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들I
1664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 목록에서 "우리 시대의 기적"(het wonder van onze tijd)이라고 불렸던 이 화가는 특별한 추모나 거창한 찬사를 받지 못했다. 17세기를 빛내며 네덜란드 황금기를 그야말로 쉼 없이 그려낸 렘브란트, 그의 어둡고 거친 붓질의 초상화와 종교화, 역사화, 신화 작품들,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잊히고 외면당하고 있었다.
1634년, 렘브란트는 헨드릭 아일렌부르흐의 사촌인 사스키아 아일렌부르흐(1612~1642)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1631년부터 일했던 아일렌부르흐의 아카데미 미술실을 나와 1635년 자신의 작업실을 차리고 독립을 한다. 또한 렘브란트 부부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 1639년이 되면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Sint Anthoniesbreestraat)에 있는 현재의 렘브란트 생가(Rembrandthuis)로 이사를 하고 정착을 한다.(* 이곳은 현재 렘브란트 기념관으로 운영 중이다.)
그러나 1642년 렘브란트의 부인 사스키아는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그녀가 낳은 3명의 아이들도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다행히 티투스는 살아남는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렘브란트의 1640년대는 기구한 운명처럼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행히 렘브란트의 사업은 번창한다. 그리고 사스키아가 결혼지참금으로 지니고 있던 4만 길더가 있었기에 1647년 그의 재산은 40,750 길더로 평가되어 여유가 있었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스승으로서도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그는 활발하게 작업실을 운영했고 많은 제자를 두었다.
그러나 1640년대 렘브란트의 가정생활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그에게 여전히 힘든 생활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스키아 사후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사스키아 친정식구들과 렘브란트 사이에 벌어진 갈등 문제들, 또한 사스키아 사후 렘브란트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들 티투스를 돌보던 게르트예 디르크스라는 여성과의 법적 분쟁 등이 그를 괴롭혔다.
렘브란트는 그동안 미망인 게르트예 디르크스(1600/10년경~1656년)를 고용하여 자신의 집에서 티투스를 돌보게 했고,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647년 렘브란트가 또 다른 여인 헨드리케 슈토펠스(1626 ~ 1663년)를 만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된다.
1649년, 디르크스는 렘브란트가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결국 디르크스와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된다. 그녀는 사스키아의 유산 일부인 보석을 렘브란트가 선물로 주었다고 주장하고, 티투스를 위해 쓰려고 전당포에 맡겼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1650년 그녀가 하우다(Gouda)의 교정시설에 수감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렘브란트는 디르크스와 분쟁에 휘말리면서도 헨드리케 슈토펠스를 디르크스 대신 가정부로 들인다. 렘브란트와 그녀는 점차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사스키아가 만일 자기가 죽은 후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할 경우에는 재산을 모두 티투스에게 양도해야 한다고 유언을 했기에 렘브란트는 슈토펠스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한다. 렘브란트는 슈토펠스와 아이를 낳고 1649년부터 1663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사실혼 관계로 함께 살았다.
이로 인해 헨드리케는 1654년에 “결혼도 하지 않고 음란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질책을 받기도 한다. 이 두 사건 모두 렘브란트의 명성에 치명적이었다. 렘브란트가 1649년 이후 10여 년 동안 초상화 의뢰를 거의 받지 못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1650년대 전반기에 재정적인 어려움에 점점 더 시달렸다. 이는 상당 부분 그의 재정 관리 부실 때문이었다. 그는 1639년에 구입한 집의 대출금을 여전히 다 갚지 않았고, 게다가 1642년 이후로는 초상화 의뢰를 거의 수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계산해 보면, 그가 결국 파산하게 된 1656년까지 수집품 구입에 쓴 금액만으로도 집을 사기 위해 빌린 대출금을 갚고도 남았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작품 제작을 위해 그동안 값비싼 이국적인 물건들을 정기적으로 구입했고, 경매에서 값비싼 미술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1656년, 그가 더 이상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자 채권자들은 파산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그 후 그의 소유물 목록이 작성되었다.
이 목록은 그가 130점이 넘는 그림과 70권의 판화 앨범을 포함한 많은 예술품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렘브란트가 "많은 양의 뿔이나 조개껍데기, 산호, 실물에서 본뜬 석고 모형, 그리고 여러 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소장품에는 다른 화가들의 판화와 회화 작품, 그리고 무굴 제국 시대의 세밀화 등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소장품의 규모와 범위는 렘브란트가 1656년 집과 함께 경매에 부쳐졌을 때 작성된 그의 소유물 목록을 통해 알려졌다. 이제 그는 소장품 전체를 처분해야 했다.(* 렘브란트의 소장품을 1650년경의 모습 그대로, 렘브란트가 자신의 미술실에 보관했던 방식대로 재구성한 전시물은 현재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렘브란트에게 수집은 거의 중독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집을 팔고 훨씬 작은 임대 주택으로 이사한 후에도 렘브란트는 또다시 수집을 시작한다. 그가 사망할 무렵에는 그가 살던 집의 두 개의 방이 새로운 수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1658년, 결국 렘브란트는 파산으로 인해 자신의 소유물, 특히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경매에 부쳐야 하는 굴욕을 겪는다. 그 후 그는 암스테르담의 요르단 지구에 있는 예술가 거리로 이사를 했고, 결국 로젠그라흐트에 있는 비교적 작은 집을 빌려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파산한 이유는 단지 수집광같은 짓거리와 집 관리 부실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역사적 맥락은 그의 파산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한다. 그의 파산은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파산하고 다른 사업체들도 재정난에 직면했던 바로 그 시기에 발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1654) 동안 네덜란드 해안 봉쇄로 인해 동방과의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모든 경제활동이 파국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투자한 모든 거래는 부도를 맞게 되었고 주식거래도 파탄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영향이 렘브란트에게도 닥쳐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642년 <야경> 작품 이후 10년 동안 렘브란트의 작품 활동은 여러 면에서 변화를 보인다. 회화 작품 수는 다소 감소했지만 주제, 크기, 스타일이 다양해진다. 더욱이 그는 <야경>을 그린 후부터 거의 주문받은 초상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초상화는 물론 여러 사람들을 묘사한 야심 찬 에칭 작품들을 제작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대부분 1640년대부터 렘브란트의 신화적 삶은 오히려 그의 예술이 더욱 깊어졌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642년 이후 렘브란트의 작품은 그의 삶과 작품이 하나가 된, "진정한" 렘브란트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렘브란트로 발전한 모습은 어쩌면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즉 자화상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렘브란트는 1620년대 후반 라이덴에서 자화상의 표현적 특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회화, 드로잉, 에칭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화상을 그렸다. 실제로 자화상은 약 80점이 있는데 현존하는 전체 작품(회화 약 350 작품, 에칭 약 300 작품)의 10분의 1이 훨씬 넘을 정도로 많다.(* 작품 숫자는 Wikipedia의 '그림 목록'과 '에칭 목록' 참조)
그는 의뢰받은 초상화에서보다 자신을 그린 자화상에 훨씬 더 다양한 회화적 효과와 기법을 활용했다. 그의 자화상은 무궁무진한 다양성과 독창성을 보여주어 어느 하나도 완전히 똑같아 보이지 않는다. 렘브란트의 초기 자화상 중 상당수는 라이덴에서 작업했던 트로니(tronies)와 관련이 있으며, 이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감정 표현, 화려한 의상, 자유로운 붓놀림, 그리고 강렬한 빛 효과가 특징이다.
렘브란트의 초기 트로니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그의 표정, 강렬한 조명 효과,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의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그린 초창기 글래스고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1632년 작 자화상의 형식적인 표현과는 확연히 다르게 변모해 간다.
1628년 22살의 렘브란트의 초창기 자화상은 떡거머리 총각같이 풀어헤친 머리를 자연스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눈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강렬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그의 야심찬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눈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드러내면서 점차 위대한 화가로의 길을 가고 있었다. 특히 강렬한 명암 대비로 순간의 표정을 포착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1630년대 초 암스테르담으로 이주를 하면서 존경받고 성공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자신의 모습을 확립한다.
그의 초상화는 단순히 화가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화가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형성된 모습을 렘브란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통해 답을 하고 메세지를 전하려 한 것이다. 그의 초상화가 때로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강렬한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한 인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록 그가 때로 좌절하고 음울한 질곡에 빠져 헤맬 때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상황을 숨기지 않고 여러 인간상으로 그려냈다.
렘브란트 후기 초상화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다. 때로는 무겁고 슬픔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품위와 평정심이 담겨 있다. 이는 자신의 업적이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의 어떤 거장들과도 견줄 만하다고 믿었던 렘브란트 자신의 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1632년에 그린 자화상에서부터 그 모습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에 반드시 모자나 머리띠를 둘러 머리를 덮고 있다. 조금 단정해진 것일까? 어쩌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유행을 따라 챙이 넓은 모자나 시대에 뒤처진 베레모, 또는 머리띠를 둘러 일반시민들과 같은 부류임을 보여주려 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검은 코트 위에 납작한 러프를 두르면서 일반 대중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다.
특히 1634년도부터 베레모와 모피 장식이 있는 그의 의상은 렘브란트가 학문적이고 예술적인 전통의 틀 안에서 그의 지적인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가 사스키아 아일렌부르흐와 결혼한 1634년에 그린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화상>은 진실하고 당당한 예술가 겸 구혼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가 자신의 얼굴을 절제되게 표현한 방식 또한 그의 사려 깊은 자아 표현을 보여준다. 특히 렘브란트가 눈 주위와 같은 그림자 진 부분의 반사광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피부색을 세심하게 표현하면서 그림자가 드리운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구도이자 채색이라고 하겠다. 가려진 눈동자가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오는 그의 번득이는 눈빛이 사랑하는 그의 반려자를 고대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기우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강렬한 매력적인 자화상은 완성 직후 다른 화가에 의해 완전히 덧칠이 된다. 그 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원작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1930년대 중반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덧칠된 그림에는 길고 검은 곱슬머리에 콧수염과 얇은 턱수염을 기른 이국적인 중년 남성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모피 코트와 금으로 장식된 폴란드식 모피 모자, 이른바 칼팍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렘브란트의 1634년 작 에칭 자화상 <칼을 든 자화상>과 유사하다. 또한 그는 1642년대에 제작된 런던의 월리스 컬렉션 소장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망토 위에 금 사슬을 두 번 감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덧칠된 부분 중 일부가 제거되고 칼팍 아래에 베레모가 존재했음이 드러난다. 1990년대 렘브란트 연구 프로젝트에서 수행한 기술 연구에 따르면, 이 추가 부분은 원작 그림이 제작된 지 불과 몇 년 후인 1636/37년경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이처럼 덧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나머지 덧칠된 부분은 이후 복원 전문가들이 메스를 사용해 제거했다고 한다.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화상>이 왜 이렇게 덧칠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이 즉시 구매자를 찾지 못했기에 처박혀 있던 그림을 누군가 그렇게 덧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이 작업을 승인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가능성은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가 작업하던 헨드릭 아일렌부르흐의 화실에 그의 작품을 남겨두고 이사를 하면서 가져가지 않고 남아 있었고, 누군가 이 그림에 손을 대었을 수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겠다.
아일렌부르흐는 렘브란트의 제자인 호바르트 플링크를 그동안 렘브란트가 맡아온 수석화가 자리를 후임으로 맡기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이국적인 인물의 트로니로 바꾸는 작업을 맡겼을 가능성이 있다. 플링크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원본 형태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636년에 그는 이 자화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옛 스승을 사랑에 빠진 양치기로 묘사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양치기 소녀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렘브란트는 초상화 주문이 들어오면 얼굴과 목 부분을 그린 후 나머지 부분들을 제자들에게 완성하도록 했다고 하다. 이런 작품 제작 방식은 비단 초상화뿐 아니라 일반 회화작품 제작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화상>에 대한 플링크의 자유로운 덧칠 기법은 1637년경 플링크의 화풍 발전 양상과 일맥상통한다. 섬세한 자화상이 이국적이고 다소 섬뜩한 인물로 변모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흥미로운 변화는 예술 작품이 오랜 세월 동안 취향과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하며 복잡한 삶을 살다 떠난 렘브란트의 인생여정과도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어 삶의 궤적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속내까지 드러내며 일반 대중들과 교감할 수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렘브란트에게는 1633년 사스키아와 결혼한 날부터 1641년 그녀가 요절하기 전 병상에 누워 있던 시기까지, 그가 애정을 쏟았던 사스키아에 대한 감정을 모두 그림 속에 담아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 이후 그의 초상화는 문득 어느 성자가 다가와 그를 위로하는 느낌으로 초상화 속 인물은 스스로 렘브란트를 위로하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로서얀 에멘스는 그의 저서 『렘브란트와 예술의 법칙』에서 이러한 신화의 형성은 "렘브란트 신화"라고 불릴 수 있는 표준적인 전기 모델에 크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렘브란트 스스로 자신을 "사도 바울“로 묘사하면서 이제 새로운 자신의 삶에 대한 다짐과 의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초상화가 일반 회화 작품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의 초상화는 이제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그의 초상화는 새로운 형식의 스토리텔링을 지닌 또 다른 회화 작품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1642년 이후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화풍은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의 작품 <신성가족, 1645>과 1669년 죽기 직전 그린 <신성가족>은 단순한 그림소재로서의 가족 그림이 아니다. 그의 아내와 죽은 아이들이 천사로 묘사되고 마지막 살아남은 아들 티투스를 신성시한 가족 그림이다. 그의 회화에서 초상화와 스토리텔링의 주인공과의 일체화가 된 작품으로 빛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함께 고려한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세 개의 광원을 도입하고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반사되는 빛을 풍부하게 사용한다. 또한, 마리아가 돌보는 아가를 덮고 있는 덮개에 칠한 붉은색을 통해 강렬한 색채를 도입한다. 이전까지 빛에 비해 색채를 점차 줄여왔던 렘브란트의 화풍은 이제 <야곱의 축복>(1656)이나 후기 작품인 <유대인의 신부>와 <돌아온 탕자>와 같은 그림에 강렬한 붉은색으로 다시 나타난다.
또한 초기 작품에서 집중된 빛의 논리에 따라 종종 대각선 구도를 취했던 렘브란트의 화풍은 이제 더욱 정면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렘브란트의 <엠마우스의 만찬>(1648) 역시 그가 예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티치아노 후기 화풍을 접목한 작품으로, 특정 거리에서 감상할 때만 효과적인 화풍을 느낄 수 있도록 했음을 보여준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티치아노풍 화풍에 의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적용하여 그림의 밝은 전경 부분에 빛을 반사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을 개발하려는 그의 노력은 1645년경부터 시작되어 16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의 "후기 화풍"으로 부르는 시기의 시작을 알린다.
렘브란트의 연도별 작품(회화, 에칭) 제작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624-1630: 회화 47 + 에칭 54
2) 1631-1640: 회화 147 + 에칭 106
3) 1641-1650: 회화 41 + 에칭 69
4) 1651-1660: 회화 67 + 에칭 58
5) 1661-1669: 회화 42 + 에칭 2
이와 함께 작품제작을 위한 밑그림으로 그가 그린 드로잉은 2백여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도별 작품 숫자는 Wikipedia ' 그림 목록'과 '에칭 목록', '드로잉 목록'을 정리한 것임)
20대 후반인 1630년대 렘브란트의 작품활동은 엄청난 양의 작품을 제작했다. 거의 하루 이틀에 한 작품씩 제작한 것이다. 그 후 아내의 죽음 후인 1640년대부터 다소 그 숫자가 줄어든다. 그러나 이때부터 렘브란트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의 작품들은 엄청난 질적 발전을 하면서 그야말로 "Appells"('위대한 거장'이라는 뜻)라는 소리를 들게 되는 작품들을 창조해 낸다.
렘브란트 후기 화풍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붓질이 전반적으로 더 넓어졌다는 점이다. 개별 붓 자국이 때때로 보이기도 하지만, 붓질의 차이는 놀라울 정도로 뚜렷해진다. 후기 화풍의 또 다른 특징은 규모와 상관없이 붓질이 이전보다 훨씬 더 우연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렘브란트 후기 작품의 신비로운 특징은 초기 작품에 비해 관찰력과 회화적 기교가 더욱 깊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붓놀림은 더욱 생동감 넘치지만 렘브란트 후기 작품 속 인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초기 작품에서 인물의 몸짓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가장 자연스러운 생동감"으로 표현되어 설득력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목표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서는 몸짓이 거의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는 이미지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역동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생생한 표현 방식과 윤곽선을 "열린" 방식으로 처리하여 형태가 흐릿해진 효과 때문일 것이다. 회화 작품 속 붓놀림의 생동감이나 판화 및 드로잉 속 선의 생동감이 이러한 끊임없는 변화의 느낌을 자아내는 데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모든 것에서 빛은 초기 작품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을 한다. 렘브란트는 초기부터 그림 속에서 빛의 강도에 위계를 부여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1650년대와 60년대 작품에서 이러한 논리는 마치 마법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초기 작품에서는 강렬한 국소적 조명 효과가 두드러지는 반면, 후기 작품에서는 공간 전체가 인물 주변에 은은하게 감도는 빛으로 가득 찬 듯하다. 예를 들어, 1653년 작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호메로스 흉상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야곱의 축복>(1656)과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우스의 음모>(1661)에 등장하는 야곱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일부 인물 주변 공간에 반사되는 빛은 마치 신비로운 아우라처럼 작용한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유대인 신부>(1665), <직물 조합의 조합장들>(1661,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바스세바>(165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야곱>(1656, 독일 카셀 국립미술관), 그리고 자화상(1658, 프릭 컬렉션) 등이 있다.
한편, 1650년대 후반에 렘브란트와 함께 작업한 제자는 기록상 존재하지 않으며, 1660년대에 그에게서 사사한 제자는 아렌트 더 겔더(1645~1727) 한 명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가 자신의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예술가라는 확신은 그의 후기 자화상, 특히 1658년 작 자화상과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1659년 작 자화상, 그리고 런던 켄우드 하우스가 소장한 1660년경 그린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들만 봐서는 거장의 운명과 전망이 그토록 암울했음을 짐작하기 어렵다. 각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자신감과 내면의 강인함을 발산한다. 그는 보는 이에게 공감과 위엄을 동시에 자아내는 차분하고 체념적인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렘브란트는 추상과 현실을 융합하여 하나로 만들어낸다.
프릭 컬렉션의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사보나롤라 의자에 앉아 은 손잡이가 달린 나무 지팡이를 손가락 사이에 가볍게 쥐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권위의 상징이다. 금색 튜닉에 브로케이드 옷깃과 붉은색 허리띠, 그리고 모피 장식이 있는 로프를 입고 있는 그의 인상적인 복장은 전문 예술가나 네덜란드 시민의 옷차림이 아니다. 이는 렘브란트가 1658년에 그린 또 다른 작품인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가 필레몬과 바우키스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유피테르가 입고 있는 옷과 유사하게 고대 복식을 상상해 표현한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자화상에서 유피테르의 위엄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은 아니다. 그의 앉은 자세는 위협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친근하며, 단호하면서도 자애로운 표정에서 그의 깊은 인간미가 드러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자화상을 위해 렘브란트는 1639년 4월 19일 암스테르담 경매에서 본 라파엘로의 유명한 작가이자 궁정 신하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를 모방하기로 한다.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사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카스틸리오네의 자세를 에칭으로 재현했고, 1640년 자화상에서도 다시 한번 그 자세를 사용했다.
카스틸리오네의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과 맞잡은 두 손은 이후 20년 동안 렘브란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라파엘로의 원형을 다시 찾았는데, 그 작품에서 자신을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과 동등한 학식 있는 화가로 인식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켄우드 소장 그림은 렘브란트가 자신을 보편적인 예술가로 인식했던 방식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된다. 렘브란트는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든 채, 두 개의 원이 양옆으로 그려진 벽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이 추상적인 형태들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제작되던 반구형 벽 지도에 나타나는 쌍을 이루는 원들을 닮았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원들을 묘사할 때, 가시적인 세계 전체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여겨졌던 그러한 지도의 상징성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이중 원은 또한 학자들의 초상화, 특히 토마스 더 케이저가 그린 콘스탄틴 하위헌스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지구본과 천체 모형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물리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모두에 대한 지식을 상징한다.
그는 가족, 친구,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깊은 감정을, 때로는 빠른 스케치로, 때로는 정성스럽게 완성한 의뢰 초상화로 표현해 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본질적인 인본주의는 다른 어떤 예술가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영혼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렘브란트의 화풍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될 즈음 1663년 렘브란트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볼보아주던 헨드리케가 그만 흑사병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렘브란트의 하나뿐인 아들 티투스 역시 27세가 되던 1668년에 헨드리케와 똑같이 흑사병으로 죽음을 맞는다. 당시 이 전염병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리고 티투스가 죽은 다음해인 1669년 10월 4일 렘브란트도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난다. 헨드리케의 죽음 이후 6년간을 홀로 지내오던 렘브란트가 그동안 화판만을 의지한 채 열정적인 작업을 쉬지 않고 해 오다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하늘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던 게 아니었을까? 그가 죽기 직전 그린 가족들 그림이 그런 생각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렘브란트가 죽은 뒤 며칠이 지난 10월 8일, 그는 티투스와 헨드리케가 안장된 베스터케르크(암스테르담 서부교회)에 묻힌다.
그의 유산 목록에 있는 "미완성 그림들"(onopgemaeckte stucken schilderijen)과 죽기 직전 암스테르담의 미술 애호가 디르크 커튼부르흐의 의뢰로 에칭 수난화를 위한 여러 개의 동판화 제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런 사실은 그가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음을 말해 준다.
1664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 목록에서 "우리 시대의 기적"(het wonder van onze tijd)이라고 불렸던 이 화가는 특별한 추모나 거창한 찬사를 받지 못했다. 17세기를 빛내며 네덜란드 황금기를 그야말로 쉼 없이 그려낸 렘브란트, 그의 어둡고 거친 붓질의 초상화와 종교화, 역사화, 신화 작품들, 이제 렘브란트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잊히고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렘브란트 보다 200여 년 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보티챌리가 빈털터리로 홀로 잊힌 채 누구의 환송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과 작별을 해야 했던 것과 어쩜 그리도 판박이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 천재화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신화를 창조했고 오늘날 새로운 신화적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르네상스의 상징이던 보티첼리처럼 네덜란드 황금기의 상징 렘브란트 역시 한편의 그림으로 인간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아름다운 신화적인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전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많은 동시대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 작품이 이전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육체와 정신을 융합하여 인간 삶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아본 이들이 계속해서 렘브란트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그리워하고,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여전히 그의 작품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마치 한 겨울 밤하늘에 춤추는 신기한 오로라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 티투스의 딸 티티아는 암스테르담에서 계속 살았는데, 할아버지의 유일한 법적 상속인으로서 1671년 그림, 소묘, 진기한 물건들을 팔아 얻은 3,150 길더를 상속받았을 뿐이다. 렘브란트와 헨드리케 슈토펠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코르넬리아(1654~84)는 1670년 화가 코르넬리스 수이토프(1646~91)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동인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1684년에 사망했다.
* 렘브란트 400주년 기념 전시회에 관한 글은, “안녕, 렘브란트”: https://brunch.co.kr/@nplusu/77
* 렘브란트 라이덴 시절과 그의 사망 후 주검 행방불명에 관한 글은, "렘브란트": https://brunch.co.kr/@nplusu/24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