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얀 스테인(Jan Steen)

17세기 네덜런드 황금기 화가들

by 박종수

유쾌한 풍속화 화가 얀 스테인의 그림들을 보면서 웃다가 숙연해지기도 하고 또다시 씁쓸한 웃음을 띠게 되는 건 그만큼 스테인이 우리네 생활과 밀착된 그림들을 잘도 그려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1. 얀 스테인의 일생


얀 하빅스존 스테인(Jan Havickszoon Steen, ca.1626–1679)은 네덜란드 황금시대 화가이자 17세기 주요 장르 화가 중 한 명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 이름에 ~szoon, 또는 ~sz라는 표시는 ~의 아들이라는 표시이다. 따라서 Steen의 이름 ‘하빅의 아들 얀 스테인’에서 ‘Havick의 아들’이라는 글자를 빼고 그냥 Jan Steen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얀 스테인은 라이덴에서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양조업을 했기에 어려서부터 부유하게 자랐다. 스테인은 선배 화가 렘브란트처럼 라이덴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스테인의 미술 교육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세 명의 스승, 즉 위트레흐트에서 활동한 역사화와 인물화를 그린 니콜라우스 크뉘퍼(Nikolaus Knüpfer, 1609–1655)와 풍속화의 대가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1610-1685), 그리고 훗날 그의 장인이 된 얀 판 호이엔(1596–1656)에게서 회화 교육을 받았다.


니콜라스 크뉘퍼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도제 생활을 하다가 1631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로 이주를 하고 작업실을 차린다. 크뉘퍼는 덴마크 크론보르 성 장식 작업을 할 정도로 인기 있는 화가였는데, 역사화와 신화 등에 관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얀 스테인(Jan Steen)과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가 크뉘퍼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화법을 전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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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얀 스테인 자화상(1670), 2) 니콜라우스 크뉘퍼, 토비아스와 사라(1654), 3) 얀 스테인, 토비아스와 사라(1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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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7세기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 인맥도, 5)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 도박하는 사람들(1653), 6) 얀 판 호이엔, 강가의 풍차(1642)



3) 얀 스테인이 그린 '토비아스와 사라'(1668)는 스승 니콜라우스 크뉘퍼가 1654년에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인데, 토비아스와 사라가 기도하는 동안 천사 라파엘이 악마를 쫓아내는 장면이다.



얀 스테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스승은 아마도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1610-1685) 일 것 같다. 그 역시 네덜란드 황금기의 풍속화 화가로, 평범한 남녀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오스타데 형제는 17살에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제자로 입문했다.


그가 그리는 그림들은 한 세기 전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풍속화 화가 브뤼헬(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처럼 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특히 선술집 풍경과 마을 장터, 시골 마을 등을 대상으로 그렸다. 판 오스타데는 특히 '하층민'들이 모여 있는 여관이나 험상궂은 사람들이 벌이는 도박과 싸움박질, 그리고 낡은 가구와 깨진 그릇들처럼 일상적인 생활 속 소재들을 즐겨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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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터르 브뤼헬, 농가의 결혼(1568), 2)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 술집의 도박꾼들(1635), 3) 얀 스테인, 춤추는 사람들(1663)


한편, 얀 판 호이엔(1596–1656)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화가로서 풍경화를 주로 그린 화가로 얀 스테인의 장인이다. 그는 라이덴에서 태어나 라이덴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는 35세에 헤이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직업작가로 활동한다.


스테인은 여러 스승으로부터 그들의 화풍을 배우고 스테인 역시 유쾌한 풍속화 화가로서 발전해 나갔다. 스테인의 그림에는 상당수가 선술집과 술 취한 사람들, 그리고 축제 모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스테인의 그림은 여기에 더해 종종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아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유쾌한 풍속화’로 알려져 있는 스테인의 작품들은 삶을 거대한 희극으로 묘사한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얀 스테인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대표적인 화가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할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편, 얀 스테인은 22살이 되는 1648년 고향 친구 가브리엘 메추(Gabriël Metsu, 1629-1667)와 함께 라이덴의 화가 조합인 ‘성 루크 길드’를 만들고 창립멤버로 활동을 한다. 이듬해 23살이 되자 1649년 10월 3일 스테인은 그의 스승 호이헨의 딸과 결혼을 하고, 헤이그에 있는 그의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때부터 호이헨의 조수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그의 화풍을 배우게 된다.


스테인은 아내 마그리트와의 사이에 여덟 자녀를 낳는다. 스테인은 1654년까지 장인과 함께 일하다가 별로 성공할 조짐을 보이지 않자 델프트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아버지 양조장을 임대해 운영한다. 스테인이 델프트로 옮겨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54년 10월 12일 델프트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데프트의 미술 시장은 침체되었지만, 스테인은 이 시기 ‘델프트 시장과 그의 딸’(1655)과 볼링게임(1655) 등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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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델프트 시장과 그의 딸(1655), 2) 볼링게임(1655), 3) 점쟁이(1656)


스테인은 1656년부터 1660년까지 라이덴 바로 북쪽에 있는 바르몬트(Warmond)로 옮겨가 살았고 1660년부터 1670년까지는 하를렘(Haarlem)에서 살았다. 그런데 1669년에 아내가, 1670년에는 아버지가 사망을 하자 스테인은 고향 라이덴으로 돌아와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재앙의 해라고 부르는 1672년이 닥치자 미술 시장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다. 스테인은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주점을 연다. 1673년 4월에는 마리아 판 에그몬트(Maria van Egmont)와 재혼해 또 다른 자녀를 낳았다. 1674년에는 라이덴의 ‘성 루카 길드’의 회장이 된다.


그러나 1679년 얀 스테인은 안탑깝게도 이른 나이에 사망을 한다. 그의 시신은 라이덴 피터스교회(Pieterskerk)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53세였다. 스테인은 다작 화가였으며 8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은 그중 350여 점만 남아 있다.



2. 인생은 즐겁게


1626년 라이덴에서 태어난 스테인은 고향인 라이덴을 비롯해 헤이그, 델프트, 바르몬트, 하를렘 등지를 오가며 활동했는데 166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상적인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묘사한다.


술 취한 사람이나 이빨을 뽑는 장면, 또는 점을 치는 사람들, 악기를 연주하거나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사람들 등 거의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일상생활의 풍경은 흔히 장르화라고 부르는데 이 그림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지닐 수 없는 인물들을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이들은 유명 인사의 초상화나 역사적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한 것이다.


이 시기 풍경화와 더불어 장르화에 대한 인기는 네덜란드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더 뛰어난 장르화 화가들을 배출했다. 그런데 장르화에는 여러 하위 유형이 있었다. 개인 인물, 농민 가족, 선술집 풍경, "즐거운 모임"이나 집안일을 하는 여성, 마을이나 도시의 축제 장면, 시장 풍경, 심지어 말이나 가축이 있는 풍경, 눈 속 풍경, 달빛 아래 풍경 등이 있다.


얀 스테인의 주된 회화 주제는 일상생활이었다. ‘성 니콜라스의 축제’(1662)와 같은 그의 풍속화는 혼돈과 관능미가 넘칠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심지어 "얀 스테인의 집"이라는 뜻의 어수선한 장면은 혼란스럽고 활기찬 특성을 반영한 가정을 가리키는데, 네덜란드 속담(een huishouden van Jan Steen: 얀 스테인의 집)으로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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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성니콜라우스축제(1662),-2) 노인이 노래하듯 젊은이는 피리를 분다(1665), 3) The merry Family(1668)


그의 그림 속에는 이러한 행동을 따라 하도록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경고하려는 듯한 미묘한 암시들이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테인의 작품에는 옛 네덜란드 속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따온 구절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허영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자화상도 여러 점 그렸다.


사실 이러한 풍경화 대부분은 네덜란드어로 특정 용어를 사용했겠지만, "장르화"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용어는 없었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인들은 이러한 풍경화를 "drolleries painting"(익살스러운 그림)이라고 불렀다.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얀 스테인은 가톨릭 중상류층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의 가족은 예술과 과학계와 인맥이 있었다. 그의 고모인 마리체 스테인은 화가 얀 리벤스(1607~74)의 동생인 요스트 리벤스 더 레히테(1606~49년경)와 결혼을 했는데, 얀 리벤스는 1649년 사망할 때까지 라이덴의 라펜부르크에서 서점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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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시스트럼을 연주하는 여인(1662), 2) 여관 앞뜰의 사람들(ca.1650), 3) 산타 클로스 축제(ca.1665)


시를 사랑했던 그의 삼촌 디르크 스테인(아버지 형제)은 유가공업자였으며 방대한 서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633년 사망 당시 이를 형제자매들에게 물려주었다. 얀 스테인의 다른 삼촌들 중에는 의학을 공부한 사람도 있었고, 약사, 악기 제작자, 음악가도 있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스테인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미술사적 자료들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테인은 문학 작품 외에도 선배 및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연구했는데, 주로 복제 판화를 통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역사화뿐 아니라 풍속화에서도 루카스 판 레이덴(1494~1533), 마르텐 반 헴스케르크(1498~1574), 피터 브뤼헬(1525/30~69), 렘브란트(1606~69) 같은 거장들과 라파엘(1483~1520), 야코포 바사노(1510~92), 파올로 베로네세(1528~88) 같은 이탈리아의 거장들 작품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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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터 라스트만, 리스트라의 파울루스와 바르나바(1617), 2) Lukas van Reiden, 치과의사(에칭/1523), 3) 얀 보트, 치과의사(1620-38)


스테인은 역사화뿐 아니라 풍속화에서도 관객에게 직접 시선과 몸짓으로 말을 거는 일종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자주 등장시켰다. 이러한 인물들은 마치 무대에서 관객을 따로 불러내어 공연에 대해 논평하는 해설자처럼 보인다. 스테인 시대의 다면적인 연극 활동은 특히 그의 연극적인 역사 작품에 있어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3. 역사화가 주는 교훈


스테인이 역사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660년대 중반 이후 하를렘과 라이덴에 거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금송아지 숭배와 아하수에로의 분노 같은 구약성경의 주요 서사적 주제나, 신약성경의 주제를 선호했다.


스테인이 다룬 다양한 주제는 역사 화가로서의 그의 야망을 보여준다. 이전 시대 화가들이 다루지 않았거나 거의 다루지 않았던 주제를 꾸준히 선택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창의성을 드러낸다. 얀 스테인의 역사화는 약 75점이 현재까지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의 현존하는 작품 수(약 350점으로 추정)의 5분의 1이 넘는다.


특히 그의 역사화 중에서 그가 고향인 라이덴에 다시 돌아와 정착한 생애 마지막 시기인 167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이 최고의 걸작이라고 하겠다. 어쩌면 이 시기가 그에게 가장 열정적인 작품활동을 펼친 시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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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목자들릐 경배(1660), 2) 이하수에로의 분노(1671-73), 3) 황금송아지 경배(167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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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엠마우스의 만찬(1666), 2) 모세와 파라오의 왕관(1670), 3) 삼손의 조롱(1675-76)


이 시기에 그린 그의 대표작은, ‘이피게니아의 희생’(1671)과 같은 신화 이야기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1660, 1667, 1670, 1675)처럼 로마 역사에서 유래한 이야기(이 작품은 그가 네 번이나 그렸다.), 그리고 ‘삼손과 델릴라’(1668), ‘삼손의 조롱’(1676) 같은 성경 속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스테인에게 일반적으로 의미 있는 모티프는 다름 아닌 인간 그 자체라고 하겠다. 스테인에게 ‘인간의 조건’은 무궁무진한 영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탕한 가정, 여관에서 흥청거리는 사람들, 돌팔이 의사, 사랑에 빠진 소녀, 말썽꾸러기 아이들, 자녀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이는 부모 등 그야말로 여러 인간상의 해학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고민과 결점, 기쁨, 슬픔에 관한 이야기와 일화를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은 장난기 넘치는 모호함과 유머가 특징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악덕과 약점을 풍자하는 데 탁월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유쾌한 풍속화는 그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점차 성경이야기와 문학작품, 그리고 신화와, 고대 로마 역사와 같은 문헌 자료에서도 소재를 찾았다. 그는 이러한 자료들에서 당시에는 역사서라고 불렸던 이야기들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인물화가로서 자신의 레퍼토리를 확장함으로써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역사적 주제를 다루었다. 풍속화에서처럼 그는 여러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과 그들의 감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스테인은 누군가가 조롱당하고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희극적이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를 선호했다.


그는 연회와 잔치 장면,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즐겨 그렸다. 풍속화에서보다 역사화에서 스테인은 더욱 다채로운 의상을 입은 연극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종종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기도 한다. 어린이와 우스꽝스러운 등장인물들은 조연으로 등장하며, 때로는 현대 연극에서처럼 시선과 몸짓을 통해 관객과 소통을 하기도 한다.


‘이피게니아의 희생’(1671)은 ( 그림 5) 스테인의 역사화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념비적인 크기뿐 아니라 잘 알려진 이야기를 독창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얀 스테인, 이피게니아의 희생(1671)


스테인은 이 그림을 그가 방랑 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라이덴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세기에 그린 이 작품의 첫 번째 소유자의 신원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그는 라이덴의 저명한 포목상이자 유리 조각가, 시인, 극작가로도 활동했던 빌렘 야콥스 반 헴스케르크(1613~1692)였다.


이 작품의 크기는 134.6 x 172.7cm 인데, 그림의 크기를 고려할 때, 스테인이 반 헴스케르크의 의뢰로 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림의 판매 여부가 불확실했다면 화가가 시간과 돈을 들여 이처럼 크고 값비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얀 스테인의 후기 성서 및 신화 그림들은 종종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고 당혹스럽게 한다. 1671년에 제작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장 그러하다. 그림 속 젊고 아름다운 이피게니아는 분노한 여신 디아나를 달래기 위한 제물로 제단에 끌려가고 있지만, 이 장면은 그토록 심각한 주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엄숙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관객을 웃기는 것을 좋아했던 스테인은 이피게니아의 영웅적인 행동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 주변 인물들의 나약함과 기만적인 행태를 강조한다. 그의 의도는 확실히 17세기 신학자들의 독선적인 태도를 풍자하려는 것이었다. 스테인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던 복잡한 신학적, 정치적 권력 투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비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주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은 분노한 여신 디아나의 강요로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야만 트로이로 향할 수 있었던 그리스 장군 아가멤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테인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제사 장면을 그렸는데, 그림 중앙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연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어린 희생양 이피게니아를 둘러싸고 있다.


이 처럼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사연은 다름 아닌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 중 한 마리를 사냥해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가멤논의 연합군이 트로이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피게니아를 희생양으로 바쳐야만 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니아를 결혼식을 빙자해 이곳으로 오게 해 디아나에게 제물로 바치고 허탈해한다.


이피게니아는 자신이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피게니아가 제단으로 끌려갈 때 디아나 여신은 이피게니아 대신 사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녀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인기 있는 신화였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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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 폼페이 프레스코화, 2) Sébastien Bourdon, 1653, 3) 샤를 드 라포스, 1680


이 이야기는 특히 네덜라드에서 종교적 극단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기도 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개신교는 레몬스트란트파와 반레몬스트란트파 간의 극심한 갈등이 심했다. 이 종교적 분쟁은 결국 정치적 권력 투쟁이 원인이었는데,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네덜란드 정치가였던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1547~1619)는 보다 자유주의적인 레몬스트란트파 편에 섰고, 네덜란드 군 총사령관이었던 오렌지 공 마우리츠(1567~1625)는 정통파 반레몬스트란트파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개인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 그리고 시민 생활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자,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1632~1677)가 1670년에 [신정치론]을 출간해 개신교 지도부의 세속적인 사회 간섭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따라서 얀 스테인이 1671년에 이피게니아 이야기를 바탕으로 비판적 메시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테인은 바로 이 순간, 이피게니아가 모든 것을 알아채고도 체념한 순간, 즉 결혼식이 아니라 희생양을 제물로 바치려는 속임수가 드러나는 순간을 묘사했다. 왼쪽에는 눈물 흘리는 큐피드가 활과 부러진 사랑의 화살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그를 뒤쫓는 노파가 있다. 이 노파의 모습은 스테인이 여러 풍속화에서 묘사했던 희극적인 중매쟁이 유형을 보여준다.


이피게니아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제단에서는 짙은 연기가 신전 입구에 앉아 있는 조각상으로 묘사된 디아나 여신을 향해 피어오른다. 이피게니아는 비웃는듯한 몸짓을 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사형 집행인인데, 그는 활짝 웃으며 눈을 부릅뜬 채 날카로운 칼로 이피게니아의 목을 베는 일을 고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조만간 디아나 여신이 나서서 이피게니아 대신 암사슴을 제물로 바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른쪽에는 이피게니아의 아버지 아가멤논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후회와 슬픔에 잠겨 왕좌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다.


스테인은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기로 한 선택은 당시 네덜란드를 위태롭게 했던 칼뱅파를 겨냥한 ‘정통파의 타협 없는 권위적 종교 정치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범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테인의 역사화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또 다른 풍속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피게니아는 순진한 소녀이지만 스테인의 다른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들이 모두 그렇게 순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을 능가하는 지략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테인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또 다른 역사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1675)에서 아름답고 교활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인 로마 군 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사로잡는다. 누가 더 호화로운 연회를 열 수 있는지에 대한 두 사람의 내기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멋지게 승리한 이야기는 전설적이다.


얀 스테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1673-75)


그녀는 자신의 귀중한 진주 귀걸이 하나를 식초에 녹인 다음 그것을 마신다. 스테인의 그림은 웅장한 갤러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연회 테이블 위로 드리워진 붉은 휘장은 연극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조롱하듯 두 번째 귀걸이를 안토니우스에게 내 보이며 마치 “또다시 이걸 녹여서 마실 거야”라고 하는듯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던 안토니우스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뻗어 클레오파트라를 제지하면서 마치 “됐어 그만하시게나. 내가 졌네”라고 하는 듯하다. 아킬레스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로마식 투구를 쓴 그의 군복 차림은 오히려 클레오파트라 앞에서 무력한 어릿광대처럼 보이게 만들고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

더욱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 클레오파트라 뒤에서 광대 모자를 쓴 난쟁이가 눈에 띈다. 그는 웃는 아이에게 제지당하는 모습 또한 마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처럼 희극적인 풍자처럼 비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 뒤에 있는 뚱뚱하고 대머리인 남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우습다는 시늉을 하고 있고, 오른쪽 탁자 위의 남자는 칼로 이를 쑤시고 있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참관자처럼 다소 허풍쟁이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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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 Jacob Jordaens, 1653, 2) 제라르 더 라이레스, 1680, 3) Giovanni Batista, 1744


그뿐 아니다. 스테인은 자신의 특기처럼 희극적인 요소들을 그림에 삽입하기 시작한다. 여러 인물들을 그림 전체에 배치하고, 특히 클레오파트라 뒤에 난쟁이 같은 궁정 광대와 그의 흰 스카프를 잡아당기는 아이를 보여준다. 광대는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구운 고기 조각을 들고 있고, 작은 강아지가 냄새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스테인이 광대를 그려 넣은 것은 세상을 조롱하려는 듯 보인다. 칼을 들고 갈비 한쪽을 들고 마치 “나도 호화로운 연회를 할 수 있는데”라고 비아냥대는 듯하다. 이 광대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치스러운 낭비를 조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쪽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뺨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메롱”하고 비웃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대고 있다.


얀 스테인은 이 이야기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를 네 번이나 그렸다. 다른 작품들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두 작품은 클레오파트라가 왼발을 구체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이는 인생의 부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를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은 얀 스테인이 1667년에서 1670년경에 제작한 폭이 거의 2미터에 달하는 대형 그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문화유산청(Rijksdienst voor Cultureel Erfgoed)이 소장하고 있다.


스테인은 이 그림에 도자기, 의자, 식탁보, 값비싼 페르시아 양탄자 등을 자세히 묘사했다. 낭비벽을 조롱하는 바보의 역할은 그림 맨 오른쪽에서 고개를 들어 관람객을 향해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헤벌레 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얀 스테인 자신이 맡고 있다.


얀 스테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667-70


이 같은 여성 우위의 사랑이야기는 결국 다양한 역사화의 주제로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강력한 삼손의 몰락을 초래한 배신자 들라일라를 묘사한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스테인은 자신의 풍속화에 종종 자신의 모습을 슬쩍 삽입해 그려내면서 관객들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얀 스테인, 삼손과 델릴라, 1668



4. 인생은 연극처럼


스테인의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이 있다. 한 가지는 스테인이 그려 넣는 연극적 요소들, 두 번째는 거의 대부분의 스테인 작품의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얀 스테인의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이 일상 환경을 순전히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환상과 연극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담겨 있다.


얀 스테인과 연극과의 연관성은 그가 레데라이크(Rederijkers: 수사학 단체)와 맺은 관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얀 스테인의 삼촌은 라이덴의 레데라이크 회원이었고, 둘째 얀 스테인은 레데라이크 회원들의 여러 모습을 그렸는데, 그 예로 1663년에 그린 '창가의 수사학자들'(1663)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인간미, 유머, 그리고 낙관적인 모습은 얀 스테인이 이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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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린, 1) 창가의 수사학자들(1663), 2) 류트 연주하는 자화상(1665), 3) 류트 연주하는 자화상(1664)


이런 바탕에서 얀 스테인이 연극에서 사용하는 기법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차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스테인은 언제나 여유롭게 희극적인 삶을 살고자 했는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특히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진짜 의사가 아니라 연극에 등장하는 한 인물로서의 의사역을 배정받은 배우같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의 상대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환자 역시 연기를 곧잘 하는 배우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스테인의 작품들에 출연하는 배우들 중 주인공은 언제나 여성들이란 점이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스테인의 작품을 감상하면 즐거운 그림감상이 될 것이다.


먼저, 스테인의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주로 '의사의 방문'이라는 제목과 관련된 작품들을 보자. 스테인은 그의 작품을 연극적인, 특히 희극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의사의 방문’이 갖고 있는 주제의 특이성은, “젊은 아가씨를 진찰하는 의사가 그녀가 실제 육체적인 고통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내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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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이빨 뽑는 사람(1651), 2) 시골 의사(1653), 3) 아픈 소녀(1660)


의사는 중절모를 쓰고 양복 윗저고리를 걸쳤는데 자세히 보면 작은 주름 장식이 있는 겉저고리를 입었고, 아가씨 역시 우스꽝스럽게도 100여 년 전에 유행했던 헐렁한 의상을 걸치고 있다. 이것은 진짜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 연극에 출연한 배우처럼 의상을 입은 배우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특이하고 시대착오적 의상은 스테인만이 그릴 수 있는 연극적 회화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들 중, 의사의 진찰과 관련된 작품들은 대부분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다. 그래서인지 '병원 방문'이나 '아픈 소녀'는 스틴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였다. 그는 항상 의사들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고, 완전히 구식 복장을 입혔다. 스틴은 또한 ‘환자’라는 존재는 언제나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이런 '의사'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희생자들이었다.


모자를 쓴 치과 의사가 한 어린 소년의 이를 뽑고 있다. 소년은 주먹을 꽉 쥐고 고통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양말은 다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지만, 왼쪽에 있는 여자는 동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혹시 소년의 어머니가 아닐까?


시골 의사는 악마적인 쾌락에 가까운 표정으로 환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고정시키면서 작은 주걱을 환자의 벌어진 입으로 겨누고 있다. 농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의 모든 모습에서 드러난다. 한편, 의사와 공범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은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농부의 바구니에서 달걀을, 허리에 묶인 가죽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고 있다.


한편, 떠돌이 돌팔이 의사들은 네덜란드 마을 장터를 드나들며 의심스러운 의학적 치료법을 팔았지만, 스테인의 시골 의사는 집에서 진료를 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발사 겸 외과의사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스테인의 시골 의사 이웃들은 치과 치료, 파상풍 치료, 결석 제거는 물론 다양한 미용 시술, 면도, 이발 등을 통해 실제든 상상이든 온갖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이 이발사 겸 외과의사를 찾았을 것이다.


시골 의사 그림의 왼쪽 전경 바닥에 놓인 커다란 붓은 그가 이발사였음을 보여주며, 왼쪽 나무 선반에는 그의 다재다능한 직업과 관련된 다양한 도구와 용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스테인의 이 그림에서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술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골 의사(1653)의 경우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이빨 뽑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앞으로 내민 몸짓은 그가 이를 뽑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다. 오히려 그는 환자의 벌린 입에 강제로 약을 먹이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상황을 틈타 어린 도둑의 존재는 당시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환자들의 산만하고 흐트러진 위기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치과의사는 이를 뽑는 사람처럼 거짓말을 잘한다"라는 속담이 있었다고 하는데 치과의사들은 특히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스테인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 중 하나는 의사의 진료나 아픈 소녀였다. 이는 스테인의 화풍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유머러스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아픈 소녀'(1660)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한 젊은 여성이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의사는 속고 있다. 여성은 당시 의사들이 매우 심각하게 여겼던 '자궁탈출증'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질환의 유일한 치료법은 환자가 연인과 잠자리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성(환자)은 바로 의시가 그 치료를 해주길 바라고 있는 듯하다.


스테인의 유머는 볼수록 재미있고 놀라운데, 물론 그 자신은 결코 악의적이지 않으며, 그가 묘사한 인간의 약점들을 보고 찡그리기보다는 미소 짓게 된다. 그는 과장된 표정, 자세, 몸짓으로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독특한 재능을 지녔으며, 그의 유려한 붓놀림은 이러한 요소들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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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여성들이 남성을 폭행하다(1670~73), 2) 침실에서(1668-70)


소박한 실내 벽난로 옆에서 세 여자가 무력하게 쓰러진 남자를 마구 때리고 있다. 한 여자는 남자의 셔츠를 붙잡고 짧은 빗자루로 내리치려 하고, 다른 여자는 낄낄거리며 남자의 바지를 잡아당긴다. 또 다른 여자도 쓰러진 남자의 바지를 잡아당기는데, 아마도 지갑을 찾는 듯하다.


지갑은 사실 남자의 다리 사이에 있고, 열쇠가 자물쇠에 달려 있다. 남자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오른손에 힘없이 쥐고 있는 나무 숟가락뿐이다. 왼손으로는 빗자루를 든 여자가 쓰고 있는 하얀 머리 스카프를 움켜잡지만,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할 수 없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입을 벌린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고, 모자가 벗겨져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나 있다.


이 소란스러운 무리 뒤편에서 아이는 벽난로 오른쪽에 있는 빵 굽는 화덕에 손을 뻗고 있고,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은 층계 위에는 한 여자가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다.


여성의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남성을 조롱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작품의 주제였다. 오른쪽 전경에 있는 닭 바구니는 남자가 집안일에 참견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얼간이, 즉 "암탉을 만지는 사람"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한 수탉이 아니라 “암탉이 우는 은유”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사람들은 상당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단순한 조롱거리만은 아닌 남성의 무능함이기에 말이다. 이 그림이 암시하는 뒤죽박죽 세상은 피터르 브뤼헬 형(1525~69)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1673-75_돼지는 돼지우리에 있어야 한다-마우리츠미술관.jpg 얀 스테인, 돼지는 돼지우리에 있어야 한다(1673-75)


술에 취한 여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구토를 하고 있다. 술병을 손에 쥐고 있고 블라우스 밖으로는 가슴이 드러나 있다. 구경꾼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오른쪽 돼지우리로 끌고 간다. 돼지는 돼지우리에 있어야 제자리니까. 거기서 술이 깰 때까지 푹 자면 되겠지.


얀 스테인은 이 작품에서처럼 존엄성의 상실을 냉혹하게 묘사한 적이 거의 없다. 술에 취한 여자는 모든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익살꾼이었던 스테인은 술 취한 여인네뿐 아니라 구경꾼들을 또한 풍자적으로 그려내며 비웃었다. 마치 그들 모두 만취한 것처럼 말이다.


얀 스테인의 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성모 마리아’가 떠오른다. 스테인은 한 번도 마리아를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리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피게니아가 그랬고 클레오파트라가 그랬다. 그뿐 아니라 농민들이나 일반 서민층 여인들까지 거의 대부분의 그림 속 주인공은 마리아의 분신 같은 느낌이다.


우연이 아닐 게다. 스테인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으로 조신한 가톨릭집안의 예법을 익혔을 것이고 여신의 나라답게 마리아의 격언이 그의 몸속 깊은 곳에 배어있었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심지어 술 먹고 망나니 짓거리를 해대는 주인공까지 남자가 아니라 여인네를 등장시킨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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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인, 1) 사치를 조심하라(1677), 2) 방탕한 가정_사치를 조심하라(1663)


이 축제 분위기의 그림에서 실제 주제는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누가복음 16:19-31)로, 오른쪽 배경에 펼쳐진다. 누더기를 입은 나사로는 식탁 앞에 앉아 호화로운 음식 조각이라도 얻어먹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하인은 터번을 쓴 부자의 잔을 채워준다.


성경 말씀대로, 오직 개 한 마리만이 거지에게 다가와 그의 상처를 핥아준다. 스테인은 팔짱을 끼고 식탁보를 흔들며 나사로를 조롱하는 여자를 그려 넣어 그의 비참함을 더욱 강조한다. 나사로가 부자가 아닌 천국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이 그림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작용한다. 시턴 연주자 아래 돌담에 새겨진 " In weelde siet toe"(사치를 조심하라)라는 글귀가 이를 뒷받침한다.


스테인은 이전에 1663년 작 ‘방탕한 가정’에서도 같은 속담을 경고의 의미로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는 안주인이 잠든 사이 젊은이와 노인들이 방탕하고 음란한 행동을 일삼아 집안이 엉망이 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똑같은 주제의 그림을 반복해 다시 그린 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유쾌한 풍속 화가 얀 스테인의 그림들을 보면서 웃다가 숙연해지기도 하고 또다시 씁쓸한 웃음을 띠게 되는 건 그만큼 스테인이 우리네 생활과 밀착된 그림들을 잘도 그려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이제 스테인은 연극의 막을 내리면서 우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 말, “사치를 조심하고, 즐겁게 살아라”가 아니었을까?


얀 스테인, 여관애서 흥청망청 지내기(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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