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렘브란트(Rembrandt) I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

by 박종수

"1640년에서 1642년 사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시민 민병대원들을 묘사한 대규모 단체 초상화 작업에 몰두한다. 이 작품을 그리는 와중에 그는 아내의 초상을 치러야 했다. 후에 <야경>이라고 부르게 된 이 작품이 그처럼 어두운 회색빛 색조를 띄게 된 건 어쩌면 그의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첫번째 이야기


1. 렘브란트의 라이덴 시대


렘브란트 이야기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에서 50Km 떨어진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자 하르멘 게리츠 반 라인과 그의 아내 닐트겐 반 주이터브루흐 사이에서 9번째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이 아이는 후세에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낸 대표적인 화가로 자리하게 된다.

.(* 네덜란드인 중간 이름이 'szoon'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이라는 이름은 ‘Harmen의 아들'이라는 중간 이름을 빼고 ‘렘브란트 판 레인’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이고 아버지는 개신교 신자였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방앗간 맞은편에 있는 베데스테흐에서 자랐다. "회화와 드로잉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었기에 그의 부모는 이 아이의 미술교육을 반대하지 않고 지원을 해준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기에 이 아이는 라이덴 라틴어 학교에 7년간 다녔고, 14살이 되는 1620년부터 1622년까지 라이덴 대학을 다닌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막 돌아온 야콥 이삭스 판 스와넨부르흐(Jacob van Swanenburgh, 1571~1638)에게 도제로 보내 3년간 미술 교육을 받게 한다. 렘브란트는 그에게서 기본적인 회화 기법과 작업에 필요한 지식들을 전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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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렘브란트 아버지가 운영하던 물레방아풍차, 2) 렘브란트 생가(지금은 개인집이라 표식만 달아놓았다.) 3) 렘브란트 생가팻말


한편, 그가 그동안 받은 라틴어 교육과 라이덴 대학에서의 역사에 관한 교육 등은 그에게 신학과 고대 고전 문학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제공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과 로마 신화에 대한 렘브란트의 해박한 지식과 친숙함은 그에게 당시 예술가의 최고 경지로 여겨지던 역사화가가 되기 위한 지적토대를 마련해 주게 된다.

렘브란트는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의 가족은 정통 칼뱅주의자가 아니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한 분파인 레몬스트란트파였다. 레몬스트란트파는 정통 칼뱅주의자들의 예정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레몬스트란트파는 타락한 자들도 "참된 믿음의 순종"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몬스트란트파와 정통 칼뱅주의자들(반레몬스트란트파로 알려짐) 사이의 논쟁은 렘브란트가 학생이었던 1620년대 초중반, 특히 라이덴 대학에서 매우 치열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학을 다닌 렘브란트는 자신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레몬스트란트파가 개인의 신앙을 중시했던 점은 렘브란트가 작품 속 인물의 내면을 강조했던 경향과 일맥상통하다. 그러나 그의 이념에는 독단적인 면이 없었다.

라이덴에 있는 렘브란트 동상

그는 레몬스트란트파와 반레몬스트란트파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를 하였기에 종교에 대해서는 유연한 입장을 견지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렘브란트의 종교적 배경은 앞으로 그가 그리는 그림에 특정의 이념이나 정파적 신념에 치우치지 않고 그야말로 종교를 뛰어넘는 초월적 자아를 추구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렘브란트가 화가의 길을 택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1620년, 16세의 나이에 라이덴의 저명한 역사화가인 판 스와넨부르흐의 화실에 들어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덴의 거장 판 스와넨부르흐는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의 저서《회화의 기술》의 영향을 받아 렘브란트에게 회화의 기본 원리를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판 만더의 중요한 미술 논문은 1604년 하를렘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렘브란트가 판 스와넨부르흐의 화실에 들어가기 불과 2년 전인 1618년에 재판이 나왔는데, 당시 문화적 지형에서 미술의 광범위한 의미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과 역사적, 이론적 틀을 제공한 중요한 이론서였다.


특히 판 만더는 성경, 고대, 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져온 우화적인 장면과 주제를 포함하는 역사화가 가장 고귀하고 권위 있는 회화 장르라고 강조했다. 역사화는 삶의 의미를 숙고하게 하는 고무적이거나 교훈적인 서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화는 위기의 시대에 개인이 직면하는 윤리적, 도덕적 선택을 다루며, 감정과 열정을 극적이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역사화가들은 과거의 이야기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춘 박식한 예술가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K. van Mander, 그림책(Het Schilderboeck) 표지

판 만더의 또 다른 이론서인 『그림책(Het Schilderboeck)』역시 예술 작품 제작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예술가들의 위대한 업적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판 만더는 라파엘과 같은 이탈리아 예술가뿐 아니라 루카스 판 라이덴을 비롯한 네덜란드 예술가들도 언급하며, 이 두 사람을 모든 것에 익숙한 보편적 예술가로 칭송했다.


판 만더는 판 라이덴이 "타고난 재능"을 지녔으며 "얼굴, 손, 발, 집, 풍경, 온갖 종류의 직물 등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쉬지 않고 그렸다고 했다. 그는 특히 직물 그리는 것을 즐겼는데, 그는 실제로 보편주의자였으며 회화 예술이 포괄하는 모든 것에 정통했다.


렘브란트는 판 만더의 루카스 판 라이덴에 대한 평가를 읽으며 이들의 삶의 방식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 듯했다. 어느 틈엔가 라이덴 출신인 판 라이덴은 여러 면에서 렘브란트의 정신적 선구자이자 롤모델로 작용한 듯했다.


그는 분명 본받을 만한 모델이었으며, 실제로 렘브란트는 판 라이덴의 작품을 바탕으로 초기 에칭 작품 중 하나를 제작한다. 또한 렘브란트는 판 라이덴의 자화상이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식했는데, 이것이 렘브란트가 자신의 작품에 자화상을 자주 등장시킨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얀 리벤스, 자화상, 42*47cm, 라이덴 컬렉션

렘브란트는 1624년 판 스와넨부르흐의 작업실을 떠난다. 이제는 보다 현대적인 화풍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렘브란트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동료 화가 얀 리벤스를 만난다. 렘브란트보다 한 살 적은 리벤스는 같은 라이덴 출신으로 이미 조숙한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렘브란트처럼 리벤스도 라이덴에서 처음 미술 교육을 받았지만 1617년 부모님의 권유로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역사화가였던 피터 라스트만에게 2년간 사사했다.


리벤스는 라스트만에게서 인물 배치, 몸짓과 시선이 어떻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지 등 역사화의 핵심 원리를 배웠다. 이러한 지식을 습득한 리벤스는 1620년경 라이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젊은 화가였던 그는 곧이어 로마에서 위트레흐트로 돌아온 헤리트 판 혼토르스트(1592~1656)에게 사사받기 위해 잠시 위트레흐트로 간 것으로 보인다.


판 혼토르스트는 카라바조(1571~1610)가 발전시킨 혁명적인 회화 양식, 즉 극적인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 효과를 수용했으며, 이를 촛불이 등장하는 장면들에 적용한다. 리벤스는 판 혼토르스트의 카라바조풍의 화풍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여 역사화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들, 예를 들어 1625년경 작인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에 적용했다.

얀 리벤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ca.1625), 라이덴 컬렉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명암 대비 효과 외에도 리벤스의 촘촘한 구도와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에서 비롯된 시각적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파이프를 들고 앉아 미소 짓는 인물의 모델이 바로 렘브란트가 아닌가.


이 작품은 젊은 라이덴 출신 화가 리벤스의 가장 초기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렘브란트가 리벤스의 모델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두 화가가 서로 잘 알고 지냈으며, 어쩌면 같은 작업실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말해준다.


렘브란트는 이 시기에 리벤스의 작업실에서 여러 폭으로 구성된 오감의 알레고리를 포함한 초기 작품들 몇 편을 그린다. 이중 오감을 주제로 한 연작 세 점을 포함해 여러 점이 라이덴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데, 오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의식 없는 환자: 후각의 알레고리, 1624>와 <석공 작업: 촉각의 알레고리, 1624>, 그리고 <세 명의 음악가: 청각의 알레고리, 1626>이다.


이 작품들에서 렘브란트는 대담한 붓놀림과 강렬한 명암 대비, 밀접하게 구성된 구도, 그리고 유머 감각 등 리벤스의 현대적인 화풍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렘브란트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 것처럼, 리벤스 역시 렘브란트의 작품 <청각의 알레고리>에 모델로 깜짝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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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각의 알레고리(1624), 2) 촉걱의 알레고리(1624), 3) 청각의 알레고리(1626) , 라이덴 컬렉션


이 우화 연작은 오감을 주제로 한 렘브란트의 상상력 넘치는 회화적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각 패널화에는 어둡고 불분명한 공간에서 공통된 경험에 집중하는 세 인물이 좁은 틀 안에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인물들에게 밝은 분홍색과 하늘색 옷을 입혔는데,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인공조명이 더해져 색채가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 외과의사, 환자, 가수들, 젊은이와 노인, 남성과 여성, 투박한 사람과 세련된 사람은 기절한 환자를 소생시키거나, 수술을 하거나, 악보를 펼쳐 노래를 부르는 등, 후각, 촉각, 청각을 연결하는 활동에 몰두하는 모습이 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유머러스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625년, <감각의 알레고리>를 그린 직후 렘브란트는 리벤스의 뒤를 따라 잠시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피터 라스트만에게 사사한다. 리벤스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 역시 라스트만에게서 역사화의 핵심 원리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1626년 라이덴으로 돌아온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빠르게 성숙하여 라스트만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그와 경쟁하는 여러 역사화를 그렸는데, 같은 주제를 더욱 역동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 1620년대 후반 렘브란트는 자신의 절친이자 동료 화가인 리벤스와도 여전히 경쟁을 해나간다.


리벤스와 렘브란트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스스로를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아웃사이더로 묘사하고자 하는 공통된 열망은 그들에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명성은 헤이그에까지 퍼져 나갔고, 콘스탄틴 하위헌스(Constantijn Huygens) 는 오렌지 공작의 미술품 컬렉션을 위한 새로운 자국 출신 인재를 찾고 있던 중 1628년에서 1629년 사이에 이 두 젊은 화가를 보기 위해 라이덴을 방문한다.


Jan Lievens_Constanijn Huygens 초상 ca1628-29-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하위헌스는 특히 리벤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 매료된다. 동시에 하위헌스는 얀 리벤스에 대한 칭찬과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의 "영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능력을 극찬하며, 이는 프로토게네스, 아펠레스, 파르하시우스 등 고대 거장들의 업적에 필적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후 렘브란트는 1630년경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점의 에칭 자화상을 제작한다. 여기에는 거칠고 투박하며 세련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렘브란트가 살던 당시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사회에서는 부유한 엘리트층만이 값비싼 초상화를 의뢰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가난하고 병들었거나 사회에 부적응한 사람들은 예술적 묘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러한 그림을 의뢰할 여력도 그것을 활용할 방법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된 자선단체의 섭정이나 구호담당자들의 공식단체 초상화에서도 그들은 그림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들은 어제나 주변인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판화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의 에칭은 마치 삶의 순간을 포착한듯한 느낌을 주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삶에 초점을 맞춘다. 렘브란트는 탁월한 사실성을 바탕으로 거지나 병자, 노점상, 그리고 악사들의 모습까지 판화에 그리고 종이 위에 생생하게 표현해 내었다.


이처럼 렘브란트와 리벤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남달랐다. 따라서 리벤스와 렘브란트는 평생 동안 인간의 얼굴을 묘사하는 데 매료되었으며, 회화, 드로잉, 에칭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냈다.


한편, 트로니(tronies)라고 부르는 이러한 두상 연구에서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라이덴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만난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 얼굴을 모두 그렸다. 그중 일부에게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국적인 의상을 입히기도 했다. 두 화가 모두 노인의 얼굴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주름진 얼굴이나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 이들의 지혜에서 '인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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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의 설교(ca.1648), 2) 렘브란트, 렘브란트 어머니(1628), 3) 얀 리벤스, 렘브란트 어머니(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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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눈먼 토빗(1629), 5) 요셉과 포디발의 아내(1634), 6) 탕자의 귀환(1620)

1) 이 작품은 100 길더 판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렘브란트가 살던 당시 이 작품은 100 길더에 낙찰되어 팔렸다. 많은 동시대 작가들과는 달리 렘브란트는 피사체를 고정관념이나 캐리커쳐로 전락시키지 않고 예리한 사실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더구나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있다. 이곳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모두가 자유롭다. 그러한 예가 바로 이 작품이다.

4) 구약성서에 나오는 눈먼 토빗이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 시대의 이름 없는 거지와 행상인들의 연약한 자세를 바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이 눈먼 남자는 더듬거리며 문을 행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실물("naar het leven"), 기억("van onthout"), 또는 상상("uit den gheest")을 바탕으로 트로니를 그리고, 스케치하고, 판화를 만들었지만, 항상 묘사하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해 내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트로니는 종종 독립적인 예술 작품이었지만,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후에 이러한 인물 연구를 역사화에 많이 활용한다.


렘브란트의 가장 인상적인 트로니 중 하나는 <수염 난 노인의 흉상>인데, 1633년에 트럼프 카드만한 크기의 작은 종이에 그린 아주 작은 그림이다. 렘브란트의 대담하고 역동적인 붓놀림, 특히 노인의 찌푸린 이마와 단정하지 않은 머리카락, 그리고 수염을 묘사한 부분은 그림자에 가려진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노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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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수염 난 노인의 흉상(1633), 10.6*7.3cm, 라이덴 대학교 도서관자료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라이덴에서 서로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예술적 표현의 수준을 높여갔는데, 이러한 역동적인 관계는 이들이 2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는 1630년대 초 리벤스가 런던으로,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면서 아쉽게도 막을 내리게 된다.


두 사람 모두 더 크고 명망 있는 예술 중심지를 찾아 떠난 것이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은 라이덴보다 훨씬 국제적인 도시였고, 렘브란트의 이주는 그에게 1631년 이전에는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초상화가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2. 렘브란트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다


1631년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으로의 이주는 부분적으로는 초상화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인 이른바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헨드릭 아일렌부르흐의 초청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렘브란트는 아일렌부르흐의 작업실 책임자로 일하며 암스테르담에서 초상화가로서 빠르게 명성을 쌓아간다.


1630년대 초반에 이미 렘브란트는 적지 않은 걸작들을 제작해 낸다. 그의 뛰어난 작품으로 ‘니콜라스 루트의 초상’(1631년, 프릭 컬렉션, 뉴욕),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마우리츠미술관, 헤이그)가 있다. 또한 렘브란트의 신화와 종교 관련 작품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삼손의 눈을 멀게 하는 장면’(1636년,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과 같은 극적인 걸작들을 다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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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다(1630), 2) 바위에 묶인 안드로메다(1630), 3) 니콜라스톨프 박사의 해부학수업(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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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의 성전봉헌(1631) 5) 악타이온과 칼리스토와 함께 있는 디아나(1634~35), 6) 삼손의 실명(1636)

1)과 2) 작품은 이미 라이덴 시절에 그린 걸작들이다. 그리고 1632년 렘브란트는 '니콜라스톨프 박사의 해부학수업'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초상화 화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4) 이 그림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인데,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여신 디아나에게 벌을 받는 내용이다. 왼쪽에는 악타이온이 여신의 나체를 본 죄로 사슴으로 변해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는 장면이고, 오른쪽에는 님프들이 칼리스토의 옷을 찢어 그녀가 순결 서약을 어기고 유피테르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폭로하는 장면이다. 이 때문에 디아나는 칼리스토를 궁정에서 추방하지만, 칼리스토는 결국 아르카스를 낳는다.

6) 렘브란트의 작품에는 언제나 특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어떤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구약성경에 초인적인 힘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 삼손, 그의 연인 들라일라는 삼손이 그녀의 무릎에서 잠이 들자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힘이 사라진 삼손은 적들 손에 넘어가게 되고, 적들에게 붙잡혀 땅에 쓰러진 삼손은 적들의 단검에 눈이 멀게 된다. 렘브란트는 들라일라에게 아내 사스키아의 얼굴을,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에 칼을 치켜든 공격자에게는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렘브란트의 장난기 어린 솜씨에 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다.


한편, 렘브란트는 좋은 스승으로서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의 작업실에는 언제나 제자들로 붐볐다. 그중에는 카렐 파브리티우스처럼 이미 미술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적인 공적 경력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사는 점차 불행의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 렘브란트가 지니고 있는 마음들이 그의 초상화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매력적인 자화상 중 하나이기도 한데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화상>(1634)이 바로 그 작품이다. 28살의 렘브란트, 그는 이 자화상에서 모피 장식이 달린 재킷을 입고 검은 베레모를 비스듬히 걸쳐 쓰고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함께 같은해 렘브란트는 에칭 작품을 만든다. '칼을 든 사나이'는 다소 강렬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칼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마치 "이제 세상은 모두 내가 평정할거야."라는 선언을 하듯이 말이다. 렘브란트는 회화보다 때로는 이렇게 에칭작품으로 그 분위기를 더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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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렘브란트 자화상(1634), 2) 칼을 든 자화상, 에칭(1634)


렘브란트가 얼굴 대부분을 그림자에 가려진 모습으로 묘사한 자화상은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접근 방식이며, 그가 동시대 화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베레모의 부드러운 챙 그림자에 두 눈을 가리고 윤곽을 다소 불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렘브란트는 관람자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해 작가의 개성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그는 부드러운 붓질과 은은한 반광을 사용하여 얼굴의 입체감을 표현함으로써 그의 육체적 사실감과 심리적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는 그의 초상화를 열렬히 원하는 많은 고객들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렘브란트가 혁신적인 자세와 섬세한 피부색 표현, 그리고 명암의 조절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감탄한다.


렘브란트는 아일렌부르흐의 화실에서 자신의 화풍을 배우러 온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였는데, 그중에는 이후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내게 되는 고바르트 플링크(1615~1660), 페르디난트 볼(1616~1680), 야콥 바커(1608~1651) 등이 있었다.


네덜란드 화실에서 관례적으로 그랬듯이, 렘브란트는 주문 초상화에 대한 높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때때로 이들 제자나 조수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경우, 스승은 얼굴과 손을 그리고 조수는 의상을 그리는 역할을 맡는다. 렘브란트의 서명과 1635년 날짜가 적힌 <안토니 쿠팔의 초상> 도 그러한 경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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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토니 쿠팔의 초상(1635), 라이덴컬렉션, 2) 수잔나의 목욕(1636), 마우리츠미술관, 3) 서재속의 미네르바(1635), 라이덴컬렉션

렘브란트는 163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활발하게 초상화 작업을 하면서도, 1635년 작 <서재의 미네르바>와 같은 웅장한 성서와 신화 장면을 그리는데 몰두한다. 그는 진정한 거장이 되려면 역사화에도 능통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라이덴 시절에 제작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규모와 시각적 강렬함이 돋보이는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렘브란트가 이 시기에 이처럼 웅장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최고의 역사화가로 인정받던 플랑드르의 거장 페터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업적을 모방하고 그와 경쟁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당시 루벤스를 존경했던 콘스탄틴 하위헌스는 루벤스가 독창성과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모든 인문학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라고 평가했다. 하위헌스(Huygens)는 루벤스(Rubens)를 "우리 시대의 Apelles"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렘브란트에게도 이미 알려진 명칭이다. 하위헌스는 라이덴에서 이미 젊은 예술가 렘브란트를 방문한 후 그를 ‘Apelles’에 비유한 바가 있다.(* Apelles는 고대 그리스 최고의 화가를 말하는데 “완벽한, 또는 위대한 화가‘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한다.)


한편, 1639년 사스키아와 결혼한 지 5년이 지나 예술적 성공의 절정에 달했을 때,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성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에 있는 큰 집을 구입한다. 집을 사기 위해 그는 많은 돈을 빌려야 했고, 이 빚은 결국 1650년대 중반 그의 재정 문제의 원인이 된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 1634년 아일렌부르흐의 조카 사스키아 판 아일렌부르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1635년에서 1641년 사이에 사스키아는 네 아이를 낳았는데 막내 티투스만 살아남고 다른 아이들은 유아사망에 이른다. 더구나 그의 아내 사스키아까지 1642년 죽음에 이르게 된다. 4명의 아이들을 낳으며 반복된 출산으로 산모후유증에 시달리다 면역력이 저하되어 폐결핵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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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스키아와 함께한 렘브란트(1635), 2) 미소띈 사스키아(1633), 3) 사스키아(16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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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로라 여신으로 분한 아르카디아 의상의 사스키아, 5) 옆모습의 사스키아(1633), 6) 플로라여신 사스키아(1654)


사스키아의 죽음은 렘브란트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야경>을 그린 해에 벌어졌다. 1640년에서 1642년 사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시민 민병대원들을 묘사한 대규모 단체 초상화 작업에 몰두한다. 야경을 그리는 와중에 그는 아내의 초상을 치러야 했다. <야경>이 그처럼 어두운 회색빛 색조를 띄게 된 건 어쩌면 그의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민병대원 34명의 최대한의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단체 초상화의 형식을 과감하게 혁신한다. 그러나 나중에 '야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이 작품은 그의 제자였던 반 호흐스트라텐이 "렘브란트는 의뢰받은 초상화를 전체적인 이미지를 너무 중시해 개인들 면면을 무시했다“라고 평을 한다.


그의 주장은 렘브란트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보다 전체의 조화를 위해 개인들 초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통일된 분위기만을 강조했다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개인들 초상화가 필요해 단체초상화 형식을 빌어 개인들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던 건데 전체의 조화만을 고려한 그림이라고 비아냥 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림은 사방, 특히 왼쪽 부분이 심하게 잘려나가 있어 렘브란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 결과, 대장과 부대장의 모습이 그림 중앙, 그것도 가장 앞쪽으로 치우쳐 있게 된 것이다. <야경>이 완성된 직후 헤리트 루덴스가 그린 모작을 보면, 원작의 구도가 현재 상태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일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의 현재 상태는 어쨌거나 작품의 결정적인 문제점이자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강렬한 빛을 받는 두 인물, 즉 왼편 중경의 소녀와 앞쪽에 있는 중위가 구도를 지배하고 있다. 두 인물 모두 노란색 의상을 입고 있어 빛의 효과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포트라이트" 효과 때문에 그림 전체의 색조가 어둡게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어두운 인상을 주며, 이는 <야경>이라는 별칭을 얻는 데 기여하게 된다. 좀 더 밝은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게 혹시 렘브란트 가족의 불상사로 인한 결과는 아니었을지,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일 테지만 렘브란트도 자기가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에 아무리 대작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를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The Night Watch(야경), 원제: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 1642)


사스키아의 죽음 이후부터 1650년대 중반에 이르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 렘브란트의 작품 활동에 대한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어쩌면 고뇌에 찬 렘브란트가 스케치북을 들고 시골에 파묻혀 오랫동안 산책하며 풍경과 인물 습작을 그리며 스스로 위안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사스키아가 떠난 후 렘브란트의 사생활은 과연 어땠을까? 그는 과연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을지 모든 게 궁금하기만 하다. 또다른 램브란트를 찾아가 보자.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렘브란트 공원에 설치한 작품들, 그런데[ 지난해 봄 찾아갔을 때 이 동상들을 어디로 옮겼는지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