ca.1542–1610)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아드리안체 판 헤르텐리크(Adriaentje van Geertenryck)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1591년 할스가 9세가 되는 해에 스페인이 안트베르펜을 침공하자 플랑드르를 떠나 하를렘이 있는 홀란드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 후 프란스 할스는 1616년 안트베르펜을 잠시 방문하는데 이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하를렘을 벗어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하를렘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할스는 하를렘으로 이주한 후 플랑드르 안트베르펜 출신의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한테서 그림공부를 한다. 그러나 그의 매너리즘 양식은 할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하다. 이 이외에는 그가 하를렘으로 이주한 후 화가로 성장하기까지 청년기에 무엇을 했는지 별다른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예술가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610년 경 하를렘의 ‘성 루카 길드’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이 길드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해 반드시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해야 했기에 이때부터 할스의 사회생활에 대한 사실들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할스는 1610년 표백공의 딸인 안네케 하르멘스드르 아벨스(1590~1615)와 결혼을 한다. 그녀는 1615년 5월 사망하는데 그때까지 세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들 두 명이 유아기에 사망하고 만다. 그녀가 죽은 후 2년이 지난 1617년 할스는 유리 제조업자의 딸 리스베트 레이니어스(1593년~1675년)와 재혼을 하고 여덟 명의 자녀를 낳는다.
할스의 다섯 아들, 즉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하르멘(1611~69)과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네 아들은 모두 화가로 성장한다. 뿐만 아니라 다섯 아이들과 프란스 할스의 친동생 디르크 할스(1591-1656)가 그의 화실에서 조수로 일을 했다. 이들은 모두 할스에게서 미술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스의 딸 아드리안체와 결혼한 피터르 반 로에스트라텐 역시 할스에게서 미술을 배우고 화가가 된다.(* Piet Bakker, “Frans Hals”, 《The Leiden Collection 카탈로그》, 제4판. 2017.)
한편, 당시 하를렘은 칼뱅파를 중심으로 개신교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신교운동이 전개되면서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성상 파괴뿐 아니라 가톨릭 사제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사태는 결국 교회를 장식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 관련 미술작품들을 몽땅 철거하거나 심지어 불태워버리는 소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시의회는 심지어 하를렘 미술관(Haarlemse Noon)에 소장된 모든 가톨릭 종교 미술품을 몰수하고 하를렘 밖으로 반출한다는 조건으로 판매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주제에 대한 시장이 사라져 버린 하를렘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할스는 초상화가로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개척해 나가야 했다.
할스의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1611년에 그린 사제 ‘야코부스 자피우스’의 초상화이다. 개신교도인 할스가 가톨릭사제인 그를 그렸다는 그 자체가 당시 하를렘의 상황뿐 아니라 네덜란드 미술시장 전반에 걸쳐있는 어려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반증처럼 할스는 또 다른 '획기적인 작품'으로 1616년에 실물 크기의 단체 초상화 '성 조지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를 제작한다. 이 작품들은 할스에게 모두 ‘첫 번째’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품들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모델은 1649년에 그린 라이덴 대학의 르네 데카르트이다.)
1616년 프란스 할스에게 의뢰한 단체초상화가 완성되자 시민 경비대 초상화를 필요로 하는 하를렘 미술계에 그의 입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할스는 당시 하를렘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다른 화가들과 경쟁을 해야 했기에 이 작품으로 하를렘 미술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에 할스는 안트베르펜으로 여행을 떠나 약 4개월을 머물렀다. 이 여행은 할스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할스는 피터 폴 루벤스와 앤서니 반 다이크 같은 플랑드르의 유명화가들을 직접 만났거나 최소한 그들의 작품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Studio International 2023년 11월 17일 발행, “France Hals”)
1610년대 할스가 안트베르펜을 방문한 후부터 그에게 화풍의 변화가 나타난다. 그의 변화된 화풍의 결과물이 어쩌면 1624년 그린 초상화 <웃는 기사>가 아닐까 싶다. 초상화의 주인공이 입은 수놓은 비단 소매와 화려한 레이스 소맷단을 리본처럼 섬세하게 표현한 기법을 통해 할스라는 작가의 정교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반짝이는 갈색 눈과 능글맞은 미소, 그리고 멋진 콧수염을 하고, 커다란 모자를 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모자가 클수록 중요도가 높다는 의미), 이 마치 할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이 초상화를 통해 표현하려 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게 한다. 이 작품은 할스의 대표작처럼 소개되고 있고, 인기가 많다.(* 현재 런던의 윌리스 컬렉션에 전시 중인 이 작품은 1865년 파리 경매에서 영국의 허트퍼드 후작이 5만 1천 프랑(현재 한화가치 약 200억원 정도)에 낙찰받았다.)
할스는 점차 자신만의 기법을 정립해 나간다. 초기 단계에서 할스는 두 가지 스타일을 동시에 구사했다. 의뢰받은 초상화의 경우에는 그의 스타일은 매끄럽고 세련되었지만, 의뢰받지 않고 그리는 일반적인 주제의 그림들은 보다 자유롭고 표현적인 스타일로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렸다. (* Nineteenth-Century Art Worldwide: A Journal of nineteenth-century visual culture, "Frans Hals")
후자의 스타일은 당시 의뢰받은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구분이 된다. ‘웃는 기사’(1624)를 비롯해 1625년에 그린 하를렘 시장 ‘야콥 피에테르즈 올리칸의 초상’((Jacob Pietersz Olifkan, 1596~1638)처럼 주문받은 초상화와 같은 시기 할스가 자유로이 그린 ‘풍속 초상화’ 작품들, 예를 들어 ‘류트를 든 광대의 초상’(1623년경~1624년경)과 ‘류트를 든 소년’(1625년경) 같은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그의 화풍과 기법의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하를렘 시장 올리칸의 초상화는 그와 결혼한 아내 알레타 한네만스(Aletta Hannemans)의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룬다. 결혼 후 부부의 초상화는 한 캔버스에 부부를 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각각 따로 그려 나란히 걸어 장식을 했다.
할스는 의뢰받은 초상화 작업은 가능한 매끄럽고 고상한 분위기를 유지했지만 그 이외에는 분명 자유롭게 다소 거친 화풍으로 바뀐 느낌을 전해 준다. 프란스 할스는 캔버스에 뚜렷이 드러나는 생동감 넘치는 붓놀림이 돋보이는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화풍은 큰 인기를 얻었고, 그 결과 부유한 양조업자나 상인들의 초상화 의뢰가 쇄도한다.
할스가 그리는 초상화 대상들은 연극배우부터 하층민 아이들까지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종종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란스 할스 시대에는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여겼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은 항상 근엄하게 무표정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의 어른이나 아이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웃는 모습으로 그려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역금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이처럼 웃는 모습을 그린다는 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17세기에 사람들은 위엄 있고 진지한 표정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미소를 짓거나 웃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칫 부자연스럽거나 천박해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림을 그릴 때 감정을 드러낸 모습을 그린다는 그 자체가 어려운 작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스는 미소를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누구보다도 미소를 잘 표현해 냈다.
할스는 웃는 아이들 그림도 많이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을 '킨더트로니'(Kinder tronie)라고 불렸다. 다른 화가들 역시 특정한 감정이나 표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실험하기 위해 '킨더 트로니'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할스는 9명의 자녀를 둔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림의 모델이 주변에 있었기에 ‘킨더트로니’를 상대적으로 자주 그렸을 것이다.
프란스 할스는 자신의 특유의 붓놀림이 이런 그림에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의뢰받지 않고 임의로 자유로이 그린 초상화들, 이런 그림들을 '트로니(tronies)'라고 불렸는데 당시 매우 인기가 많았다. 그는 주문받은 초상화도 그렸지만, ‘트로니’ 같은 그림들처럼 일반 시장에 판매할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도 적지 않았다.
하를렘 시민들이 그들의 집을 예술 작품으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할스는 부유한 시민들이 의뢰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인기 있는 트로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트로니를 많이 그렸다.
두 아이가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소녀는 책을 보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 소년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입을 벌린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이들이 음악에 얼마나 몰두해 있는지 알 수 있다. 프란스 할스의 자유로운 붓놀림이 소녀의 머리카락이나 소년의 털모자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들은 어쩌면 할스 자신의 아이들, 아마도 딸 사라와 아들 프란스 주니어를 그린 것일 가능성이 있어 특별하다. 1644년의 한 기록 문서에는 이 그림들이 '할스가 그린 하를렘의 아이들을 그린 두 점의 정사각형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할스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피사체의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는 자연이 그 순간에 보여준 것을 섬세한 색채의 스케일과 모든 표현 형식에 대한 숙달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그는 몇 번의 정확하고 유려한 붓질만으로 정확한 색조와 명암, 그리고 명암 표현을 얻어낼 정도로 탁월한 그림을 그렸다. 할스는 초상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되었고, 하를렘의 부유층들 대부분이 할스의 그림을 원하게 되었다.
할스는 개인들을 위한 초상화뿐 아니라 가족들 단체 풍속화도 그렸는데, 할스의 가족 초상화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부모와 자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서로 즐겁게 어울리고 미소와 웃음은 할스 작품의 특징처럼 보였다. 할스의 천재성은 가족을 그린 '풍경 속 가족'과 '풍경 속 가족 2'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할스는 결혼한 부부들로부터 그들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많이 받았는데(전통적으로 남편은 왼쪽에, 아내는 오른쪽에 위치했다), 새로 결혼한 하를렘 시장 올리카 부부의 이중 초상화는 마우리츠 후위스 미술관에 나란히 걸려 있다. 그러나 그 외에 결혼한 부부를 그린 다른 초상화들은 나중에 신랑과 신부를 서로 분리해 함께 전시되는 경우가 드물고 남자와 여자는 원래부터 독자적인 그림처럼 각각 따로 돌아다니게 된다.
할스가 그리는 부부초상화는 거의 대부분 남편을 왼쪽 패널에, 아내를 오른쪽 패널에 각각 따로 그린 분리된 이중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할스는 단 한 번 한 캔버스에 부부가 같이 있는 그림을 그렸다.
전통적으로 하를렘에는 성 게오르기우스 시민 경비대와 성 아드리안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아르케부스’ 부대, 또는 ‘클루베니에르’라고 부르는 부대, 이렇게 두 개의 시민 경비대가 있었다. 두 부대의 장교들은 모두 하를렘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 출신 중에서 시 당국이 선발했으며, 복무 기간은 3년이었다. 이들은 임기가 끝나면 시에서 연회를 열고 장교들의 기념 초상화를 제작했다.
이 초상화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성 게오르기우스 시민 경비대에서 복무했던 장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제3중대 대장 야콥 로렌츠는 이 그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는 대령인 헌병대장과 함께 식탁 상석에 앉아 있다. 할스 역시 그 당시 민병대원이었는데 바로 이곳 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wikipedia, Frans Hals)
1627년에 그린 ‘성 아드리안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와 같은 단체 초상화에서 할스는 각 인물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묘사한다. 얼굴은 이상화되지 않고 분명하게 구별되며,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통해 그들의 개성을 드러낸다. 할스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하를렘에서 집단초상화를 그리며 네덜란드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작품 활동을 하던 프란스 할스는 처음부터 시민 군단의 장교들을 위해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할스가 그리는 초상화가 틀에 박힌 구성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불안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할스가 바로크 시대의 여러 유명 화가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처럼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각을 살려내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차 할스는 어느덧 하를렘의 단체 초상화 거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할스는 하를렘에서 시민 경비대 초상화를 누구보다 많이 그렸는데, 하를렘 시민 경비대와 민병대의 기념비적 단체 초상화 다섯 점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 할스 특유의 자유로운 붓놀림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616년에서 1639년 사이에 할스는 하를렘의 성 조지 홀과 칼리버맨 홀을 장식하기 위해 네 점의 단체 초상화를 더 그렸다.
어느새 할스의 시민 경비대 초상화는 하를렘 밖에 까지 알려져 명성을 얻는다. 그 덕분에 1633년에는 할스에게 암스테르담의 레이니어 레알 대위와 코르넬리스 블라우 중위가 이끄는 부대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하를렘 이외의 지역, 특히 암스테르담에서 주문이 들어온 것은 당시 분위기로서는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할스는 결코 하를렘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하를렘에 머물며 고객들이 자신에게 오도록 고집을 부렸다. 그렇기 때문에 할스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를렘 출신이거나 초상화를 그릴 당시 하를렘을 방문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할스가 영광스럽게도 암스테르담 11 구역 성 조지 시민 경비대 장교들의 집단 초상화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 되어 계약을 어기고 할스는 갑자기 단체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야 하는데 가지를 않는다. 할스는 하를렘에 있는 자신의 집과 작업실을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오가는 일이 시간을 너무 잡아먹고 숙박비까지 드는데도 이에 대한 보상이 적다고 불만을 표한다. 그러자 암스테르담 경비대는 비용을 더 주겠다고 하는데 할스는 이를 마다하고 만약 시민경비대가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면 그가 있는 하를렘으로 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cf: Steven Nadler, The Portraitist: France Hals and his Worl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2022.)
의뢰를 받은 지 4년이 지난 1637년, 계약은 완전히 결렬되고 할스는 1,000 길더(현재 한화 약 1천만원 정도)가 넘는 거액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당시 17세기 화가에게는 물론이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화가에게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할스는 작품의 왼쪽 절반 정도만 그렸기 때문에 나머지는 할스의 제자인 피터 코데(Pieter Codde, 1599~1678)를 시켜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훗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렘브란트가 10여 년 후에 그린 ‘야경’(The Night Watch)의 인물들이 훨씬 더 뚱뚱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그림 속 시민군 체격이 훨씬 말랐다고 ‘마른 부대’(The Meagre Company)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하를렘의 거장 할스에게는 암스테르담 시민 경비대에서 두 번 다시 집단초상화를 의뢰하지 않는다.
할스는 당시 하를렘의 성 조지 민병대 소속이었다. 그 덕분인지 1639년에는 하를렘 성 조지 시민 민병대 지휘관들이 할스에게 또다시 단체 초상화를 의뢰한다. 이 작품은 할스가 그린 여섯 번째 시민 경비대 초상화였다. 네덜란드 국민들은 80년 전쟁을 겪으며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할스는 하를렘의 지역 군인 조합 슈테라이(Schutterij)의 회원이었다. 그 덕분에 할스는 이곳 중대를 세 번이나 그릴 수 있었다.
더구나 1639년에는 ‘성 요리스 중대’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는 할스 자신의 자화상까지 포함시켜 그림을 완성했다. 할스의 다른 단체 초상화와는 달리, 이 초상화 속 경비대원들은 두 줄로 서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에 할스는 자신의 모습을 슬며시 포함시켜 놓는다.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두 번째가 할스,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다소 짓궂어 보인다.
할스의 화풍은 생애 동안 변화해 왔다. 밝고 생생했던 색채의 그림들은 점차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로 대체되었다. 이는 개인적인 취향이라기보다 그의 모델이 된 개신교 신자들의 단정한 복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분위기는 1640년대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초상화를 플랑드르풍으로 변모시켜 놓는데 큰 역할을 한다. 가느다란 얼굴과 손가락, 매끄러운 화풍, 반짝이는 천에 대한 애착 등이 그것이다. 할스의 그림은 말년이 되면서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어두워져 갔다.
반 고흐는 “할스가 27가지의 서로 다른 검은색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할스는 검은색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짙은 색채로의 전환은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지 표정에서 드러나는 밝은 미소뿐 아니라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어두운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리려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고뇌를 표현하는데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활기와 생동감을 발산했지만, 후기 초상화들은 묘사된 인물들의 위엄과 품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절제된 묘사는 특히 1641년 작 ‘성 엘리자베스 병원의 이사들’과 20년 후에 그린 ‘노인 구빈원의 이사들(ca.1664)’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색채의 걸작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거의 단색에 가깝다. 그의 그림에 표현된 제한된 색채는 특히 피부색에서 두드러진다. 해가 갈수록 회색빛이 강해지다가 결국 그림자가 거의 완벽한 검은색으로 변한다 .
그의 전성기는 1620년에서 1630년 사이로, 이 시기에 그는 하를렘의 부유한 귀족 계층과 상인, 학자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할스의 작품은 넓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캔버스에 초벌 작업 없이 직접 물감을 칠하는 기법을 통해 표현되는 생동감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 할스는 100점이 넘는 개인 초상화와 6점의 단체 및 가족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1640년부터 그의 작품 의뢰 건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이는 아마도 부유층의 화풍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더욱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려진 화풍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를렘의 거장 프란스 할스는 말년에 가서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자신의 화풍을 고집하며 더욱 인간내면의 세계를 그리려 했기에 어느새 유행에 뒤처지는 화가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즐거운 술꾼’처럼 그도 술을 좋아해 큰돈을 모으지 못하고 어려운 노후를 보내야 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650년경부터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거의 경외감에 휩싸인 듯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할스 말년 마지막 16년간 그린 초상화들은 대부분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시기에 그의 그림들은 더 이상 웃음이 묻어나지 않는 초상화들로 변화한다. 그의 색채는 예전만큼 풍부하지 않았지만, 오랜 작업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폭넓은 흑백 색조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색채만으로도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말년에 그린 마지막 작품들, 두 점의 단체 초상화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그림들은 할스가 80세 되던 해에 ‘하를렘 노인 구빈원 이사들’(1664년)과 하를렘 ‘노인 구빈원 여성이사들’(1664)에 대한 단체초상화를 의뢰받아 그린 작품들이다.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에 그린 이 작품들은 현재 프란스 할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할스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인물에 대한 해석이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적어도 한 명의 남성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실제 안면 마비 환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림 속 인물에 대한 할스의 놀라운 통찰력은 그의 그림이 단지 대상을 실제처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내면까지 그려내는 그의 솜씨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함께 개신교도였던 할스가 그의 예술적 발전 과정에서 종교적 색채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그의 작품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그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스며든 상하귀천이나 종교 여부를 떠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말년에 이르러 거의 영적인 것으로 승화된 느낌이다.
한편, 프란스 할스는 작품 활동으로 상당한 보수를 받았지만, 말년의 그의 생활은 어쩐 일인지 빚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빵집, 정육점, 기타 상점 주인들에게 외상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잦다 보니 이들에게 채무에 대한 소송을 당하기 일쑤였다. 예술 활동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을 그에게 빚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할스는 1664년부터 하를렘 시립 양로원에서 제공하는 노인연금으로 연명하게 된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실인데, 다행히 그가 하를렘에서 화가로서 거장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도 경이롭다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할스가 마지막으로 그의 최고의 명작 두 개의 집단초상화를 남기고 얼마 안 되어 1666년 8월 26일 84세가 넘는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할스는 그가 일생을 보낸 하를렘의 성 바보교회에 묻혔다.
생의 대부분을 암스테르담에서 17km 밖에 안 떨어진 하를렘을 벗어나지 않고 붓질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내 프란스 할스. 그의 작품은 220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형 단체 초상화 13점이 현존하며, 그중 8점은 현재 하를렘의 프란스 할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할스는 이전의 딱딱하고 고루했던 관료적인 초상화에 활력과 신선함을 불어넣어 이 장르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할스는 오랫동안 초상화 외에는 다른 주제를 다루지 않아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유능하지만 한계가 있는 화가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할스의 진면목이 살아나게 된다.
1666년 할스가 사망한 지 거의 200여 년 후인 1862년 프란스 할스 미술관이 개관한다. 그러자 하를렘은 에두아르 마네, 귀스타브 쿠르베, 존 싱어 사전트, 클로드 모네 등 19세기 중반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중요한 순례지가 된다.
할스가 초상화에 사용한 전례 없는 자유로운 화풍은 그를 당대 가장 현대적인 화가로 만들었다. 그는 관습적인 자세 대신 움직임이나 표정에 대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을 그렸기에 모더니스트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안겨준 것이다. 특히 할스의 탁월하고 기교 넘치는 화풍은 인물들을 생동감 있고 솔직하고 친근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할스는 편견 없이 인물들의 개성에 몰두하여 호기심, 재치, 그리고 공감을 드러냈다. 웃음이나 미소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식으로 웃는 인물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특히 프란스 할스는 네덜란드의 상류층을 묘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소외 계층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렸다. 이 같은 혁신적인 풍속화와 실물 크기의 작품들을 통해 그는 당시 초상화계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당시 사회 소외 계층에게 전례 없는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19세기말, 그의 그림은 막스 리버만, 빌헬름 라이블, 로비스 코린트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과 마네, 모네 쿠르베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할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네의 ‘술꾼’ 일 것이다. 이 작품은 마네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전시 중이던 할스의 ‘술꾼’(1628~30년경,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 할스 작품의 정식명칭은 ‘유쾌한 술꾼’(1628-30)이고 마네 작품의 정식명칭은 ‘압생트 마시는 술꾼‘(ca.1859)이다.)
그뿐 아니라, 19세기에 들어서자 할스의 예술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프랑스 언론인이자 미술 평론가인 테오필 토레 뷔르거의 노력 덕분이었다. 할스 예술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자유롭고 뭉침 없는 붓놀림에서 드러나는 스케치적인 솜씨에 뷔르거는 할스의 표현 기법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의 예술이 지닌 생동감과 자유로움을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 것이다.(* Frans Hals Meet Singer Sargent, Van Gogh and Manet, 프란스 할스 미술관, 전시도록, 2018.)
더구나 할스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과 연결되면서 19세기 현대 미술가들의 감성에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클로드 모네와 구스타브 쿠르베, 에두아르 마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까지 모두 프란스 할스를 참배하기 위해 하를렘으로 모여든다.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몰라.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매끄럽게 마무리된 다른 화가들 그림과 얼마나 다른지 몰라.!"
또한 고흐는 1888년 친구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초상화만 그렸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리고 “군인들의 초상화, 장교들의 모임, 공화국의 업무를 위해 모인 판사들의 초상화, 흰색 보닛을 쓰고 양모와 검은색 새틴 옷을 입고 입는 고아원이나 구빈원의 예산을 논의하는 귀족 여인들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뿐 아니라 그는 술에 취한 술꾼, 마녀처럼 즐거워하는 늙은 생선 장수, 아름다운 집시 창녀, 포대기에 싸인 아기들, 콧수염을 기르고 부츠를 신고 박차를 맞추는 용감하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도 그렸다.”(* 빈센트 반 고흐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888년 7월30일)
할스의 매춘부는 여러 화가가 모사를 했다. 대표적으로 고흐와 리버만의 모사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이 작품을 1885년 12월에 그렸는데 고흐가 안트베르펜에 잠시 머물던 시기에 하를렘을 다녀온 후 모사한 작품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인물들에 대한 고흐와 할스의 일치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Head of a Woman with her Hair loose,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할스가 그린 수많은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소외된 사람들이거나 모두가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난 그림으로 하나하나 작품으로 승화되어 있었기에 고흐는 넋을 잃고 감격하고 있었다. 특히 고흐는 할스의 다양한 검은색 색조를 매우 좋아했다.
고흐뿐 아니라 마네와 모네를 비롯한 19세기 화가들 역시 프란스 할스의 화풍에서 영감을 받았다. 할스가 그린 초상화 속 인물들은 놀라운 생동감과 인상적인 개성이 특징이다. 자유롭고 대담한 붓놀림으로 표현된 할스의 스케치 같은 그림들은 19세기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인상파 화가들은 할스를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겼다.
그중에는 독일 출신 화가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도 있었다. 그는 1870년대 초반부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수없이 하를렘을 방문한다. 그리고 미술관에 소장된 할스의 작품들을 수없이 모사한다. 리버만은 1876년 여름에만 약 30점의 모사본을 제작한다. 할스를 그렇게 모사한 이유를 리버만은, "프란스 할스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렘브란트를 보면 그림을 포기하고 싶어 지기에" 그렇다고 했다.
(* Erich Hanke, “Mit Liebermann in Amsterdam,” Kunst und Künstler 12 (1914), s.18. “Wenn man Frans Hals sieht, bekommt man Lust zum Malen, wenn man Rembrandt sieht, möchte man es aufgeben.”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의 'Night Watch'를 본 후 리버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자료인용).
할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에게 재조명되었고, 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자연주의적 화풍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들 덕분에 드디어 1900년에 이르러 하를렘에 할스의 동상이 세워진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paintings_by_Frans_Hals
마네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The Absinthe Drinker, ca.1859)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주변 지역을 드나들던 알코올 중독자 넝마주이 콜라르데(Collardet)의 전신 초상화이다. 그는 귀족처럼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갈색 망토를 두른 채 서 있고 발치에는 빈 압생트 병이 버려진 채 난간에 기대어 있다.(Ny Carlsberg Glyptotek, 코펜하겐)
그런데 마네의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할스의 냄새가 풍겨온다. 그것은 마네가 신화나 역사 대신 거리의 사람들을, 그것도 하층민이나 부랑아 같은 사람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색의 단순화를 통해 자기 식대로 그리는 고집, 이런 의지가 반영된 그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네의 그림을 보다 보면 어느새 프란스 할스의 말년에 그린 작품들이 겹쳐지면서 인생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